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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4화 (4/100)

제 4화

대학이 가고 싶어요, 아버지!

안일했다.

서슴없이 딸에게 농담을 던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었나.

이 남자야말로 카`하르 중에서도 굴지의 세력을 자랑하는 아이샨기오르의 대족장.

살육자들의 왕이란 사실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건 더 이상 하샬르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수만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초원을 불과 피로 물들여왔던 악귀.

정복자. 아이샨기오르 오르한.

그 이름의 의미를 나는 이제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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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방안을 가득 채운 형태 없는 무언가가 무거운 족쇄처럼 내 몸을 압박해왔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가는 형편없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아니야. 버틸 수 있어. 버텨야만 해.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이대로 꼴사납게 주저앉았다가는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기에.

"...카`하르의 모든 부족을 정복하고 대평원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완성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께서 품으신 야심이자, 당신 스스로를 세르 칸이라 천명하신 이유겠지요. 하지만."

더 말해보라는 듯 오르한이 오른쪽 눈썹을 슬쩍 추켜세웠다.

"저희 부족이 초원을 내달리듯 맹렬히 세를 넓혔던 것도 이미 과거의 일. 지금은 옛 기세를 잃어버린 채 8년 가까이 지지부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이유는-"

"그래. 저 제국 놈들 때문이지. 내 전사들이 평원으로 원정을 떠나면 득달같이 달려와 비어버린 우리 영토를 불태우려 하는 가증스러운 서부 놈들."

역시. 부하들이 떠들던 내용 그대로였다.

요즘은 서부 놈들 때문에 예전처럼 큰 전쟁을 할 수가 없어서 좀이 쑤신다고 했었지.

아이샨은 대평원의 서쪽 구역 전체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한다.

평원 중앙이나 동부에 비해 땅은 풍족했지만, 서부인들의 나라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기에 항상 그쪽에 병력 일부를 할애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실제로, 10년 전쯤에 제국에서 대규모 군단을 파병해 상당한 피해를 입은 적도 있다고 하니.

반면, 국경에 아예 장벽을 세워놓고 이쪽의 빈틈만을 노리는 서부 제국과 달리 남서부 국경의 데인 왕국은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정복해봐야 제국과의 국경선만 길어지니 내버려 둘 뿐, 멸망시키고자 하면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 있는 약소국이기에.

내 부하들이 약탈했던 마을들도 데인 왕국의 개척촌들이라 하더라.

즉, 대평원을 통일하고 싶으면 제국이 우리를 노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렘넌트 아카데미에 들어가려 하는 거고.

제국의 침공과 아카데미 입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것 아니냐고?

놀랍게도 설정상 관련이 있다.

"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서부의 제국, 칼 로스가 건재한 한 저희는 더 이상 원정군을 편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방을 경계할 필요가 사라진다면? 그때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삼 년 정도면 평원을 정복할 수 있겠지. 허나, 그렇게 될 리 없지 않느냐.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하다. 언젠간 무너질지언정 지금은 아니야."

"제국이 약화되길 기다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애초에, 제국을 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대할 필요가 없다? 무슨 뜻이냐."

비로소 흥미가 생긴 듯 오르한이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려놓았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제국이 저희를 적대하고 틈만 나면 토벌하려 하는 건, 저희가 서부인들을 습격하고 약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한 것 아닙니까? 제국에 복종하는 겁니다."

"목 하나."

"네?"

갑자기 뭔 소리야.

"네가 내 혈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말로 목 하나가 잘려 나갔을 것임을 알아라. 칸은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오르한의 눈빛이 몇 배는 싸늘해져 있었다.

사냥 직전의 맹수와도 같이, 그가 내 목덜미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반사적으로 목을 감싸려는 본능을 간신히 억눌렀다.

"...정말 복종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저희가 제국에 복종했다고 그들이 믿게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제가 제국에 가려는 겁니다."

"......설명해 봐라."

"제국에, 렘넌트 아카데미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젊은 인재들을 달인급 전사로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관이지요."

"제국의 군사기관이라면 제국인들만을 위한 기관 아니겠느냐."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꼭 제국인 만이 입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작의 렘넌트 아카데미는 제국 소속의 기관이지만, 딱히 제국인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 판타지 세상이 배경인데 아군 종족이 하나뿐이었다면 게임이 재미가 없지.

아카데미 학생들 중엔 타국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이종족 캐릭터들도 몇 명인가 존재했다.

특례입학제도였던가.

제국에 우호를 맹세한 국가들에 한해서 아카데미 추천 입학권을 제공한다는 설정이었다.

특례입학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 사실 각국의 젊은 인재들을 일종의 볼모로 확보해두려는 목적이지만.

"그러니, 저희 아이샨이 제국을 침공하지 않겠다 맹세하며 제가 아카데미에 볼모로 남는다면 제국 역시 굳이 저희를 공격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제국이 너 하나만 믿고 우리가 동부를 정복하는걸 내버려 둔다고?"

사실 말이 안 되긴 하죠.

아카데미에 이종족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기 위한 억지 설정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게임이 갓겜 소리는 못 듣던거지.

"적어도 제국은 지난 수백 년간 이 제도를 유지해오며 이종족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왔습니다. 이제 와서 그 신뢰를 스스로 부수려 하진 않겠지요."

"제국에 대해 잘 아는 듯이 말하는구나. 가본 적도 없으면서."

그야 게임 속 설정대로 말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는 어머니를 팔자.

"어릴 적 어머니께 가끔 들었었습니다."

"아이멜라가 그런 것까지 말해주었더냐. 의외로군."

하샬르의 어머니 이름은 아이멜라였구나.

어머니 찬스로 일단 의심을 사는 일은 피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특례입학을 위해 약탈을 멈추고 제국에 우호를 선언하며 너를 보내 달라는 말이렷다...일단 몇 가지만 더 묻도록 하마."

"말씀하시지요."

"첫째로, 제국에 우호 사절을 보낸다고 하여 과연 그들이 믿겠느냐? 나 같으면 목을 베어버리고 무시할 텐데."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아이샨기오르의 직계혈족이 단신으로 찾아간다면 그들도 반신반의하겠지요."

솔직히 위험부담이 크긴 한데, 그래도 설마 왕족 비슷한 인물이 평화 사절로 왔는데 죽이기야 하겠어.

"적진에 혼자 찾아온 어리석은 여자를 억류하거나 죽이려 들지도 모르는데?"

"그들 역시 아이샨의 전 병력과 전면전을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게임에서 나오듯이 제국이라고 무적은 아니다.

카`하르를 통일해 제국을 점령한 헤르셀라의 병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르한의 병력만 침공해도 제국 동부는 초토화될 것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네 어리석음을 탓할 일이지, 전사들을 이끌고 복수할 생각은 없다만?"

"그걸 그들은 모르잖습니까. 원래 서부인들은 왕족이 살해당하면 바로 전쟁합니다."

서부인들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도록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이런 대화는 원래 분위기가 중요한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역시나 자식이라고 구해줄 생각은 없구나. 이 야만인들.

"그래 좋다. 두 번째 물음이다. 네 생각대로 그곳에 입학했다고 치자. 그 뒤 내가 대군을 소집해 동부로 정벌을 떠난다면 제국이 이를 좌시하겠느냐?"

"좌시할 겁니다. 일단 우호를 맹세한 이상 저희를 노릴 명분이 없으니까요."

칼부터 휘두르고 보는 카`하르와 달리, 서부인들은 명분에 집착한다. 그것이 문명인이니까.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저희가 다시 서부인들을 공격한다면 모를까, 제국을 위해 동부를 안정화한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워 출병하신다면 어찌할 수 없겠지요."

원래 한 번 신뢰가 무너지면 불신이 팽배해지는 법이다.

볼모를 보내고 우호를 맹세한 나라의 뒤통수를 친다?

당장 제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다른 나라들이 술렁이게 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들도 제국에게 배신당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제국의 평화는 끝을 맞이하겠지.

"최소한의 병력만을 국경에 배치해두고 가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라는 볼모가 있는 이상 이쪽을 향한 감시는 느슨해질 터. 제국에게 출병을 숨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서부인들은 산 채로 이틀을 넘기기 힘든 것이 이 동부 평원.

제국의 첩보망에도 한계가 있다.

지금이야 언제 카`하르가 습격할지 모르니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지.

볼모가 생기고 나서도 그 감시망을 계속 유지할까?

수많은 비용과 인적 자원의 무의미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그럴 리가 없지.

오르한 역시 동의하는 것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지막 물음이다. 제국에 우호를 맹세하라 했었지. 그렇다면 대평원의 정복이 끝난 뒤에는? 이 아비의 정복이 거기서 멈출 것 같더냐?"

역시 나중에는 제국을 칠 생각인가.

서부인들은 동부 대평원이 얼마나 넓은지 알지 못하기에 경시하고 있지만, 대평원을 통일하는 순간 카`하르는 제국과 비견할만한 강대한 세력이 된다.

원작에서도 야만족들의 여왕이라 무시했던 하샬르의 군세에 초토화되지 않았던가.

"그땐 말머리를 돌려 제국을 공격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호 협정을 맹세했는데도?"

"저희가 언제 그딴 걸 지키며 살았습니까?"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오르한이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그래. 협정 같은 걸 잘 지키고 살았으면 니들이 야만족이 아니었겠지.

"하하하하-! 그래, 그건 그렇지! 허나 너는 어찌하려느냐? 전쟁이 일어나면 볼모부터 처형하려 할 텐데?"

나는 가능한 한 사악하게 보이려 노력하며 웃었다.

"렘넌트 아카데미의 재학 기간은 3년입니다. 그때쯤이면 저는 이미 오르도스로 내달리고 있겠지요!"

오르한의 웃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이젠 아예 방 안이 진동할 정도로.

"물어뜯기만 할 줄 알던 녀석이, 뱀과 같이 말할 줄도 알게 되었구나! 좋다. 허락하지!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 보거라!"

좋아. 이걸로 허락은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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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거짓말이다.

돌아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가 미쳤나. 이 인간도살자들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걸 내버려 두게.

아카데미에 가서 어떻게든 입지를 올린 뒤에, 이놈들의 위험성을 널리 알려 토벌군을 만들어버릴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동족들에게서 등을 돌린 명예로운 의인.

이른바 정의의 매국노라 할 수 있지.

완벽한 플랜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는 분명 아카데미물을 쓰려고 했는데 어째서 사극 비슷한 물건이...?

한 화를 통째로 두 사람의 대화로 채웠네요.

진학 문제로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란 원래 이렇게 힘든겁니다.

다음화는 새벽이나 내일쯤 올라올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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