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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42화 (142/194)

00142  5-7 달콤한 납치 (2)  =========================================================================

7장 달콤한 납치(2) - 4

그렇게 그의 납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날 깊은 밤, 린덴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에는 그녀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엘리제.’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제 빨리 식을 진행해야지.’

프로포즈를 했으니, 이제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절차고 뭐고 상관없이 무조건 최대한 빠르게 일정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약혼 따위는 생략하고 싶은데. 어차피 약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 문제에 관해 궁내부장과 여러 번 다투었으나, 결국 이길 수가 없었다.

‘전하.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그것만은 안 됩니다! 황실 역사상 그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로마노프 황실에는 그런 쓸데없는 규칙이 있는 건지.

‘예법이 뭐라고. 젠장.’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은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혼을 생략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약혼 뒤 곧바로 빠른 결혼식!

그는 약혼과 결혼식을 경주마처럼 단숨에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결혼만 해봐라.’

정말 하루 종일 혼내줄 것이다. 이번에 밤마다 받은 고통을 10배, 아니, 100배로 돌려줘야지.

그뿐인가? 절대 품에서 안 놔줄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무얼 하든 다 함께할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깊게 잠든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잔잔하게 웃은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와의 용무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었다.

끼익.

방에서 나오니 늙은 청지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가시렵니까, 도련님?”

“아아, 그래.”

늙은 청지기는 그를 전하로 부르지 않고, 도련님이라 불렀다.

워낙 어릴 때부터 보아오던 사이여서 그렇다. 이곳은 황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민체스터 개인 소유의 별장이었다.

“여기 준비해 두라 한 것입니다.”

“그래.”

린덴은 청지기가 건네는 바구니를 챙겼다.

“밤이 늦었는데,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마구간에서 갈색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말을 달렸다.

달빛 외에는 의지할 데 없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익숙한 길인지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았다.

갈색 말은 항구 도시를 벗어나 교외의 외딴길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길옆으로 서부 해안가, 대양이 검은 파도를 철썩였다.

“…….”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클리우드 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린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방금 엘리제를 보며 따뜻한 표정을 짓던 얼굴은 없었다. 그저 무표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는 곳은 그의 아픔이 잠들어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인적 없는 해안가의 절벽 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

묘지였다.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두 개의 묘비가 서 있었다.

묘비의 문구는 짧았다.

민체스터가 사랑하는 레베카, 이블린.

이곳에 잠들다.

레베카. 이블린.

린덴의 어머니와 누이. 그의 눈앞에서 한 줌의 핏물로 변했던 가족들.

황후 레베카는 딸과 혈탑에서 몸을 던지기 전, 유서에 고향 근처인 이곳 서부 해안가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 누이.”

린덴은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지요. 죄송합니다.”

그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바구니에는 생전에 그들이 좋아하던 빨간 튤립과 장미가 담겨 있었다.

린덴은 조심히 그 꽃들을 묘비 앞에 올려놓았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십니까?”

린덴은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대답을 들을 수 없는 허무한 물음. 그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잘 지내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아직도 밤마다 그들의 꿈을 꾸었다. 그들이 눈앞에서 핏물로 변하는 끔찍한 그때의 꿈을.

죄 없이 그렇게 죽은 그들이 천국에서라도 잘 지내고 있을 리가.

“사실…… 저는 사랑하는 소녀가 생겼습니다. 작고, 예쁜 소녀입니다. 가끔 많이 얄밉기도 하지만요.”

그는 어머니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 그녀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이미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가슴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라면…… 이런 저라도…… 웃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슴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얻은 상처는 그가 평생 지고 가야 할 괴로움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녀와 함께라면 이런 나라도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그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죄 없이 죽은 그들을 위해.

“어머니. 누이.”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정말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머나먼 옛날.

그가 어렸던 시절. 그들이 스러져 가던 때가 떠올랐다.

가문의 위세를 힘입어 황비의 자리에 오른 마리엔은 황제를 사랑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한 명. 황후 레베카. 그는 황비 마리엔을 철저히 냉대했다.

그 냉대에 점점 비틀어져 가던 마리엔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황후 레베카에게 추악한 모함을 한 것이다. 가문의 힘을 동원해 완벽한 증거를 마련해서.

차일드 가문을 따르던 귀족들이 그에 동조했다.

‘역시 천한 피는. 더럽다니까.’

‘평민 출신이 황후에 오를 때부터 알아봤어. 더러운 계집이 황후의 위에 올라서. 이 대 브리티아 제국의 수치라니까.’

비난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다.

‘추악한 죄를 저지른 황후를 폐위하라!’

‘황실의 명예를 먹칠한 황후를 끌어내려라!’

그런 비난이 유폐되어 있던 레베카에게 끝없이 쏟아졌다.

그 비난을 들으며 그의 어머니 레베카의 영혼은 말라 비틀어져 갔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끔직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같이 괴로워하던 딸과 함께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린덴은 그 일을 일으켰던 이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리엔 황비, 암셀 후작, 그리고 당시의 일에 동조했던 귀족파의 귀족들.”

린덴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 금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 단 한 명도.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모두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어머니와 누이를 위로할 것이다.

그게 그가 일평생을 바라왔던 단 하나의 염원.

“이제 정말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염원을 이루면.

그들도 저 세상에서나마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더는 꿈에서 괴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지 않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도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평안히 계십시오.”

린덴은 잠시 말없이 묘지를 바라보다가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

두둑.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옅은.

어딘지 슬픈 느낌의 비였다.

그렇게 달콤한 시간이 끝나고.

론도의 비극.

각자의 싸움. 그리고 그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6막

각자의 싸움

***

그렇게 달콤했던 납치가 끝나고 엘리제와 린덴은 론도로 돌아왔다.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엘리제는 병원의 교수실에서 차를 마시며 멍하니 당시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걸었던 소도시, 종탑.

맛있는 음식들.

즐거웠던 축제.

호텔에서 그와 함께 마셨던 맥주.

그리고 프로포즈.

모두 꿈과도 같은 기억들이었다.

‘전하. 린덴.’

론도에 돌아온 그는 곧바로 궁내부장에게 일러 약혼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절차 따위는 상관없으니 최대한 빨리. 속도에 중점을 두고 진행하라고. 왠지 속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

처음 다시 돌아왔을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 지상 최대의 목표는 황태자와의 결혼을 피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신은 또 그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전 삶처럼.

하지만 싫은가? 그렇지 않았다.

이전 삶과는 달랐으니까. 자신과 그 모두, 이전 삶의 엘리제와 린덴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그도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 누군가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왔을 뿐인데 온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을 보면.

세 번의 삶을 살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그를 많이 사랑했던 첫 번째 삶 때도 이런 감각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만큼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건 기적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보고 싶네.’

얼마 전 봤으면서 또 생각이 났다.

그도 그럴까? 난 이렇게 그를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혹시 그도 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멍하니 린덴만 생각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엘리제. 할 일이 많잖아.’

꿈같은 납치를 당했다고 해서 할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마음속 가장 큰 근심.

‘그와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엘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앞으로 이 론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론도의 비극.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과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미하일은 결국 충돌한다. 그것도 처절히.

그 결과 자신에게 항상 기분 좋게 웃어주던 미하일이 죽는다. 아름답던 유리엔도 죽는다. 수양아들을 걱정하던 암셀 후작도 죽는다. 귀족파의 무수히 많은 귀족이 죽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은.

그 비극을 일으키고 마음이 망가졌었다.

‘나는 이 싸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엘리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말리고 싶었다.

소중한 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간절히.

복수를 이루고 괴로워하는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무뚝뚝한 남자는 그 복수를 감당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무엇보다 복수는 그에게 후련함보다는 또 다른 괴로움만을 안겨 주었다.

동생 미하일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수없이 많은 이의 피를 흘렸다는 자괴감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말려?’

혈탑의 비극은 오로지 마리엔 황비와 귀족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려는 린덴의 복수는 정당하다.

만약 그들을 용서한다더라도, 그건 린덴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었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사랑하는 연인인 그녀라도 마찬가지였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전 삶처럼 모른 척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주여. 제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기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발.

***

하지만 그녀의 기도와 다르게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일단 민체스터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만 갔다.

엘리제와 밴을 비롯한 여러 의사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악화를 늦추는 데 그칠 뿐이었다.

“이거…… 영애의 약혼식과 결혼식에는 꼭 참석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민체스터의 힘없는 목소리에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좋아지실 것입니다, 폐하.”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은 있었다.

‘이전 삶의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하실 때와는 달라.’

그녀의 치료로 황제의 당뇨는 잘 조절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결정한 일일까?

당뇨와 상관없이 황제의 건강은 계속해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낼 수도 없이.

‘현대 지구라면 여러 분자진단학 기법 등을 통해서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현대 지구의 기술이 있다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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