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이렇게 된 이상 매국노 메타로 간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샨기오르 부족의 수도, 오르도스로 향하며 끝없이 생각했다.
우선, 막무가내로 도망치는 건 최악의 선택이다.
여정 도중 전사들이나 시종들의 잡담을 주워들으며 간간이 이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은 내게 하사된 친위부대 같은 것으로, 백호장 둘과 십호장 스물, 전사 이백으로 구성된 기마대이다.
제 4 친위기병대라 했던가.
전력의 핵심은 스물 두 명의 호장들이고, 일반 전사들은 단순한 보충병이라 한다.
감히 나한테 칼을 겨누었던 놈들 역시 새로 보충된 신병들이었다.
내게 말을 걸었었던 음울한 인상의 사내 역시 백호장이었다.
메르신. 자한과 달리 원작에선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유목 민족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밖으로 나도는 것은 전사대들 뿐이라 한다.
전사가 아닌 이들은 보통 농사를 짓거나 하며 평생 거주지에서 살아간다고.
겁쟁이를 경멸하고 전사를 우대하며, 약탈로 얻은 재화와 노예들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부족을 떠난 도망자들은 반드시 쫓아가 잡아 죽이는 습성을 가졌다.
그 외에도 내가 속한 아이샨 부족이 카`하르의 부족들 사이에서도 꽤 강한 세력을 자랑한다는 점.
부족장 아이샨기오르 오르한이 민족 통일을 꿈꾸며, 자신을 정복자 왕-세르 칸이라 일컫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다른 부족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어디까지나 자칭에 불과했지만.
전사들이 오르한의 딸인 날 부를 때, 왕녀가 아닌 공녀라 칭하는 이유도 그래서였고.
하샬르는 오르한의 네 번째 자식으로, 내 위로 오빠가 셋,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한다.
오빠가 셋 씩이나 있는데 어째서 미래엔 하샬르가 여왕이 되는 걸까. 다 죽기라도 하나?
아무튼 중요한 건 이대로 도망친다면 공녀고 뭐고 잡아 죽여야 할 도망자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르한의 허락을 받고, 당당하게 떠나야 한다. 이놈들과는 같이 못 산다.
...그렇다면 어디로, 어떻게 떠나지?
생각해보자. 어차피 떠날 것이라면, 아예 동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야만스러운 땅에서 혼자 떠돌아다녔다간 결국 언젠가 마적떼들에게 붙잡혀 노예가 될 것이다.
기왕 이놈들에게서 벗어나기로 했으면, 최소한 치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서부로 가고 싶다.
문제는 내가 이놈들이랑 같이 약탈한 게 아무리 봐도 서부인들이라는 건데.
이러니까 동부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수인과 마찬가지로 반 몬스터 취급을 받지.
결국 그 방법밖에 없나.
이렇게 된 이상 서부 제국의 아카데미에 입대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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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샨 부족의 수도, 오르도스는 아이샨기오르 오르한이 이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도시였다.
오래전,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바룬 강에 도착한 오르한은 이곳을 부족의 본거지로 삼았다.
풍부한 수원과 비옥한 농경지, 드넓은 목초지까지.
도시가 성장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땅이었기에.
초창기의 오르도스는 단순히 울타리 친 천막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무 해에 달하는 세월은 어설픈 천막촌을 거대한 도시로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여기가, 바로 그 오르도스인가.
나는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나무 성벽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야만족들의 도시라길래 대충 천막들이 몇천개 쯤 모인 광경을 예상했는데.
이건 이미 중세 시대의 성채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무 성벽 여기저기에 자리한 망루마다 갑옷을 걸친 전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일행들 중 가장 앞에 위치했던 남자가 부대 깃발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 갔다.
"검은 늑대의 문양...! 하샬르 공녀님의 친위기병대인가!"
"당장 문을 열어라!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공녀님께서 귀환하셨다!"
화들짝 놀란 경계병들이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전사다운 기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아니 원래 하샬르는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깃발만 봐도 기겁하는 거지.
십 초도 지나지 않아 목책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정문 너머로 수많은 경계병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좀 멋지긴 한데.
이윽고 내가 앞장서야 한다는 듯, 선두의 부대원들이 좌우로 간격을 벌렸다.
하긴, 언제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는 바깥과 달리, 이건 일종의 개선 행렬이나 다름없으니.
이들의 지휘관인 내가 선두에서 행진해야 하는 거겠지.
가볍게 말을 이끌어 일행의 맨 앞으로 나섰다.
"가자."
"예!"
"다들 고개를 조아려라!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공녀님께서 돌아오셨다!"
잘 가다듬은 도로를 따라 이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줄기를 따라 농토와 거주구가 나뉘어 있었고, 저 너머로 벽돌로 쌓은 성벽이 보였다.
아니 진짜 벽돌로 성벽을 지어 놨네. 야만족이라며.
드넓은 농토에는 뭔지 모를 작물이 가득했고, 허름한 행색의 사람들이 작물을 돌보고 몇몇 전사들이 그들을 감시하듯 서 있었다.
아마도 노예를 시켜 농사를 짓고 있는 거겠지.
노예의 보관소로 추정되는 허름한 건축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강 너머는 본격적인 주거생활을 위한 공간인지, 나무와 구운 흙으로 지은 집들이 가득했다.
...공녀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천막 생활을 해왔기에 속으로 역시 야만족답다고 여겼었는데.
나만 야만적으로 살고 있었나 보다.
그 천막은 이동식 주택이 아니라 군용막사 같은 것이었구나.
거주구역에 접어들자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채 끌려다니는 노예, 가죽과 천으로 짠 의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주민들.
간간이 보이는 갑옷을 걸친 전사들까지.
내 행렬을 발견하자마자 하나같이 기겁하며 대로에서 벗어나 고개를 조아려왔지만.
왕의 행차도 아니고 이게 맞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일단 저 멀리 보이는 벽돌성벽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한참을 나아가던 와중, 메르신 백호장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샬르 님. 곧바로 세르 칸께 가시는 겁니까?"
어? 어? 뭔가 따로 해야 하는 절차가 있나? 난 그런 거 모르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일단 태연한 듯이 반문했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해도 되는 건 상급자의 특권이지.
"흠...아닙니다. 하샬르 님이시니 세르 칸 께서도 문제삼지 않으시겠죠."
아니 뭔데. 자세히 설명 좀 해 줘.
당연히 내가 알고 있으리라 여기는 듯하니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캐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하네 진짜.
"그럼 내성에 도착한 후 전사들을 해산시키겠습니다. 저는 노예들을 인계해야 할 테니, 호위로는 자한 백호장을."
"일임하지. 그대도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알아서 쉬던가 하고."
"그리하겠습니다."
흩어진다니 마침 잘 됐다. 어차피 같이 있어 봤자 의심만 늘어났겠지.
하샬르의 친위대라면 원본 하샬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놈들과는 가급적 거리를 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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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을 구워 쌓은 내성벽은 외성의 목책보다 훨씬 두터웠다.
이 성벽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예들을 부려 먹었을까.
성문에 도착하자 메르신이 경례 후 전사들을 해산시킨 뒤, 내 말과 노예들을 데리고 떠났다.
일반 전사들은 내성에 출입할 수 없으며, 오직 칸의 직계혈족과 호위장, 칸의 측근인 중신들만 내성에 입장하는 것이 허가된다고 한다.
그 외에는 성의 잡무를 담당하는 시종들 정도일까.
"아이샨기오르에 영광을. 귀환하셨습니까, 하샬르 공녀님. 한 달 만이로군요."
성문을 지키던 중년의 전사가 경례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여태까지 보아 온 전사들과 달리 근위병다운 화려한 갑옷이 돋보였다.
"벌써 한 달이나 되었나. 아무튼, 아버지를 뵙고 싶은데 어디 계신지 알고 있나?"
"세르 칸 말씀이십니까? 아직 본궁에 계실 겁니다. 알현하길 원하신다면 본궁으로 가시면 됩니다."
"지금 바로 가면 된단 말이지?"
"예. 정무회의는 이미 끝났으니 칸께서도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원하신다면 미리 시종을 보내 공녀님께서 귀환하셨음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라 해도 나름 왕 비슷한 사람인데 막무가내로 만나는 것보다는 먼저 내가 왔다는 걸 전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리하거라."
근위병이 시종 한 명을 불러 내 귀환을 알리라 명령했다.
명을 받은 시종은 종종걸음을 서두르며 본궁으로 향했다.
성안에서는 뛰어다니면 안 되는 모양이지.
뭐 느긋하게 따라가면 될 것 같다.
"바로 입궁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대도 수고하도록."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성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그야말로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반듯하게 깔린 돌바닥 위에 화려한 건물들이 위엄을 뽐내듯 자리해 있었다.
결국은 경복궁이나 자금성 비슷한 느낌이라 지나치게 익숙해, 딱히 위엄이 전해지진 않았지만.
정무회의가 끝났다고 했던가, 성 내부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중앙에 위치한 가장 커다란 건물. 저게 아마 본궁이겠지?
자한을 데리고 본궁으로 향했다.
간간이 마주치는 시종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본궁의 입구에 도착했을 쯤, 아까 명을 받았던 시종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공녀님, 칸께서 알현을 허하셨습니다."
"그래. 안내해라."
시종의 안내에 따라 본궁 내실로 향했다.
내실의 안쪽, 화려하게 장식된 방문 앞에서 시종이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칸이시여,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공녀님이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듯한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시종이 문 옆으로 비켜섰고 자한 역시 조용히 문 옆으로 향했다.
내실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호랑이랑 한 방에 갇힌 듯한 기분인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 하샬르의 아버지, 오르한을 쳐다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좌상 위에 근육 괴물이 주먹으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셋 쯤 되어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
사람이 아니라 바위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굴강한 육체.
광선이라도 내뿜을 듯한 부리부리한 눈매까지.
내가 아니라 사실 자한의 아버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납게 생긴 사람이었다.
살려줘.
"...석 달 만이구나 하샬르. 네 쪽에서 먼저 이 아비를 찾아올 줄이야. 공을 세우겠다며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아, 저, 그게......면목 없습니다, 아버지."
일단 고개를 숙이며 사과부터 박았다.
석 달 동안 자기 아버지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고 살았을 줄이야.
하샬르는 불 속성 효녀였나보다.
그야 나 같아도 저 얼굴을 자주 보고 싶지 않긴 한데.
그래도 하샬르 입장에선 자기 아버지잖아.
사이가 나빴나? 카`하르의 여제가 된다는 게 설마 아서스처럼 왕위를 계승한 건가?
"네가 사과를 해? 아버지? 하, 아버지 소리는 십 년 만에 다시 들어 보는 것 같군. 무슨 속셈이더냐."
어질어질하다.
이건 그냥 불효녀도 아니고 망나니에 가까웠구나.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침묵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느냐? 그래, 뭐 좋다. 넘어가지.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설마 네가 이제 와서 이 아비의 안위라도 물어보려 온 것은 아닐 테고. 용건을 말해 보거라."
"서부인들의 제국에 가보려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오르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잘못 들었나보군. 다시 말해 보거라."
"서부인들의 제국에 가 보고 싶습니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어졌느냐?"
오르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긴 서부인들 입장에서 카`하르들은 야만스러운 도살자에 불과할 테니.
혼자 서부로 향한다는 건 잡아 죽여달라는 말이나 다름없긴 했다.
"진심입니다."
"허가할 수 없다. 네 어미의 고향이 보고 싶기라도 한 것 같다만, 제국은 우리 카`하르를 짐승으로 여긴다. 혼혈인 너라고 다를 것 같으냐? 애초에 받아 주지도 않을 테지. 붙잡으려 들거나 죽이려 한다면 모를까."
아 하샬르의 어머니가 제국인이었나보네. 역시 혼혈이 맞았구나.
뭐 지금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니까.
"제게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 소릴 하는 놈들은 보통 전사대 하나를 날려먹고 시체로 발견되지."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놈들도 항상 그렇게 말하곤 하지. 보다 그럴듯한 말은 없느냐? 좀 참신해져 보거라."
열 받네.
하샬르가 아버지를 싫어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뭐라고 말해야 이 남자, 세르 칸 오르한의 흥미를 끌 수 있을까.
그래. 이거라면.
"-대평원을 정복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비아냥대던 오르한의 기색이 갑작스레 일변했다.
성격 나쁜 딸을 놀리던 아버지에서, 수만의 전사를 거느린 정복자의 모습으로.
"......농담으로 꺼낼 말이 아니란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래 좋다. 허락하마. 어디 한번 읊어 보거라."
겨울 밤, 깊은 바닷속을 연상시키는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하샬르가 아카데미에 입학이 아니라 입대라고 한 이유는
제국의 아카데미는 사관학교에 가까운 기관이기 때문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