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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68화 (168/194)

00168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5.

그러며 그는 말을 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일까. 그의 목소리가 점차 올라갔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누이가 죽어갔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이 핏물로 변했어. 너라면 그런 끔찍한 일을 일으킨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야. 성서에 나오는 용서? 하!”

린덴은 화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미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내 아픔을 알고 있다고? 지금도 어머니와 누이가 밤마다 내 꿈에 나타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잠이 드는지 그대는 알고 있나? 밤마다 죽은 그들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느냐고.”

“린덴…….”

“그들도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내 꿈에 나타날까.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멈출 수는 없어.”

그러며 그는 다시 등을 돌렸다.

“……그대에게 화내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 오늘은 그대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하지만 엘리제는 떠나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린덴…….’

가슴이 아팠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더욱 아팠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어린 소년은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 원한을 품고 살아온 세월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이 복수가 과연 그의 어머니가 원하는 것일까?’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모르겠다. 죄 없이 죽었으니, 복수를 바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저렇게 괴로움에 묻혀 사는 것을 과연 바랐을까?

“린덴…… 한 가지만 물을게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히 물었다.

“만약 혹시나 전 황후마마와 황녀 전하의 한을 다른 식으로 풀 수 있다면…… 그래도 그들을 살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

린덴은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 말고 다른 방법? 불가능한 일이야.”

그는 피식 웃었다.

“혹시나 모르지. 암셀 후작과 마리엔 황비가 어머니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러면 그들의 한도 풀릴지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그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 숨을 들이켰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군. 정말 이제 그만 돌아가.”

“……린덴.”

“부탁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난 그대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만 가줘.”

더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주제넘은 말로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엘리제는 그의 궁에서 물러났다.

그녀가 사라진 후,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선반에 놓여 있는 위스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잔에 가득 채운 후 한 번에 들이켰다.

“하아.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와 누이를 위로한다고?”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사자궁 밖으로 나온 그녀는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마음이 안 좋아서일까, 추위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그의 반응은 완강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을 갈아온 원한이다. 그녀의 말 몇 마디로 풀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하아.”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은 주제넘은 일이다. 그녀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혈탑의 비극에 맺힌 한은 당사자들이 해결하는 것이 옳았다.

용서하든 목숨으로 혈채를 갚든 그건 모두 당사자의 권리였다.

그러니 이대로 그의 의견을 존중해 물러서야 할까? 그래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 나중에 그가 후회에 괴로워하는 것을 봐야 하는 걸까?

‘아니야. 그건 아니야.’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단순히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분노한다.

자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말 그의 역린을 깊숙이 찌르게 될 것이고 그때는 단순히 분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성공할 확률도 높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의미 없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기’를 만드는 것뿐이니까.

‘그 이상은 당사자들끼리의 문제야.’

그래, 그녀가 하려고 하는 것은 한줄기 계기를 만드는 것.

그 계기가 어떤 씨앗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오로지 당사자들만이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그래도 하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죽은 황후와 황녀의 한을 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늘 악몽에 나타나는 그들이 미소로 그를 바라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줄기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전하. 린덴.”

엘리제는 그가 있는 사자궁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저…… 주제넘은 일을 하려고 해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로. 당신이 나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나 이제 당신 없으면 살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해요.”

그래, 그를 사랑한다.

그러니 한줄기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마지막 노력을 하고 싶다. 설사 그 일로 미움받게 될지라도 말이다.

엘리제는 그길로 왕진 가방을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로즈데일병원. 병석에 누워 있는 암셀 후작을 향해서.

‘계기’를 위해서는 그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엘리제.”

병실에서 유리엔이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귀족파의 인원이 병실에 모여 있었다.

“……언니?”

“아버지가 의식을 잃으셨어. 곧 임종하실 거래.”

“……!”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

‘임종한다고? 곧?’

너무 늦게 온 걸까? 이대로 암셀 후작이 죽으면 그녀가 하려던 일은 시도도 못해 보고 끝날 것이다.

엘리제는 침대에 다가가 암셀 후작을 살폈다.

창백한 안색, 펄펄 끓어오르는 고열, 미약한 맥박.

그녀는 단번에 그의 상태를 알아챘다.

‘패혈성 쇼크!’

패혈성 쇼크(Septic shock)!

몸을 감염시킨 균이 전신을 떠돌며 온 장기를 망가뜨리며 쇼크를 일으키는 상태다.

현대 지구에서도 가장 흔한 사망 원인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심각한 상태.

‘괴사성 췌장염이라고 했지? 췌장을 썩게 한 균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구나.’

괴사성 췌장염은 굉장히 무서운 질환이다. 적절히 치료받지 못하면 대부분 사망한다.

‘이런 상태면 수술을 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 수술도 굉장히 위험하다.

그건 원래 암셀이 앓고 있던 지병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폐에 지병이 있었다. 그리고 만성적으로 췌장 기능이 안 좋았다. 단순히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췌장의 기능이 거의 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췌장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고난이도의 수술이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안 쓰고 놔두면 무조건 사망할 거야.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때, 귀족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곧 임박한 암셀 후작의 죽음을 맞아 귀족들의 얼굴은 지극히 어두웠다.

“……엘리제 백작님.”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암셀 후작님의 임종을 보러온 것입니까?”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임종을 보러온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암셀을 치료하러 왔었다.

그를 치료해 내고 용무를 이야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상태가 악화하여 있다니.

“하아. 후작님.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필 이런 상황에서.”

옆에 있던 메르키트가 길게 탄식했다.

비록 황태자의 화폐 개혁으로 날개가 꺾였다지만 차일드 가문은 여전히 대륙 최고의 금융 재벌이었고, 귀족파의 구심점이었다.

그가 사망하면 귀족파는 실질적 수장을 잃게 된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통째로 흔들릴 것이다.

어차피 곧 일으킬 정변에 모든 것이 달렸지만 이래서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메르키트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하아.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메르키트의 머리에 떠올랐다.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여긴 이를 수 없이 치료한 사람이. 그것도 지금 바로 자신의 옆에.

그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고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엘리제 백작.”

“네, 백작님.”

“혹시…… 백작께서 후작님을 살려주실 수는 없으시오?”

그 말에 방 안에 모든 이가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묻고 싶었던 물음이다.

물론 다들 알고 있다. 지금 암셀의 상태는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 아닌가? 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명의.

다른 의사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에 닿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

“…….”

엘리제는 말없이 암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대답 대신 유리엔에게 말했다.

“레이디 유리엔.”

평소의 편한 호칭이 아닌 경칭에 유리엔도 존칭으로 답했다.

“……네, 백작님.”

“제가 잠시 후작님의 몸을 살펴도 될까요?”

유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활력 징후를 확인하고 청진기로 폐의 소리를 확인했다. 배의 사방면을 만져보는 등, 후작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즈데일병원의 수석교수 카일 준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암셀의 주치의로 치료를 전담하고 있었다.

“원래 췌장에 만성적 염증이 있었는데, 이번에 괴사가 오면서 썩어들어갔습니다.”

“괴사 부위는 어딘가요? 췌장 머리 쪽인가요?”

카일 준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리 쪽으로 보입니다. 부위가 췌장 몸체나, 꼬리 쪽이면 어떻게든 접근해 수술로 썩은 부위를 잘라내겠는데, 머리 쪽은 워낙 인접해 있는 장기가 많아 손을 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상태가 좋진 않았다. 하지만.

“……아니, 가능해요.”

“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아니, 워낙 상태가 안 좋아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치료할 가능성이 있어요.”

“……!”

그녀는 다시 말했다.

“물론 실패 확률이 높아요. 지병인 폐병도 있고, 기존 췌장에 만성적인 염증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치료를 시도해 볼 수는 있어요.”

주치의인 카일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 물론 백작님의 수술 실력이 하늘에 닿아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췌장 머리 쪽에는 무수히 많은 장기가 있습니다. 그 장기들을 피해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카일의 말은 정확했다.

췌장의 몸체나 꼬리 쪽은 앞을 가로막은 위와 장만 치우면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하지만, 머리 쪽은 아니었다.

“췌장 머리 앞에는 위, 십이지장, 담관, 담낭이 있습니다. 이 장기들을 어떻게?”

“다 잘라내면 돼요.”

“네?”

카일은 멍하니 반문했다. 다 잘라낸다고?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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