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7 종장 =========================================================================
종막 : Forever
종장
시간이 흘렀다.
그 후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황태자 린덴의 대관식.
그는 대성당에서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황관을 썼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12대 황제, 공제(空帝)의 즉위였다.
이후 제국은 그의 통치 아래 공전의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미래에 프러시엔에서 발족한 게르마니아 제국에서 시작한 세계대전을 통해 역사의 축이 신대륙, 신 연방에게 넘어갈 때까지 지속할 팍스 브리티아나의 시작이었다.
엘리제의 지난 삶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극히 평화로운 대관식이었단 것이다.
과거엔 3황자, 마리엔 황비는 물론 귀족파의 인원을 모조리 단두대에 보내고 나서 황위에 올랐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박수 쳤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우선 귀족파의 인원들, 그들이 모두 살아 무릎 꿇고 있었다. 자신들을 용서한 새로운 황제에게 감읍하며 진정으로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그들은 엘리제에게도 감사의 시선을 보냈다.
다들 알고 있었다. 이 화합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뒤에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실제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목은 모조리 단두대에 잘려 나갔을 것이다.
한 가지 더 감격스러운 일은 바로 선황인 뇌제 민체스터가 직접 린덴의 머리에 황관을 씌워주었던 것이다.
“축하한다, 린덴”
민체스터는 황관을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의 헌신적인 치료 덕분일까?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그는 드디어 의식을 차렸다. 몸은 형편없이 쇠약해졌지만, 그래도 가끔 그녀와 장미 정원에서 차 한잔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하였다.
금색 관이 린덴의 머리에 올라가자 대주교가 선포했다.
“이로써 린덴 드 로마노프가 브리티아 제국의 12대 황제가 되었음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황태자 린덴은 황제가 되었다.
***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3황자 미하일의 추방이었다.
대관식이 있기 전, 늦은 밤, 섬 동쪽의 작은 항구. 조막만 한 작은 배가 놓여 있었다. 그와 마리엔 황비가 탈 배였다. 마중하는 인파는 없었다.
한때 황태자와 더불어 정국을 양분하던 3황자였지만, 쓸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3황자는 만족했다.
그는 태어나서, 아니, 혈탑의 비극 이후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어깨에 놓인 짐이 없어졌다. 그리고 형제에게 칼을 겨누지 않아도 된다.
청의 친우 운학이 준 검, 비천검(飛天劍)이란 이름처럼 하늘을 나는 새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을 쓸쓸하지 않게 하는 한 명의 존재.
“리제.”
그가 사랑하는 작은 소녀가 그를 위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멀리까지 왜 왔어? 힘들게.”
“밀.”
엘리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 앞으로는 영원히 그를 볼 수 없으리라. 밝게 웃던 그의 미소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미하일은 그녀를 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이전과는 다른 편안한 웃음이었다.
“어디로 갈 거예요?”
“글쎄. 일단 로우랜드에 내려, 서대륙을 돌려고. 프랑소엔은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정권이 뒤집어지고 있어 분위기가 흉흉해 어머니와 가기에는 조금 그렇고, 오스트리엔이나 갈까 싶어.”
미하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짤츠감머구트랑 알프스의 풍광이 예쁘던데. 그 예쁜 풍광들을 보다 보면 어머니의 증상도 좀 좋아지시지 않을까? 짤부르크에서는 음악도 듣고, 수도 비엔에서는 공연도 보고 하지, 뭐.”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다행히 밝아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조금 좋아지시면 비단길을 따라 청도 다시 한 번 가보려고. 친구들은 다 잘 있는지 모르겠네. 결혼은 했으려나?”
“그렇군요. 밀.”
“응?”
엘리제가 그에게 말했다.
“꼭 건강하세요.”
그 말에 미하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도 이제 그녀를 보는 것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이전 크림반도에서 알버트를 수술할 때 했던 약속처럼, 그녀와 같이 훨훨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도 안 될뿐더러, 그녀의 마음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리제.”
“네?”
“나…… 사실…… 할 말이 있어.”
“무엇인데요? 말해보세요.”
“…….”
하지만 미하일은 입을 다물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도 그는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말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이번에는 듣고 싶었다.
“괜찮으니 편히 말해보세요.”
“…….”
하지만 미하일은 좀처럼 꺼내지 못했다.
사랑해.
그가 하려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어차피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마지막이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떠나는 마당에 괜히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자. 이런저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슨 말이든 괜찮아요. 듣고 싶어요. 말해주세요.”
그 말에 결국 미하일이 입을 열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출발 시각은 언제지?”
“……!”
둘 다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의 금색 눈. 조각 같은 외모.
린덴이었다!
미하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형님이 이곳에? 설마 날 마중하러?
동생의 놀란 시선에 린덴은 헛기침하였다.
“특별히 널 마중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냥……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이다.”
“…….”
볼일? 이 깡촌 항구에? 저 지고한 분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마중 온 것 아니다.”
“……아, 네.”
미하일은 쿡쿡 웃음을 지었다. 솔직하지 않은 면이 참 형님다웠다.
‘그래도 단 둘뿐이지만, 제국에서 가장 지고한 두 명이 마중 왔으니, 나름 나쁘지 않은 마지막이군.’
미하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신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이도 아닌, 그녀와 형님, 이 두 사람이 마중 왔다는 것이 기뻤다.
그때, 린덴이 무뚝뚝하게 손을 내밀었다.
“……!”
미하일은 놀라 그 손을 봤다. 악수 신청이었다.
“왜? 안 잡나?”
“……아니.”
미하일은 마주 그 손을 잡았다. 이렇게 형님과 악수를 하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차갑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이 손바닥에 닿았다.
“미하일.”
“응, 형님.”
“잘 지내라.”
“……!”
미하일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도.”
그렇게 두 형제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미하일은 마리엔 황비가 미리 타 있는 작은 배에 올랐다.
그리고 브리티아 섬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고 등을 돌리는 찰나.
린덴이 말했다.
“미하일.”
“응?”
“시간이 지나면 로마노프령으로 와라.”
“……?”
미하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린덴이 지나가듯 말했다.
“간단히 술이나 먹자.”
그 말에 미하일은 미소 지었다.
“그래, 기다릴게.”
그렇게 미하일을 태운 배가 멀어졌다.
엘리제는 그 배가 완전히 멀어져, 눈에서 안 보일 때까지 모습을 지켜보았다.
***
린덴이 황제에 오른 후,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의회 체계.
황제파와 귀족파가 주축이 된 양당 체계로 변하였다.
황제파와 귀족파는 서로 대표하는 입장은 다르지만, 하나의 주군을 섬기는 이로써 건전한 대립을 이어갔다.
엘리제의 이전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는 제국에 굉장히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한 측으로만 정책이 편향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린덴은 절대 황권을 쥐었지만, 의회의 권한을 상당히 인정해 주었다.
국제 정세에 밝은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궁극적으로 브리티아는 입헌군주국의 시대로 가야 할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엘리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입헌군주국이요?”
“그래, 날이 갈수록 시민들의 힘은 커지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이런 신분제가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당장 신대륙의 신 연방과 프랑소엔만 해도 그렇지 않으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 지구의 삶을 살다 온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의 예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조금씩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말한 것은 바로,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Kings reign but do not govern)였다.
그렇게 브리티아는 새로운 황제의 통치하에 조금씩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갔다.
브리티아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다는 공제의 시대, 황금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엘리제는 그 황금시대의 새로운 축을 맡게 된 유리엔을 만났다.
유리엔 드 차일드. 이제는 암셀을 대신해 차일드 후작이 된 그녀는 의회의 양당을 구성하는 귀족파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 이름을 바꾸신다고요?”
“응, 아무래도 기존 귀족파란 이름을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귀족파란 이름 자체가 조금 웃기잖아.”
엘리제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유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한 그녀는 이전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보이며 귀족파를 이끌었고,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전 후작의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막대한 재산도 기부했지.’
엘리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일드 가문은 재산과 작위를 유지했다.
암셀이 죽음으로 죄를 갚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브리티아 황실이라도 그들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작위는 브리티아에서만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계파는 온 서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브리티아의 후작이자, 전 프랑소엔 제국의 백작, 프러시엔의 백작, 스페냐의 자작 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파가 아니면 당 이름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등불당.”
“……네?”
엘리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촌스러운 것 같은? 아니, 그것보다 어째 당 이름이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느낌인데……?
“이 브리티아 제국의 앞날을 밝게 비추는 당이 되자는 뜻의 이름이야.”
“아…… 네.”
유리엔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 네 별명에서 따왔다는 것도 맞아. 사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란 의미도 있지만 다들 너에게 감사하는 의미의 이름을 짓고 싶어 했어.”
“…….”
“엘리제, 너는 우리들의 은인이니까.”
그렇게 등불당이 발족하였다.
훗날 황제파의 후신인 시민당과 더불어 브리티아 정계를 양분하는 당파였다.
***
이런저런 일과 더불어 이런 일도 있었다.
“크음. 너희 둘, 오늘 이 아비와 이야기 좀 하자.”
“……?”
엘 후작의 말에 두 아들, 렌과 크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왠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최근 정계에 안 좋은 일은 없었는데? 해외에서 갑자기 돌발 변수라도 생겼나?
그런 의문으로 크리스는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신지?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안 좋은 일? 안 좋은 일이야 있지! 바로 너희 때문에!”
“……네?”
============================ 작품 후기 ============================
드디어 종장이군요. 지금까지 함께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본편은 181화로 완결납니다. 외전은 5월 중 시작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