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5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2
“진실을 규명하라!”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라! 아무리 황태자라도 진실을 가릴 생각은 하지 마라!”
거리 여기저기서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두 차일드 가문의 사주를 받은 선동꾼들이었다.
그런 외침들은 그렇지 않아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시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곧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론도의 피카딜리 거리, 대광장, 찰스 광장 등에 수많은 시민이 집결했다.
그들은 ‘독살범을 반드시 엄벌하라!’란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이런 외침도 있었다.
“폐하를 음독한 황태자를 폐위시켜라!”
“진실을 철저히 밝히고, 황태자를 단두대에 보내라!”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불경한 말. 마치 황태자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 확정이라도 된 듯한 시위였다.
모두 차일드 가문의 사주대로였다.
시위가 격해질수록 시민들의 의심은 깊어졌고 여론은 점차 악화되었다.
***
그리고 그때, 황태자를 추종하는 황제파의 인물들은.
콰앙!
“절대 아닙니다! 전하께서 독살 모의라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다들 미친 것 아닙니까?”
“암살 모의를 했다면 그네들, 귀족파에서 했겠지요! 전하께서 왜 암살 모의를 합니까?!”
모두가 분노해 열변을 토했다.
암살 모의라니! 기가 차지도 않는 모함이었다.
황태자가 왜 그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만약 암살 모의를 했다면 귀족파가 했겠지. 황태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큰일이구나.’
황제파의 수장, 재상 엘 후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이지만 당장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축배는 황태자가 직접 준비한 술이다. 운반을 담당한 시종을 심문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특별한 혐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술이 남아 있으면 그걸 다른 사람에게 먹여 보기라도 할 텐데. 그러면 독이 안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하아.’
하지만 ‘감사의 축배’ 절차 때 사용하는 예식주는 보통 한 잔 분량 정도의 아주 적은 양만 준비한다. 민체스터 황제가 모두 마셔 버려 다른 이에게 실험해 볼 만큼 양이 남아 있지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백원의 궁에 들어가셨습니다.”
“허…… 그건 죄인들이나 들어가는 곳 아니오. 어찌 황태자 전하를 그런 곳에.”
백원의 궁은 죄를 지은 황족을 유폐시키는, 이전 황후 레베카가 목숨을 버리기도 했던 곳.
“폐하의 상태는 어떻답니까? 꼭 쾌차하셔야 할 텐데.”
한 귀족이 초조한 안색으로 물었다.
무혐의를 입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황제가 승하하면 상황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소. 등불을 든 여인이 잠도 안 자고 붙어 치료에 열중이긴 합니다만…….”
“하아…….”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애써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이니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켜 주지 않겠소? 나는 그녀를 믿소.”
“그렇긴 하죠. 다른 누구도 아닌, 등불을 든 여인이니…….”
레이디 클로랜스.
제국 최고의 명의이자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킨 여인.
이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간절히 기원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그래서 황제 폐하도 쾌유시키고, 나아가 이번 심장마비의 원인까지 밝혀내 황태자의 무혐의를 밝혀내 주기를.
‘제발.’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귀족파에서 긴급회의를 요청한 것이다.
바로 황제의 음독 사건과 관련한 황태자의 처벌에 관한 회의를.
***
귀족파의 강력한 요구하에 긴급회의는 곧바로 소집되었다.
상석에 암셀 후작과 메르키트 백작이 자리했다. 그리고 3황자도 있었다.
3황자는 평소와 전혀 다른 딱딱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무슨 긴급회의입니까?”
재상인 엘 후작이 황제파를 대표해 발언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주제랄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의 음독과 관련해 논하고자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음독.
그 단어에 황제파 인원들이 웅성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요? 음독이라니! 근거도 없이 그런 모함을!”
암셀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음독이 아니란 말입니까? 음독이 아니라면 왜 황제 폐하께서 축배를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단 말입니까?”
“그거야 원래 앓던 지병으로!”
“원래 앓고 계시던 지병의 증상 중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토하는 증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소만? 그런데 하필 황태자가 마신 술을 마시고 그런 증상을 보였다라…… 이걸 음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 말에 황제파의 인원들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절대 음독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하필 술을 마시자마자 쓰러지셨으니!
“음독이 아니라 다른 원인 때문에 그랬다는 증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음독이라 판단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입니다만. 음독이 아니란 증거가 있습니까?”
그 말에 황제파의 귀족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현재 폐하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등불을 든 여인의 소견으로는 독으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은 떨어진다 하였습니다.”
암셀은 피식 비웃음 지었다.
“확실한 이야기입니까? 그녀가 폐하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낸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은 제국 최고의 의사입니다. 그런 그녀의 말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있겠습니까?”
“제국 최고의 의사이지만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편견이 들어간 소견을 말할 수밖에 없을 터. 객관성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명확한 진단을 밝혀낸다면 모를까 인정할 수 없습니다.”
황제파의 귀족들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엘 후작이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음독이 아니란 증거는 없지만 음독이란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상황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엘 후작은 가만히 암셀을 바라봤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폐하가 쓰러지신 일입니다. 그런 대사건을 단순히 정황만으로 판단하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후작의 말은?”
“……!”
“그게 차일드의 방식입니까?”
그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암셀이 엘 후작을 노려보았지만 엘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황태자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어느 쪽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황이 너무 공교로웠고, 귀족파의 수작인지 여론도 지극히 안 좋았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정말로 황태자는 황제 시해범으로 실각할 위기였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려선 안 된다.
“제국법에 의하면, 음독, 독살 같은 살인죄는 단순한 정황만으로 그 죄를 추정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암셀 후작, 당신의 주장은 제국법의 근본적인 원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황제파의 다른 귀족들도 기세를 몰아 주장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정황만으로 이런 큰 사건을 급하게 판단하려 하다니. 도대체 그게 어느 나라의 방법입니까? 황태자 전하께 죄를 물으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황제파와 귀족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이 정황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주장과 그것만으로는 죄를 확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맞섰다.
그런데…… 그렇게 회의장의 분위기가 과열될 때였다.
가정 상석에 앉아 있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그만.”
“……!”
“엘 후작.”
3황자가 자신을 부르자, 엘은 그를 바라봤다.
“네, 전하.”
“현재 이 제국에서 최종 사법권을 가진 이가 누구지?”
“황제 폐하입니다.”
제국은 황제가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아바마마가 의식을 잃은 지금은?”
“……!”
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황태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용의자로 몰려 있으니 자연스레 다음 계승자에게로 그 권한이 넘어간다.
따라서 3황자 미하일이 최종 사법권자였다.
황태자를 판결한 권한이 하필 적에게 있는 것이다.
“전하…… 이십니다.”
“그렇군. 잘 말했다. 그러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내가 이 사건을 판결하는 데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나?”
황제파 인물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의는 많았다. 하지만 황위 계승권자의 사법권 계승은 헌법에 명시된 일이다. 그러니 원칙적으로 맞았다.
“없는 것으로 알고 판결을 내리겠다.”
“……!”
미하일의 눈이 잠시 아픔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이미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 치지 않으면 죽는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도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먼저 그대들의 의견을 모두 다 잘 들었다. 양측 모두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하일의 말을 들으며 엘은 급히 생각했다.
‘안 돼! 3황자가 판결을 내리게 하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어!’
최소 이 자리에서 음독범으로 판결이 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제국법상 음독, 독살 사건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어 있어! 음독범으로 몰아도 무조건 불복해야 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하일의 판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미하일이 내린 판결은 다른 것이었다.
“음독 여부는 지금 이 자리에서 판결 내릴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대들의 주장처럼 어느 쪽도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
단호한 목소리에 황제파의 귀족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하일은 평소와 다른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의 축배를 마시고 부황이 쓰러진 것은 분명한 사실! 설사 의도된 음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잘못된 술을 진상해 지엄한 옥체를 손상한 죄에 대한 책임은 벗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 하지만…… 그건…… 꼭 축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축배를 마시고 쓰러지셨는데 축배 때문이 아니라? 그게 말이 되는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음독은 아니어도, 실제로 술과 황제의 쓰러짐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미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포했다.
“오늘은 일단 이것으로 마치지. 부황의 치료 과정 중 명확한 다른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형님은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3황자를 필두로 귀족파의 인원들이 우르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황제파의 귀족들은 황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아. 이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다른 원인임을 밝혀내지 않는 한, 저들의 음해를 막아낼 방법이 없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다른 원인임을 밝혀낼지.”
생각지도 못한 위기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황태자는 그대로 몰락할 수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결국…… 등불을 든 여인이 기적을 일으켜 주길 바랄 수밖에 없겠구려.”
그 말에 모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이제 남은 희망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가 폐하가 쓰러진 진정한 이유를 밝혀내면 황태자의 혐의는 단번에 벗길 수 있었다.
‘제발.’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가 있는 황실십자병원 쪽을 바라봤다.
***
엘리제는 황실십자병원에서 황제를 진료하고 있었다.
“혈압은 어떻죠?”
“수축기 85에 이완기 40입니다.”
“조금 나아지긴 하셨지만 아직도 낮군요.”
“네, 교수님. 수액을 충분히 투입하였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조처들을 다 하고 있는데, 쇼크 상태에서 좀처럼 회복되지가 않았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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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