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입학 준비는 철저히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미리 여행할 채비를 해 두거라. 적어도 사흘 뒤에는 제국으로 떠나야 할 테니."
만족스럽게 마무리된 대화를 마치고 내실을 나왔다.
불가마 사우나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시종은 원래 일터로 돌아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자한만 꼿꼿이 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알현은 끝나신 겁니까, 하샬르 님?
"후우...그래. 어떻게든 무사히 끝내긴 했지. 피곤한 일이었어. 좀 쉬고 싶을 정도로."
"그러시다면 금화궁에 시종을 보내 준비하라 전하겠습니다. 거기 너, 이리 와 봐라."
자한의 부름에 마침 지나가던 시녀 한 명이 황급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네! 하샬르 공녀님, 자한 님. 무슨 일로 부르셨나이까."
"공녀님께서 긴 원정에 지치셨다 하시니, 금화궁으로 가 침소를 정돈하고 더운 물을 준비하라 일러라."
"네. 바로 전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시녀가 바삐 떠나갔다.
그러니까 금화궁이라는 곳이 내 자택인가 보네.
"그러면 바로 금화궁으로 가시겠습니까?"
"흠......그래, 그게 좋겠어. 앞장서거라."
"제가 말입니까?"
자한이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뭐야, 또 뭔데. 설마 얘한테 안내를 시키면 안 되는 거였나?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이제 와서 번복하는 건 더 이상하겠지.
그냥 뻔뻔하게 밀고 나가자.
"하기 싫은가?"
"...아닙니다. 안내하겠습니다."
할 말을 삼키고 걷기 시작한 자한을 천천히 뒤따라갔다.
망나니 년이라서 좋은 점도 있네.
대충 밀어붙이면 다들 시키는 대로 하는구나.
----
금화궁은 본궁의 후방, 서쪽에 위치한 널따란 별궁이었다.
본디 하샬르와 그 어머니 아이멜라가 생활하던 궁으로, 아이멜라의 머리색을 본따 오르한이 직접 금화궁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사시사철 금잔화가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운 궁궐이었으나, 아이멜라가 죽은 이후론 아무도 정원을 돌보지 않았다고.
확실히, 들어오면서 본 정원은 금잔화는커녕 그 흔한 잡초 하나조차 없는 황량한 모습이었다.
"후..."
갑옷과 의복을 시녀들에게 정돈하라 맡기고, 침실 옆의 욕탕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냈다.
목욕 시중을 들러 왔다는 시녀들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말로 쫓아냈다.
이곳에 빙의 당한지도 어느덧 15일.
어색하기만 했던 새로운 몸도 나름 익숙해졌다.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부분에서만.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알아서 적응이 되더라.
여자의 몸이 되었다는 부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하샬르의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이게 처음인가.
원정 도중에 거울같은 물건이 있을 리 없었고, 물도 부족해서 욕조는커녕 젖은 천으로 몸을 대충 닦기만 했으니.
애초에 워낙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때라 그런 건 생각조차 나지 않았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미인이긴 하다.
허리까지 기른 검은 머리카락은 긴 노숙생활 탓인지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지만, 지저분한 기름기와 먼지를 씻어내니 이내 부드럽게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원작에서는 이 머리를 왼쪽 절반만 뒤로 틀어올려 묶고 다녔었지.
얼굴 역시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는 야만인답지 않게 깔끔하고 수려했다.
혼혈 중에 미인이 많다는 속설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네.
다만, 세상에 불만이 좀 많다는 듯 지나치게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아름답다기보다는 매섭게 느껴졌다.
온기 한 점 없이 싸늘하기만 한 푸른 눈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늑대의 눈을 보는 것 같았고.
머리색만 하얀 색이었다면 그야말로 북부대공인데.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은 잘 단련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보기 흉할 정도로 근육이 도드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건강미가 흘러 넘치는 매력적인 몸매였다.
몇 군데 베인 듯한 흉터가 남아 있긴 했지만.
확실히 아름다운 몸이긴 한데, 딱히 부끄럽거나 흥분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긴 뭐 여자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내 몸에 내가 욕정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나르시소스도 아니고.
이상한 게 맞겠지? 나만 이상하다고 여기는 거 아니지?
아무튼.
욕조에 몸을 기대며 따스한 물에 푹 잠겨들었다.
그러고 보니 ts당한 인물들은 보통 자위라도 해 보는 게 전통이라곤 하던데.
직접 ts당해 보니 솔직히 그럴 생각도 엄두도 나지 않더라.
심리적인 거부감도 거부감인데다가, 혈기 왕성한 야만인 사내 이백이 지척에 있던 상황에 자위 같은 짓을 하다 들켰다가는......
여자가 되는 것까지는 납득하고 받아들였지만 암컷이 되는 건 동의한 적 없어.
----
목욕을 끝내고 얇은 침의로 갈아입은 뒤 침실로 돌아왔다.
살풍경했던 천막과 달리 방 안은 꽤 화려했다.
다양한 그림과 문양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원목을 깎아 만든 고급스러운 가구마다 금박 세공이 입혀져 반짝이고 있었다.
안쪽 벽 한가운데에 놓인 침상은 비단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동물 가죽 대신 깃털을 채워 만들었는지 무척 푹신했다.
하샬르가 이렇게 화려한걸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면 아이멜라가 이런 취향이었나.
얼마 만에 누워 보는 것인지 모를 푹신한 침대를 만끽하고 있으니 잠이 솔솔 밀려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꿈 속에서, 내가 죽인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람들을 보았다.
반쯤 썩어 버린 무수한 손들이 도망치려는 내 다리를 붙들고 끌어당겨 물어뜯었다.
두 다리가 찢겨나가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악몽이었다.
----
오르한이 호언장담했듯이, 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기 위해 나를 볼모로 보낸다는 안건은 단 하루 만에 통과되었다.
전해 듣기로는 세 명의 오라비들이 앞장서서 아주 열성적으로 찬동했다고 하던데.
어지간히 하샬르를 경계했던 모양이지. 역시 여기 남아 있어 봐야 위험하기만 했겠네.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온 자한과 메르신에게 속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적지 한복판에 홀로 남게 되는 형국이긴 하나......뭐 하샬르 님이시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면 저희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메르신은 내가 강제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자 안심한 듯 웃었다.
자한은 그러면 오르도스에 남겨질 자신들은 어찌해야 할지 물어보았다.
글쎄. 이놈들을 어찌해야 할까.
살리기엔 저지른 죄가 깊고, 그렇다고 내게 충성하는 녀석들을 죽게 내버려 두자니 묘하게 씁쓸한데.
아니. 미친 생각이지.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아버지께서 다시 초원 정복을 시작하시면 너희도 참전하게 되는 건가?"
"공녀님께서 명하신다면 그리될 것입니다."
"내가 명령하지 않는다면 아버지께서도 굳이 너희를 전장으로 끌고 가진 않으실거라는 말이군?"
진짜 어떻게 해야 하나.
"너희 생각은 어떻지? 원정에 따라가고 싶나?"
"당연히 따라가고 싶-"
"저희의 의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하샬르 공녀님의 친위기병대. 공녀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눈을 빛내며 긍정하는 자한의 말을 칼같이 끊어 버리며, 메르신이 단언했다.
결정했다.
그래. 앞으로는 신경 쓰지 않을 놈들이지만 굳이 사지로 보낼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오르도스에 남아 이곳을 지키거라. 전장에 나가 봐야 공은커녕 개죽음당할게 뻔하다. 나를 보내버리고 싶어 안달 난 오라비들이 너희라고 무사히 내버려 두겠느냐."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오르도스에서 그냥 조용히 살아라.
그러고도 죽으면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
자한과 메르신을 돌려보낸 뒤 온종일 서부로 향할 채비를 했다.
하루종일 말을 달리면 국경 근처까지 엿새 가랑 걸린다고 한다.
혼자서 초원을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메르신의 부대에서 스무 명의 기병이 호위로 차출되었다.
애매한 숫자였지만 이 이상 늘어나면 괜한 경계와 관심을 살 거라나?
이들은 국경 근처까지만 동행한 뒤 오르도스로 복귀할 예정이다.
이동 경로 확인이나 보급품 준비등의 세부 사항은 메르신에게 일임했다.
역시 유능한 부하를 두니 편하구나.
태연하게 명령에 따르는걸 보면 원래 하샬르도 이런 부분은 메르신에게 적당히 맡겨 왔던 것 같다.
나는 내 방에서 느긋하게 원작에 대해 기억나는 정보들을 되새기거나, 서부에서 생활비로 쓸 패물 등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시종 한 명이 묵직해 보이는 목재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하샬르 공녀님, 저번 원정 전에 명하셨던 무구가 완성되었습니다."
"흠? 그래. 수고했다. 이리 가져와보거라."
무구? 원정 전이면 원본 하샬르가 주문한 물건인가 본데.
일단 시종이 내미는 상자를 받아들고 돌려보냈다.
생각보다 가볍네. 무구가 들어 있다길래 묵직할 줄 알았는데.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이건...!
부드러운 비단 위에 놓인 익숙한 형상의 은빛 건틀릿이 은은한 냉기를 뿜어냈다.
커다랗고 날카로운 은빛 비늘이, 왼쪽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쭉 이어진 일체형의 미늘장갑.
손끝부분은 곰의 가죽도 가볍게 관통할 정도로 날카롭게 갈려 있어, 갑옷이 아니라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릿발.
광기의 헤르셀라를 상징하는 건틀릿이 내 눈앞에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서릿발]
서리협곡의 은빛 뱀을 토벌한 헤르셀라가 그 비늘과 뼈로 만든 왼손 장갑.
은은한 냉기를 머금은 비늘은 흑철 이상의 강도를 자랑한다.
수많은 기사들이 헤르셀라의 손톱에 물어뜯겨 덧없이 스러졌다.
----
하샬르가 드디어 서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길었다......
어째서 프롤로그인 동부 이야기가 끝나질 않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