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화
기사답게, 전사처럼
-카아아앙!
란덴부르크 연무실.
루드비히 후작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은 이래로, 고요 속에 죽은 듯이 잠겨있던 황톳빛 대지가 마침내 기지개를 펼쳤다.
날카로운 파열음에 놀란 벽들이 틈새로 모래를 토해냈다.
두 줄기의 은빛 호선이 연달아 충돌하며, 화려한 불꽃을 흩뿌렸다.
제길.
장검을 사선으로 크게 휘둘러 간신히 나이젤을 떨쳐냈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나이젤이 내 쪽으로 다시금 검을 겨누었다.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은 채 예리한 살기만을 내뿜는 그녀의 모습에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맺힌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열 합 정도 검을 마주쳤을까. 손에 쥔 장검은 벌써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었다.
공격을 막아내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강하다.
기사라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강한 건가?
힘도 속도도, 내 쪽이 오히려 앞서고 있는데. 그녀의 옷깃조차 베어내지 못했다.
모든 검격이 그녀의 검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흘러내렸다.
마치, 물 속을 걷는 듯했다.
아무리 발을 움직여도, 나아가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그저 끝없이 가라앉듯이.
무력감이 나를 옥죄었다.
"듣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데."
검끝을 살짝 내린 나이젤이 나직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면, 놀이를 하자는 건가."
그야 네가 들어왔던 하샬르는 아이샨기오르의 광전사일 테니까!
여기 서 있는 건 그냥 대한 공화국의 평범한 군인이고.
총이라도 한 자루 줘 보던가.
"-글쎄. 과연 어느 쪽일까? 어디 한번 맞춰 봐."
억지로 입가를 치켜올리며 꼴사납게 허세를 부렸다.
애처로운 발버둥이라 비웃어도 좋다.
그러나, 하샬르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이상 나약함을 드러낼 수는 없다.
도금이 벗겨져 버린 장신구는 바닥에 버려질 뿐이니.
나이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인 순간, 흙먼지가 확 피어오르며 나이젤의 형상이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카가가가각!
목을 노리고 쏘아지는 찌르기를 간신히 막아내었다.
이가 나간 검신이 끔찍한 소음을 토해내며 마찰했다.
피어오른 불똥이 뺨에 닿아 사그라졌다.
"반응속도가 빠르긴 한데-"
반격할 틈은 없었다.
깊숙히 검을 찔러넣은 나이젤이 날밑으로 내 장검을 얽고 그대로 손목을 뒤틀었다.
두 팔이 제멋대로 치솟으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것이, 검술인가.
-콰직.
왼팔을 내려 관자놀이를 향해 내리찍히는 칼자루 끝을 가까스레 막아냈다.
팔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크윽!"
검을 놓은 나이젤의 왼팔이 내 팔을 쳐내리고 그대로 치솟은 손등이 턱을 후려갈겼다.
고개가 홱 돌아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것만으론 기사를 이기지 못해."
연이어 솟구친 그녀의 무릎이 휘청이는 내 아래턱을 으깼다.
"컥..!"
일순간, 청각이 끊겼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눈앞이 번쩍이며 점멸했다.
뒤흔들린 뇌가 이상을 토해냈다.
시야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안, 돼. 위험. 의식이...!
가라앉는 의식 너머로,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나이젤의 모습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카앙!
어?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섬전처럼 휘둘러진 장검이 나이젤의 공격을 쳐내고, 몸을 홱 틀며 내뻗어진 오른발이 그녀의 하복부에 틀어박혔다.
"읏..!"
충격으로 허리가 접힌 채, 나이젤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산산조각나는 유리파편처럼, 시야를 뒤덮던 어둠이 깨져나갔다.
발끝에서 피어오른 격렬한 작열감이 전신의 신경을 벼락처럼 내달리며 치밀어올라 뇌를 강타했다.
흔들리던 정신이 억지로 붙들리듯 갑작스레 명확해졌다.
술과 꿈에 취해있다가, 불이 붙은 채 얼음물에 던져진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혈관을 맥동하는 피의 흐름이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느껴졌고,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울림을 토해냈다.
팔과 턱의 통증은 어느새 흐려져 가벼운 욱신거림으로 변해있었다.
"......의식은 끊어지기 직전이었을 텐데."
자세를 바로잡은 나이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공은 완전히 풀려 있었어. 의식적으로 반응한 게 아니야. 그렇다면, 몸에 새겨진 본능인가."
아. 그렇구나.
이해했다. 애초에 싸우는 방법이 잘못되어 있었다.
이 육체는 카`하르의 전사, 아이샨기오르 하샬르의 것.
괴물의 몸을 평범한 사람의 의식으로 제어하려 했으니 제대로 움직일 리 없지.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이 정답이었다.
머릿속을 텅 비우고. 감각만을 날카롭게 끌어올렸다.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짐승의 미소를 흘렸다.
굶주려왔던 충동이, 마침내 송곳니를 드러냈다.
자유를 얻은 육신이 환희와 함께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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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드드드득!
이 빠진 장검이 나이젤의 검을 물어뜯었다.
강철의 검신이 거칠게 갈려나가며 튀어오른 쇳조각들이 옷자락을 잡아찢었다.
붙들린 듯 멈춰버린 검을 일별한 나이젤이 왼발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지면에 닿을 듯 몸을 크게 젖혀 흘려보낸 뒤, 비어버린 그녀의 왼쪽으로 튕기듯이 파고들었다.
두개골을 노리고 내려찍히는 나이젤의 팔꿈치를 왼손을 뻗어 붙잡았다.
"떨어져라!"
나이젤이 오른손의 검을 빙글 돌려 거꾸로 잡고 내 쪽으로 찍어내렸다.
뒤쪽으로 도약해 피해냈다.
가해진 충격을 견디지 못한 바닥이 터져나가며 파도쳤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나이젤이 거칠게 옷자락을 털어냈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로군. 힘도, 속도도, 움직임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어차피 의식을 반쯤 놓아버려서 알아듣지도 못한다.
-카아아아앙-!
두 검이 서로를 마주하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이다.
"캬아아아아악!!"
두 손에 움켜쥔 장검이 폭풍과도 같은 연격을 쏟아내었다.
귀가 멀어버릴 듯한 파열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흙먼지가 비산했다.
야수의 발톱처럼 난폭하게 휘둘러지는 장검의 검신이 한계에 달한 듯 점차 뒤틀리며 일그러져갔다.
나이젤은 침착하게 장검의 난무를 받아쳐 내며 역으로 간간히 반격하기도 했지만,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하는 듯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밀려나고 있었다.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뺨을 스친 찌르기가 선명한 열기를 남겼고, 내 검에 찢겨나간 나이젤의 허벅지가 붉게 물들었다.
끝없이 충돌하는 강철의 왈츠가 허공에 핏방울을 수놓았다.
쾌락이 뇌를 물들여간다.
하샬르의 육신은 상처 입을 때마다 오히려 더욱 흉포한 희열을 토해냈고, 흘러내리는 피는 타는 듯이 뜨거웠다.
결국, 사람보다 먼저 무기가 목숨을 다했다.
날카로운 단말마와 함께 부러진 장검이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이 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뜩인 나이젤이 상체를 비틀며 검을 어깨까지 끌어당겼다.
전신의 탄력을 쥐어짜 내지른 그녀의 검끝이 송곳처럼 공간을 꿰뚫었다.
하샬르의 본능이 환호했다.
부러진 장검을 마주하듯 내뻗었다.
칼날과 날밑 사이로 나이젤의 검을 스치듯이 긁어내며, 그대로 손목을 뒤집었다.
궤도가 크게 비틀린 찌르기가 허망하게 바닥을 파고들었다.
"제국, 검술...?!"
경악한 나이젤이 한순간 멈칫했다.
빈틈투성이네.
"캬앗-!"
맹금의 발톱처럼 손끝을 치켜세운 왼손이 나이젤의 목덜미를 향해 뱀과 같이 쏘아졌다.
"큿!"
황급히 반응한 나이젤이 칼자루를 당겨 날밑으로 목을 가렸다.
흩뿌려지는 금속 파편과 함께 나이젤이 연무실 벽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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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르르르..."
숨을 헐떡이며, 나가떨어진 나이젤을 응시했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비틀대며 일어서는 나이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흙덩이가 피에 엉겨붙어 상당히 처참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저런 상태겠지.
신경을 태우던 열기가 조금 가라앉자 몸 여기저기서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
"-그렇군. 이것이 카하르의 전사인가."
호흡을 가다듬은 나이젤이 머리카락에 엉킨 먼지를 털어내며 칼자루만 남은 장검을 미련없이 놓아버렸다.
"정묘함은 없지만, 그 힘과 속도. 맹수와도 같은 저돌성."
벽을 뒤흔든 충격에 바닥으로 흩어진 무기들을 향해 걸어간 나이젤이 허리를 숙였다.
장검과 장창을 하나씩 집어들고, 단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꽂는 모습이 섬뜩했다.
"그래. 카하르는 본디 기마민족, 말을 달리며 휘두르는 검은 기량이 아닌 강맹함이 중요한 법이지."
내 쪽으로 휙 내던져진 장검을 받아들었다.
나이젤이 나를 향해 창을 겨누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게 한계는 아니겠지? 본격적으로 해 보자."
짙은 살기가 또다시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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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휘두르는 나이젤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절도있고 유려한 검술을 펼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한 맹공이 쏟아졌다.
돌진과 후퇴, 도약을 뒤섞어 사방을 춤추듯 뛰어다니는 역동적인 움직임.
팔다리를 총동원해 창과 단검을 찌르고 내던지며, 예측 불가능한 각도로 끊임없이 퍼붓는 공격적인 전투방식.
나는 감각을 한계까지 몰아세우며 간신히 이에 맞대응했다.
-카앙!
몸을 내던지듯 돌진해오며 파고드는 나이젤의 찌르기를 장검으로 후려쳐 튕겨냈다.
나이젤이 그대로 창을 놓아버리고는, 허리춤의 단검을 벼락같이 뽑아들어 내 어깨를 내리찍어왔다.
상체를 옆으로 비틀어 어깨를 노리는 단검을 피해냈다.
나이젤이 손목을 확 꺾으며 단검을 놓아버렸다.
영거리에서 손목의 스냅만으로 쏘아진 단검이, 미처 대응하지 못한 내 어깨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그아아아아앗-!"
사납게 포효하며 나이젤의 허리를 노리고 장검을 휘둘렀다.
나이젤은 내 어깨에 박힌 단검에 손을 뻗어 붙들고는, 그대로 내 등 너머로 뛰어올랐다.
장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헤집어진 어깨에서 살점이 떨어져나가며 핏줄기가 뿜어졌다.
신음을 내뱉을 틈도 없이, 목 뒤쪽으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위기감에 황급히 상체를 옆으로 꺾었다.
오싹한 파공음과 함께 나이젤의 오른발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귓바퀴가 반쯤 잘려나가 연무실 벽에 들러붙었다.
등 뒤를 향해 팔꿈치를 휘둘렀다.
나무를 쪼개는 듯한 감각과 함께, 둔탁한 파쇄음이 울려 퍼졌다.
"윽..!"
공중에 거꾸로 뜬 채 왼팔을 들어 내 팔꿈치를 막아낸 나이젤이 밀려드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움직임이 멈춘 나이젤을 향해 그대로 장검을 내찔렀다.
나이젤이 오른손을 뻗어 내 어깨를 짚고, 곡예사처럼 회전하며 검을 피해냈다.
허공으로 튕겨 나갔던 나이젤의 창이 그녀의 발끝과 맞닿았다.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나이젤이 발끝으로 창을 휘감아 걷어차듯 내려찍었다.
창끝이 허벅지를 꿰뚫었다.
"캬하아아악-!"
발악하듯 휘두른 장검이 나이젤의 팔을 깊이 훑었다.
나이젤이 창대 끄트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도약했다.
창날이 뽑혀나가며 허벅지를 깊게 찢었다.
핏줄기가 맹렬하게 솟구쳤다.
맥없이 꺾이려는 무릎에 안간힘을 쏟아부어 버텼다.
부풀어오른 근육이 혈관을 강하게 압박하여 출혈을 억제했다.
한계에 가까워진 육체가 비명을 토했다.
아파.
헤집어진 어깨는 간헐적으로 경련했고, 너덜너덜해진 옷은 원래 색을 알아볼 수조차 없이 검붉게 물들어 질척였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것인지, 투기로 끓어오르던 몸조차 점차 차가워지고 있었다.
힘들어.
맞은편의 나이젤 역시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왼팔은 뼈에 금이 간 것인지 힘없이 늘어졌고, 깊게 베인 오른팔은 끊임없이 울컥이며 선연한 붉은색을 토해냈다.
단아했던 얼굴 역시 흙먼지와 땀방울이 뒤섞인 얼룩으로 지저분했고,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선홍빛 핏줄기가 배어 나왔다.
하샬르의 본능이 이를 갈며 속삭였다.
아직이다.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송곳니를 치켜세워라.
발톱을 꺼내라.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옆구리를 쳐다보았다.
찢겨진 가죽 천 사이로, 은빛 갑주가 유혹하듯 서늘한 냉기를 흘렸다.
그래, 이거라면.
떨리는 왼팔이 옆구리로 향했다.
손끝이 닿았다.
"-여기까지입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충동을 끊어내었다.
열기에 취해있던 의식이 되돌아왔다.
나는 오른손에 쥔 장검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세시간 가까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동작들이 이게 합이 맞는지 계속 고민하며 쓰다 보니 생각보다 엄청 늦어버렸어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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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내용 이야기입니다.
한 화를 통째로 전투신으로 채워 보는 것.
개인적으로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일이었어요.
조금 실험적인 내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제 취향대로 최대한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묘사해보며 썼는데
이렇게 전투의 합 자체를 자세하게 서술하는 것과,
전투의 전개와 전달되는 느낌 위주로 단순화하여 서술하는 방식.
둘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실지는 모르겠네요.
독자분들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크로스가드나 힐트, 폼멜이란 단어 대신 날밑, 칼자루 끝 같은 우리말로 쓰고 있는데
그냥 영어로 쓰는 편이 더 멋져 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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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칼 한 자루만 든 하샬르 상대로 갑옷 입고 싸운 비겁한 나이젤.
사실 하샬르가 그냥 맨몸으로 따라오길래, 원래 갑옷을 안 입고 싸우는 타입으로 착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