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종장 =========================================================================
종장
“일단 앉아라!”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새어머니와 엘리제도 아버지 옆에 앉았다.
두 아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 앞에 앉았다.
스스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신들은 새 황제의 측근으로 차기 정부의 실세가 될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안 좋은 일이라니?
엘 후작은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희!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할 거냐!”
“……!”
렌과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결혼!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일이다.
엘 후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아! 도대체 너희 나이가 몇인데 무슨 생각들이냐! 내가 너희 나이 때에는 한 번에 만나는 애인의 수가……! 크흡! 크흠!”
그는 리즈 시절의 여성편력을 꺼내려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새어머니가 꼬집은 것이다. 멍들 정도로 강하게.
하여튼 애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란 표정으로 잠시 남편을 흘겨본 그녀는 아들들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너희도 결혼할 시기가 되었는데, 어디 만나는 레이디는 있니?”
“…….”
없다.
렌은 론도의 모든 시민이 인정하는 천연기념물, 벽창호였고, 크리스는…… 엘리제처럼 일중독에 동생 바보였다.
엘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아, 이제 곧 막내인 엘리제는 결혼하는데, 너희는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엘은 생각만 하면 화가 났다.
품에만 두고 싶은 딸은 곧 결혼해 떠날 거고, 내보내고 싶은 이 시커먼 놈들은 결혼은커녕, 여자를 만날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아무나 괜찮다! 평민이어도 좋으니! 아무나 데려와!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1년 안에 만나는 여자가 안 생기면, 그때는 구제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내가 강제로 짝을 정해주겠다!”
식겁할 이야기.
그런데 크리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정말로 아무나 괜찮습니까?”
“……응?”
“정말 아무나 괜찮습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신 거죠?”
“그, 그래. 너…… 혹시……?”
엘과 새어머니,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크리스에게 레이디가?
크리스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아직입니다만. 그래도 마음에 두고 있는 레이디는 있습니다.”
“누구냐! 내가 당장 밀어주마! 혹시 레이디를 꼬실 노하우를 모르는 거면, 내가 오늘 밤! 데이트부터 첫날밤까지의 노하우를……! 크흡!”
엘은 다시 허리를 꼬집혀 신음 흘렸다.
크리스는 고개만 저을 뿐, 누구인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워낙 콧대 높은 고양이라서 쉽지가 않군요.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만 말했다.
이제는 벽창호 렌의 차례.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은 그에게선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왕년의 잘나가던 바람둥이였던 엘의 기준으로선 저놈은 구제 불능이었다. 저놈은 중매만이 답이었다!
“너는 여자 없지? 내가 아무나…….”
그런데 렌이 정말 의외의 말을 하였다.
“아버지.”
“응?”
“그 노하우, 저한테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엘 후작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
렌은 평소와 똑같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마음에 두고 있는 레이디가 있는데, 접근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입을 벌렸다.
저 목석 렌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은 돌발 선언이었다.
물론 그도 그 레이디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묵묵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과연 그가 론도 최고의 천연기념물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
한편, 엘리제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그레이엄.
그는 황실십자병원의 교수실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괴롭구나.’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다. 아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각고의 노력 덕에 그는 황실십자병원의 최고의 의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린덴의 즉위 후, 본격적으로 내명부의 일을 챙기느라 병원 일에서 손을 많이 뗀, 엘리제의 업무를 대신하는 것도 바로 그.
물론 아직 많은 면이 부족하지만, 그레이엄은 그래도 엘리제의 실력을 가장 많이 전수받은 의사로 여겨지고 있었다.
전임 어의인 엘리제 이후, 새로운 어의가 된 피터 교수가 몇 년 뒤 은퇴하면 차기 어의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의사로서 최고로 전도유망한 미래만 남았다고 보면 되는 상태.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그렇듯 행복하지 않았다.
바로 엘리제 때문이었다.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이 늘 아팠다.
앞으로 어의가 되면 어떻게 하지? 자신이 황궁 어의가 되면 자신이 그녀의 진료를 전담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아픈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가슴이 답답했다.
‘하아. 도대체 난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엄 교수님, 손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할까요?”
“아.”
그레이엄은 까먹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손님이 오기로 했었다.
그는 방 밖에 물었다.
“오늘 오기로 한 새로운 도제인가요?”
“네.”
원래 황실십자병원은 도제를 거의 받지 않지만, 최고의 자질을 가진 이들에 한하여 도제를 받았다. 지금 새로 온 도제도 그레이엄이 익히 알고 있던 이다.
그는 과거 테레사병원에서 엘리제를 처음 도제로 봤을 때를 떠올랐다. 그녀와 자신의 만남도 이렇듯 스승과 도제로 시작했었다.
그때, 자신은 그녀를 부랑자 병실로 쫓아냈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교수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라 하세요.”
다른 생각은 그만. 지금은 새로 온 도제를 맞을 차례다.
‘이번에 오는 도제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아니, 단순히 모르는 사이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도제는 익히 잘 아는 사이였다.
끼익.
문이 열리자, 그레이엄은 반갑게 새로운 도제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제이. 잘 지냈습니까?”
레이디 제이.
바로 크림반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어린 도제였다.
그녀는 실력을 인정받아 이곳 십자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네, 교수님.”
그리고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타난 순간.
그레이엄은 흠칫 놀랐다.
예뻤다.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탓일까? 레이디 제이는 얼굴에 흐르던 어린 티가 없어지고, 어엿하게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특히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갈색 머릿결이 싱그러웠고, 푸른 눈이 기분 좋게 빛나고 있었다.
“교수님도 잘 지내셨나요?”
“……아, 네.”
그레이엄은 멍하니 있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그 인사에 제이는 활짝 웃었다.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미소였다.
“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교수님.”
그리고 왜일까? 그레이엄은 그 밝은 미소를 보고,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그레이엄은 새로운 도제를 맞았다.
***
이런저런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것과는 별개로 엘리제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린덴이 즉위 후, 아직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지만 안주인이 없는 황궁 내명부의 일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대신 황실십자병원의 일은 많이 줄였다. 황후가 될 텐데 지금처럼 병원의 일에 주로 매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민체스터가 의식을 회복한 후에는 어의직도 사퇴하였다.
하지만 어의직을 그만두고 병원 일을 줄였음에도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들 때문이었다.
일단 천연두 예방 접종 프로젝트!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이 시기 대규모 천연두가 유행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던 남부 지방에 먼저 예방 접종을 시행했다.
덕분에 실제로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 피해는 정말로 경미했다. 마치 천연두가 아니라 감기가 유행했나 싶을 정도로 가벼운 피해였다.
덕분에 그녀에 대한 찬사가 다시 한 번 쏟아졌다.
그렇게 엘리제는 일단 남부 지방의 피해를 막은 후, 브리티아 전역으로 예방 접종을 확대해 나갔다.
브리티아뿐이 아니었다.
‘천연두는 지구에서도 19세기에만 수억 명의 사망자를 낸 질환이야. 예방법을 온 세계에 전파시켜야 해.’
황실의 협조를 통해 프러시엔도, 스페냐 왕국도, 오스트리엔도, 적국인 프랑소엔도. 가능한 모든 곳에 예방 접종을 전파했다.
천연두로 피해를 겪던 그들 나라가 그녀에게 큰 경의를 표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예방 접종의 창시자.
천연두 퇴치자.
이번 일로 그녀가 얻게 된 별칭이었다.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중요 프로젝트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식 의과대학의 설립.
기존의 주먹구구식의 도제 양성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커리큘럼을 갖춘 세계 최초의 의과대학이 설립됐다.
클로랜스 가문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세운지라, 클로랜스 의과대학이라 이름 붙였다.
훗날 세계 3대 의과대학이라 불리게 될 곳으로, 그녀는 그 의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직을 역임했다.
의과대학의 커리큘럼 자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다른 이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머릿속의 지식을 이 시대의 과학 수준에 맞추어 풀어내 의학서를 새로 집필하였다.
훗날 의학의 바이블이라 불리게 될 저서로 그녀를 ‘현대 의학의 어머니’라 불리도록 만들었다.
그 와중에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제 황후가 되면, 지금보다도 더욱 의사 일을 할 시간이 제한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내용을 전파해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 네 개라도 모자랄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중 중요한 일도 했다.
바로 새어머니의 병을 치료한 것이다.
“리제…….”
수술대에 누운 새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는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예요.”
이전 삶, 새어머니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녀가 앓았던 병은 다름 아닌 유방암. 이번에 엘리제는 시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초기에 발병을 잡아냈다.
원체 초기라 간단한 수술만 하면 완치될 것이다.
딸의 따뜻한 말에 새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네가 어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크다니.”
“어머니.”
이전 못되던 아이가 어찌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는지. 아니, 단순히 훌륭하게 자랐다는 말로 표현할 게 아니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까지 엘리제의 업적들을 수식하기 어려웠다. 거룩할 정도로 대단했다.
“편히 한숨 자세요. 금방 끝날 테니.”
“……그래.”
새어머니는 딸을 믿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마취가 끝나자, 엘리제는 외과의사로 돌아와 수술칼을 들었다.
“오픈(Open)합니다.”
***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린덴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대망의 결혼식이 눈앞에 다가왔다.
엘리제는 그 결혼식을 앞두고도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니, 결혼식 전이라 더 바빴다.
그런데 이제 결혼식 준비 및 대부분의 일이 마무리되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엘리제가 납치당한 것이다.
바로 백마 탄 왕자님, 아니, 이제 황제님, 린덴에게 의해.
1박 2일의 짧은, 하지만 행복한.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납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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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