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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67화 (167/194)

00167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4.

고민 끝에 미하일은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사실 그도 그녀의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더 이상 악화될 상황도 없었다. 파국을 피할 수 없다면 도박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귀족파 인물들의 반발은 미하일이 억눌렀다. 다행히 엘리제와 연관된 오늘의 일을 알고 있는 이들 자체가 소수였기에 가능했다.

다만 귀족파의 중핵인 메르키트 백작이 문제였는데, 이전 심장 총상을 입었을 때 그녀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적 있어서, 반대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당시 그는 엘리제에게 그녀의 부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들어준다고 약속한 적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하일과 헤어져 론도에 돌아오니 늦은 오후였다.

납치당한 시간이 점심경이었던 탓이다.

“어머, 아가씨? 이 시간에 웬일로 들어오셨어요?”

하녀 마리가 놀라 그녀에게 말했다.

저녁 10시 이전에는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 일이 있어서. 마리, 그보다 나 좀 도와줄래? 부탁할 게 있는데.”

엘리제의 말을 들은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 기별을 넣어달라고요? 오늘 저녁에 찾아뵈어도 될지?”

“응.”

“어째서……?”

마리가 알기로 엘리제는 이렇게 황태자에게 기별을 넣은 적이 없었다.

어의라 늘 황궁을 들락날락했고, 찾기 전에 황태자가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따로 드릴 말이 있어서. 그리고 드레스를 갈아입고 싶은데, 도와줄래?”

“아, 네. 어떤 스타일로 준비할까요? 최근에 론도에 유행하는 어깨가 파인 스타일로 할까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그런 드레스는 취향이 아니었고, 진중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싶었다.

“그냥 단정하게.”

마리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치장을 도와주었다.

단정하지만 곱게. 평소 치장을 꺼리는 엘리제였지만, 오늘만큼은 마리의 도움을 받았다.

최대한 깔끔한 스타일이었지만 원체 아름다운 그녀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빛이 났다.

치장이 끝난 후 곧 황궁에서 답변이 왔다.

당연히 승낙이었다.

마리가 황궁에 다녀온 이의 말을 전했다.

“‘그대의 방문이면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당장 오라고’ 하셨다는데요?”

엘리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나의 린덴. 오늘 대화가 끝난 후에도 웃으며 그를 마주할 수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러면 다녀올게.”

***

마차를 타고 엘리제는 사자궁에 도착했다.

어의로서, 그의 연인으로서 수시로 들락거렸던 사자궁이지만 오늘따라 가슴이 떨렸다.

‘제발. 주여.’

짧게 기도 후, 방문 사실을 알렸다.

시종인 란돌이 먼저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란돌은 그녀를 보고 살짝 눈을 떴다.

간단하게 입고 다니던 평소와 다르게 곱게 단장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눈이 부시달까? 단정한 검은 드레스가 인형 같은 하얀 얼굴을 아름답게 빛냈다.

“란돌 경?”

“아, 죄송합니다.”

멍하기 그녀를 보다 화들짝 놀란 란돌은 고개를 젓고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 린덴은 집무실에서 급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엘리제가 온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봤는데?’

그가 황실십자병원에 방문해 그녀와 같이 정원을 산책한 게 오전쯤이었다.

물론 그녀가 오는 것은 좋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보고 싶어 했으니까.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머리가 답답한 이 순간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다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이런 식의 방문을 거의 안 하는 그녀였으니까. 더구나 가문의 사람을 보내 정식 방문 요청까지 하다니?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 건가?’

똑똑.

“전하, 란돌입니다. 엘리제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그 노크 소리에 린덴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들어와라.”

“네, 전하.”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린덴은 눈을 크게 떴다.

“……리제?”

“전하.”

평소와 다르게 곱게 단장한 모습에 놀란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도 아름다워 보이니, 사랑하는 그의 눈에는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다 엘리제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린덴은 헛기침을 하였다.

“그래,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 차려입고, 정식으로 방문 요청까지 하면서 말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그의 앞에 앉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떨렸다.

그의 반응이 무서웠다.

“……?”

린덴은 그녀가 침묵하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반응을 보니 정말 그냥 온 것은 아닌가 보다.

그는 함께 산책할 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가지 잘못을 해도 전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안 좋은 일은 아니겠지?’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야 없겠지만 원체 종잡을 수 없는 그녀다. 2년 전에는 부황과 내기를 해, 전쟁에 참전한 적도 있으니까. 안심되지 않았다.

“말해봐라.”

엘리제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전하, 먼저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요?”

“무엇이지?”

“……제가 전하께 차를 한 잔 달여 드려도 될까요?”

린덴은 차보다는 그녀의 용무를 먼저 듣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해 주겠지.’

곧 방 안에 고요히 차를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차향이 퍼졌다. 린덴이 가장 좋아하는 향이다.

린덴은 엘리제가 내온 차를 마셨다.

역시 부황 민체스터가 극찬한 맛답게 란돌 따위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

둘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덴은 엘리제가 입을 열길 기다렸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다만.

‘도대체 뭐지?’

지그시 깨물고 있는 입술, 치마 위로 희미하게 움켜쥐고 있는 주먹.

린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알 수가 없었다.

“차 맛이 좋군.”

린덴은 그녀가 자신 앞에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마음에 안 들었으나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먼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제 결혼하면 그대가 달여 주는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는 건가?”

“……네, 전하.”

“그 말 정말이지? 꼭 매일 달여 주어야 한다고. 알았지?”

그 말에 엘리제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리제.”

“네.”

“내 옆으로 와보겠나?

“……네.”

엘리제는 주저하다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녀가 오자 린덴은 부드럽게 어깨를 안아주었다.

“……!”

“잠시 이러고 있지.”

그 따듯한 말에 엘리제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사랑한다.

그가 자신에게 화내는 것이 무서웠다. 혹시나 실망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했다.

“……린덴.”

“그래.”

“……사랑해요.”

린덴은 그녀를 바라봤다. 사랑한다는 목소리에 옅은 떨림이 담겨 있었다.

“……리제?”

“사랑해요. 정말로. 정말 많이 사랑해요.”

그러며 엘리제는 그의 품 안에 안겨들었다.

린덴은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였지만 그래도 부드럽게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말해보아라. 다 괜찮다. 무슨 일이지? 누가 속상하게 하기라도 했느냐? 다 혼내줄까?”

그녀는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다 잊고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고 만 싶었다. 이 따뜻함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 돼.’

그가 자신에게 분노하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그를 사랑하니까. 나중에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때, 린덴이 말했다.

“넌 내 거다. 그러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 괜찮다. 편하게 말해.”

엘리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전하, 사실…… 오늘 제가 온 것은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알고 있다. 편히 말해봐라.”

엘리제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봤다.

이제 자신이 입을 열면 저 사랑이 담긴 눈동자가 차갑게 변하겠지?

이건 그의 역린이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무리 상대가 자신이라도 분노하리라.

그가 자신에게 차갑게 변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아프고 무서운 일이었지만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녀는 말했다.

“혹시…… 그들을 살려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그리고.

그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따뜻하던 그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입가에 걸려있던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황태자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가 물었다.

“지금 잘못 이야기한 거겠지, 리제? 아니면 내가 잘못 들었거나.”

나직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목소리.

엘리제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잘못 말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그녀는 일부러 그들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마리엔 황비와 암셀 후작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 그를 더욱더 자극할 것 같아서.

“…….”

엘리제의 걱정과 다르게 그는 불처럼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더 가슴이 떨렸다.

“하아.”

그는 탄식을 터뜨렸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가 자신을 마주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엘리제. 너는 혹시…… 과거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하긴 그때 너는 굉장히 어렸을 때이니까.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겠지?”

“…….”

“그 일은 차마 입으로 꺼내기도 싫은 추악한 것이었다. 난 그때 일을 일으킨 추악한 자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으니 이해하마. 하지만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한다.”

“……전하.”

그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오늘은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군. 조심히 돌아가도록.”

대화의 단절을 뜻하는 몸짓이었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자신의 부탁이 주제넘은 것임을.

더 이야기하면 그는 정말로 분노할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도 자신이기에 이 정도로 참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 알고 있어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

린덴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다고? 그런데 이런 부탁을?”

그리고 그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대를 사랑한다. 깊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을 만큼.”

“……전하.”

“하지만 이 부탁만큼은 들어줄 수 없어.”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난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아. 아니, 할 수 없어. 너라면 할 수 있겠는가?”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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