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담배 한 대만 주세요, 아저씨
장벽을 넘었다.
베렝게리아 장벽이 완성된 이래, 이걸 넘어온 카`하르인은 아마도 내가 최초이려나.
공포와 경계, 적의가 뒤섞인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성벽을 통과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하샬르의 본능이 자꾸만 검을 뽑아들라 외친단 말이야.
벽 너머로 들어서자 황톳빛 평원이 나를 맞이했다.
마른 흙냄새와 비릿한 쇠 냄새, 약간의 땀 냄새가 뒤섞인 군부대 특유의 공기가 코를 간질였다.
옛 기억들이 빛바랜 추억처럼 떠올라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훈련장으로 보이는 큰 공터 왼쪽엔 병사들의 거주 구역으로 보이는 낡은 벽돌 건물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고, 맞은편에는 회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커다란 아성 한 채가 자리했다.
병사들의 막사보다 훨씬 공들여 지은 걸 보니 딱 봐도 저기가 기사들이 지내는 곳이겠네.
아성의 옆에 위치한 마굿간에선 튼실한 군마들이 나란히 모여 건초를 씹고 있었다.
셰인의 인도에 따라 병영을 가로질렀다.
경계태세가 풀리자 삼삼오오 모여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놀라 웅성거렸다.
개중에는 급하게 무기를 겨누려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기사들이 말없이 제지했다.
병영 끄트머리에 이르자 셰인이 뒤따르던 부하들을 해산시켰다.
"너희는 그만 부대로 복귀해라. 이 자는 내가 직접 후작님께 인도하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셰인 경?"
"문제없다. 돌아가 병사들을 진정시키도록."
기사들을 떠나보낸 셰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투구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나보다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중년의 기사였다.
뭐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겠지.
내 안의 유교 정신은 하샬르가 이미 죽여버렸어.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란텐부르크에 도착할 것이오. 그곳에선 가급적 소란을 피우지 않기를 부탁드리지."
"그건 너희들에게 달렸지."
오르한의 이름에 맹세하건데,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의로 남과 갈등을 일으켰던 적이 없다.
항상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들이댔을 뿐이지. 진짜야.
셰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긴 내 대답이 딱히 만족스럽진 않았겠지.
아무리 나라도 동부국경 전체를 통치하는 대귀족의 영지에서 겁 없이 사고를 칠 생각은 없긴 한데.
사람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두 필의 준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로를 내달렸다.
루드비히 후작이 다스리는 국경도시, 란덴부르크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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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덴부르크는 일반적인 후작령과 달리 화려함과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하고 딱딱한 도시였다.
강박적으로 색을 억제한 회색빛 풍경은 침울한 정적을 동반하며 방문객들을 압박했다.
구획별로 철저히 분리된 격자구조에선 집요할 정도로 효율성을 추구하려는 통치자의 성향이 엿보였다.
과연 국경도시답다고 해야 할까.
돌아다니는 주민들 역시, 병사들이거나 혹은 대장장이같이 군대를 지탱하기 위한 관계자들뿐.
드물게 마주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병사들의 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도시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전부 잘라내어 오직 군에 필요한 기능만을 남겨둔 듯한 모습이었다.
변경백이 어떤 인물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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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샬르 아이샨기오르. 카하르의 왕녀님이라 하셨던가. 환영하진 않겠네."
"바라지도 않았어."
영주성의 응접실에서 마주한 루드비히 후작은 내 생각과 큰 차이가 없는 중년인이었다.
귀족들 특유의 화려한 예복 대신, 지휘관의 군복에 가까운 간소한 감색 제복이 잘 단련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옆뒷머리를 깔끔하게 쳐낸 회색 머리카락에선 군인다운 풍모가 엿보였고.
굳어진 입매와 단정하게 기른 짧은 수염에선 강인함과 완고함이 느껴졌다.
어깨에 걸친 코트의 금빛 장식들만이 그가 후작이라는 드높은 지위의 대귀족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국의 방벽.
루드비히 빌헬름 폰 란덴부르크.
수많은 전과를 쌓아올린 제국 굴지의 명장이었다.
나는 응접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등허리를 푹신하게 감싸오는 쿠션의 감촉을 즐기며 태연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우리 카`하르의 군세를 경계해 만든 장벽의 관리자가, 그 왕족을 환영한다면 오히려 의심스러울 일이지."우리 병력이 무서워 만든 벽의 주인. 나를 반겼다면 오히려 수상했다."
"통역 마법의 지속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카하르의 언어로 말해도 괜찮네. 그대들 말은 이미 알고 있으니."
놀랍게도, 루드비히 후작이 유창한 동부어를 구사했다.
그러고 보니 머릿속에 스며들었던 기묘한 기운이 어느새 거의 희미해져 있었다.
나 역시 동부어로 대답했다.
"배려 고맙군. 확실히 이 통역 마법이란 게 애매하기 짝이 없었거든. 솔직히 불편했어."
"아직 개선할 여지가 많은 마법이라네. 허나 귀녀가 조금이라도 제국어의 어휘를 익힌다면 마법의 효과 역시 보다 정확해질걸세."
그러니까 내가 제국어라곤 하나도 몰라서 통역이 그 꼴이었다는 뜻이네?
내가 서러워서라도 제국어를 배우고 만다.
테이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 루드비히 후작이 그것을 입가에 물더니 성냥을 켜 불을 붙였다.
탁한 박하향의 흰 연기가 흐드러지듯 피어올랐다.
담배다.
시가 형태이긴 하나 오랜만에 보는 궐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향했다.
"마력초가 신기하신가? 그러고 보니 마력초 잎은 동부에선 자라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아 그래, 마력초였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유사담배.
몸을 망치는 유해성분은 없지만 니코틴과 마찬가지로 강한 중독성을 지닌 물건이라는 설정이었다.
어쨌든 담배는 담배지.
"확실히 신기한걸. 나도 한 번 써 보고 싶은데?"
"그 정도쯤이야. 자, 받게나."
루드비히 후작이 마력초 한 개비를 더 꺼내어 성냥과 함께 건네주었다.
마력초에 불을 붙인 뒤 깊게 빨아들였다.
이게 얼마 만에 피워보는 담배냐.
확실히, 설정대로의 효과가 잘 느껴졌다.
"후우ㅡ이거 아주 괜찮은걸. 재미있는 느낌이야."
"마음에 든다면 한 갑 선물해주겠네."
"거절할 이유가 없는걸."
후작이 꺼낸 작은 목제 상자를 슬쩍 웃으며 냉큼 건네받았다.
둘이서 연기를 뿜고 있으니 분위기가 다소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카하르의 왕녀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신 건가?"
착각이었다.
단숨에 본론으로 치고 들어온 후작이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래. 여긴 적진이었지.
풀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기사들에게 듣지 못했나? 세르 칸의 서신을 전하러 왔는데."
"세르 칸의 전령이라 듣기는 하였네만, 카하르의 고삐를 쥐느라 바쁠 오르한이 어인 일로?"
"아버지께서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기로 하셨거든. 제국이 동의만 한다면, 아이샨기오르는 이제 너희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딱 3년뿐이겠지만 말이야.
"평화 협정이라...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베렝게리아가 건재한 이상 자네들이 자랑하는 기병대는 제국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할 텐데."
확실히, 카`하르의 무력은 기병대의 역량에 기반을 둔 것.
말들에 날개가 달려 30m의 성벽을 날아오르지 않는 이상 저 장벽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맞는 말이야. 장벽이야 못 넘겠지. 하지만 뻔히 있지 않나? 제국을 짓밟을 길이. 너희 바로 아래에."
"......데인 왕국 말이군."
베렝게리아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동쪽 국경만을 단절하는 장벽.
남동부에 위치한 데인 왕국은 여전히 카`하르와 맨몸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 데인 왕국의 영토를 빠르게 관통하고, 그대로 북상하면 얼마든지 장벽을 우회할 수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제국 본토로 향할 이유가 없었을 뿐.
"...그래. 자네들은 항상 그 나라를 공격하고 학살해왔지. 귀녀 역시 그 쪽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들었네만."
달갑잖은 이야기였는지, 루드비히 후작이 슬쩍 논점을 흐리려 들었다.
"제국이 그걸 책망하겠다고? 데인 왕국이 약탈당하는 건 너희 역시 반길 일이잖아."
"터무니없는 모함이로군. 제국은 본디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 데인의 피해를 반길 리 있겠나."
"그야 데인은 너희가 만든 방파제니까. 카`하르의 관심을 한쪽으로 돌리고 싶었잖아?"
"그건...!"
그렇다. 데인 왕국은 본래 제국에 속한 영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데인 인들은 그 성정이 거칠고 강한 편이었고, 다른 지역과 달리 종종 제국에 저항하며 잡음을 일으키곤 했다.
당시의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는 반항적인 데인 인들을 다독이려 노력했지만 끊이지 않는 반란에 질려 결국 그만두었다.
그는 유화책 따위보다 훨씬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고, 고민 없이 결단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은 데인 지방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데인 지방에서 물러났다.
모든 데인 인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
마침내 데인은 제국을 상대로 당당히 독립을 쟁취해낸 것이다!
그리고 베렝게리아가 세워졌다.
독립에 기뻐하던 데인 인들은, 장벽을 넘는 대신 데인을 치기로 결정한 카`하르의 군세를 마주하게 되었다.
데인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면 카`하르는 대군을 쏟아부어서라도 어떻게든 베렝게리아를 돌파하려 했을 테지.
허나, 멀쩡한 먹잇감이 바로 옆에 놓여 있는데 굳이 힘들여 성벽에 들이받을 이유가 없었다.
카`하르를 유도하기 위해 제국이 일부러 뚫어놓은 빈틈. 그것이 지금의 데인 왕국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설득력 있는 설득을 쓰려 했더니 대화가 끝나지 않는다...!
새벽에 한 편 더 올라갈거에요.
[TMI]
변경백 작위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변경백과 후작은 사실 번역만 다른 동일한 작위라고 하네요.
그래서 국경을 통치하는 대귀족이라는 의미가 강조될 때는 란덴부르크 변경백이라 썼지만
해당 인물을 직접 지칭할 때는 보통 루드비히 후작이라 쓰고 있어요.
변경백님보다는 후작님이 어감이 더 좋으니까요!
사실 루드비히는 성이 아니라 이름인지라 후작이라 부를 때도 란덴부르크 후작이라 불러야 할 테지만
란덴부르크를 다스리는 란덴부르크 후작이라 하면 뭔가 웃기지 않나요?
고증을 지키기보다 어감이나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리 부른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