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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12화 (12/100)

제 12화

덤 앤 더머

"...내가 분명 대련을 해 보라고 말하긴 했네만."

루드비히 후작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면목없습니다."

병실의 침상에 기대앉은 나이젤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팔다리를 휘감은 붕대가 바스락거렸다.

쟤는 저렇게 다치고도 움직일 기운이 있나보네.

하긴, 아까는 심지어 저 꼴로 침상에서 내려와 예를 표하려고 했었지.

후작이 당황해 말렸으니 망정이지.

"왼팔 골절에 오른팔은 힘줄이 끊겼군. 다리 근육도 찢겨나갔고, 거기에 내장 일부가 뭉개졌지. 아, 견갑골에도 금이 갔군. 베인 상처는 하나둘이 아니고."

나이젤이 고개를 떨구었다.

말을 마친 후작이 내 쪽을 쳐다보더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처럼 변한 내 몰골이 한심해 보이긴 하겠지.

"이쪽은 아주..."

후작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답답해서 한 대 피우고 싶은 기분인가 보지?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내가 지금 그렇거든.

아무리 그래도 병실에서 연초를 꺼낼 수는 없었는지, 후작이 이내 단념했다.

마력초의 연기는 오감을 민감하게 만드니만큼, 환자 앞에서 피우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래턱과 왼팔은 금이 갔고, 왼쪽 어깨는 반쯤 파여나간 데다가 귓바퀴도 떨어져 나가 절반만 남았네. 관통당한 다리는 뼈가 으깨진데다 아예 동맥까지 찢어졌었고. 군종 사제의 치료가 몇 분만 늦었어도 귀녀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네. 알고는 있나?"

나 진짜 말도 안 되는 중상이었구나.

판타지가 아니었다면 즉사였다.

"아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도록 싸운 겐가? 단순한 대련에 진검까지 꺼내 들고. 나이젤 경이 자네 원수라도 되나?"

후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 전까진 멀쩡했던 대화상대가, 한 시간 만에 시체 직전으로 변해버린 상황이 어처구니없긴 하겠지.

이유가 궁금하냐? 나한테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애초에 나이젤 쟤는 대련이라면서 왜 죽일 듯이 덤벼든 건데.

명치에 목에 허벅지와 머리까지. 아주 집요하게 급소만을 노리더만.

내가 말실수를 좀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이려 드는 건 좀 너무하잖아.

그건 카`하르 그 야만인 놈들이나 할 짓이라고.

나도 모른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머리를 칭칭 감은 붕대 때문에 입이 열리질 않았다.

"그...제가 하샬르님께 진검을 권해드렸습니다. 후작님."

내 상태를 본 나이젤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네 짓이니 네가 해명하는 게 맞지.

대체 왜 날 반쯤 도륙한 것인지, 어디 한번 설명 좀 해봐.

"나이젤 경 자네가 말인가? 아니 어찌하여?"

"카하르의 전사라면, 대련할 때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라 들었기에 그리했습니다."

루드비히 후작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누가 그런 낭설을 퍼트리던가?"

"제국 밖 야만족의...아니,『제국 밖 이민족의 이해』라는 책에서 보았습니다. 설마, 잘못된 정보였습니까?"

"아무리 카하르가 난폭하다지만 대련에서까지 서로 죽이려들진 않네."

나이젤의 낮빛이 창백해졌다.

루드비히 후작이 고개를 치켜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 한 권만 읽은 자가 가장 무서운 자라 하더니만..."

아니. 그래서, 뭐라고?

그러니까. 이게 다 그 뭔지 모를 책에 쓰인 헛소리 때문에 벌어진 참사라고?

농담이지?

가슴을 긁어내리는 허탈감에 나도 모르게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진통제로 절어 있던 몸이 덧없이 욱신댔다.

억울하다 못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면목없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샬르 님. 전부 제 불찰입니다."

나이젤이 내 쪽으로 허리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무리한 움직임 때문에 배어 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였다.

나이젤을 향해 피어오르려는 적의를 애써 억눌렀다.

진정하자.

나이젤에게 악감정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아.

무지와 오해로 벌어진 일인데, 책임지라 하는 건 가혹한 소리니까.

따지고보면 나이젤 역시 피해자라 할 수 있겠지.

그 불쏘시개를 집필한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부 그놈 책임이다.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이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마.

말을 할 수 없으니 일단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목이 움직이긴 하네.

"하오나-"

"그쯤이면 되었네, 나이젤 경. 부상이 크니 가급적 움직이지 좀 말게나."

루드비히 후작이 나이젤의 말을 단호히 끊어내며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애초에 귀녀의 책임 역시 작지 않네. 나이젤 경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며 진검을 건네더라도, 귀녀가 정정해주었으면 피를 보지 않고 끝났을 일 아닌가."

후작이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정론이긴 한데, 아니 내가 그걸 도대체 어떻게 정정하는데.

나이젤은 한 권뿐이라지만 책을 읽기라도 했지, 난 카`하르의 문화 같은 건 자세히 들어본 적도 없다고.

"기억하게나. 제국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기로 다짐했다면, 귀녀의 명성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네."

충고인지 협박인지. 의도를 알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마도 둘 다겠지.

답답하다.

오르한의 딸이 카`하르의 문화를 몰랐다는 소리를 후작이 믿을 리 없으니, 이걸 뭐 어떻게 해명할 수도 없고.

애초에 지금은 말을 할 수도 없지만.

나는 입이 없다. 그러니 나는 해명을 할 수도 없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이쯤 해 두지. 아무튼 귀녀는 당분간 여기서 회복에만 전념하게나. 하녀들이 매일 회복액을 건네줄 테니, 사흘이면 그럭저럭 돌아다닐 정도까진 회복될 것이네."

회복액? 포션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거 나한테는 별 효과가 없을 텐데?

나이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후작님. 하샬르님은 항마의 축복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것도 통역 마법에까지 반응할 정도로 강한 항마력입니다."

"항마력?"

후작이 난감한 듯 눈매를 좁혔다.

항마력은 신체와 정신에 작용하는 모든 마력을 거부하는 권능.

회복액의 치유 효과 역시 마법의 일종이기에 항마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역시 가지고 있었나. 허나, 벌써 발현했을 줄이야......"

후작이 중얼거리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뭔데. 뭐가 역시인데.

오르한이 항마력을 가지고 있기라도 했나? 항마력은 유전되는 형질이니까.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회복액 대신 종군 사제를 매일 보내주겠네. 큰 차이는 없을걸세."

그리해주면 회복에 별 문제는 없겠네.

사제가 발휘하는 치유의 축복은 신의 권능 일부를 빌려 오는 것.

마법이 아닌 기적에 속하는 능력이니까.

그렇기에, 사제의 축복은 항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부정한 마력을 거부하고 거룩한 기적만을 받아들이는 권능.

이것이 항마력 또한 신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일종으로 인정된 이유이기도 했다.

"...자정이 가까워졌군.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네. 나이젤 경은 일단 좀 푹 쉬게나."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네만......"

루드비히 후작이 쓴웃음을 흘리며 병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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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떠난 뒤, 병실 내부는 우울한 침묵에 잠겨 들었다.

나이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야 뭐 내게 말을 걸어봐도 대답이 돌아올 리 없으니, 굳이 할 말이 없겠지.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하샬르 공녀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닌가보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후작이 아까 말렸던 탓인지 몸을 숙여 사죄해오지는 않았지만, 내 쪽을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죄책감으로 젖어있었다.

저렇게 미안해하니 뭐라 하기도 좀 그러네.

생각해보면 크게 다친 건 저쪽도 마찬가지긴 하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적대감을 내려놓았다.

그래. 모르고 저지른 일엔 죄가 없지.

그러니 나 역시 죄인이 아니야.

- 정말 그렇게 생각해?

떠올리지 마.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이젤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지만, 더 이상 이에 대해 말을 꺼내오진 않았다.

내 의향이 바뀌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결국 인정한 모양이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 나이젤이 침상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이젤을 용서했기 때문일까.

우울한 적막감이 가득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눈 내리는 밤하늘과 같은 고요하고 평온한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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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일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녀와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위험 없는 평안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싸워 이길 힘이 필요한 세상이니까.

본능에 몸을 맡기기 전의 기억은 선명했지만 그 뒤의 기억은 군데군데 찢겨나가 있었다.

나이젤이 휘둘렀던 검의 흐름을 떠올리며, 그 흐름을 재현하려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차근차근 고민해나갔다.

제국 검술이라고 했던가. 진짜 그게 검술 이름인가?

단순하다 못해 몰개성적인 이름이네.

그러고보니 본능대로 움직였을 때. 딱 한 번, 그 검술을 따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거지? 원본 하샬르는 제국 검술을 알고 있었나?

고민해봐야 답이 안 나오는 문제긴 한데.

떠올랐던 의문을 뇌리 저편으로 흘려보내고 기억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이 상황에선 팔을 이렇게 움직이고, 손목을 바깥으로 비틀어서......

다리는 여기에 두고 상체를 이쪽으로......

창을 들었을 때의 움직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다가 너무 기묘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뒤이어 내 본능이 보여 주었던 움직임을 떠올렸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운 격정적이고 난폭한 전투방식.

힘과 속도, 반사신경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펼쳐낸 검격의 폭풍.

공격에 익숙해진 상대의 허를 찔러 결정적인 빈틈을 만들어내는 교활함까지.

나이젤의 검술과는 방향성이 다를 뿐, 이미 완성된 무예라 할 수 있었다.

하샬르의 신체능력만 믿고 무작정 검을 휘둘러왔던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스러웠다.

다만, 그 기합소리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캬아아앗 그아아아아 카아아아악.

이게 사람의 기합 소리냐? 맹수들이나 내뱉을법한 울부짖음이지.

심지어 중간엔 으르렁대기도 하더라?

원작의 하샬르는 저런 소리 안 내던데.

그녀와 달리 본능에 아예 몸을 맡겨버린 부작용인가.

이제 와 돌이켜보니, 정말이지 위험한 짓을 했던 것 같긴 하네.

본능 속에 깊이 매몰될수록 이성이 흐려져 점점 판단력을 잃어갔으니.

상처 입을 때마다 오히려 한층 거세게 끓어오르던 짐승 같은 흉성에 휘말려, 끝을 모르고 내달린 결과가 지금 이 꼬락서니.

특히 마지막의 그 충동은 정말 위험했다.

다리뼈가 으깨지고 동맥이 찢겼는데도 더 싸우려 할 줄이야.

고개를 돌려 병상 옆 선반에 놓인 은빛 건틀릿을 바라보았다.

그래. 충동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계속 싸움을 이어갔더라면, 얼마 못 가 죽어버렸겠지.

서릿발을 장비한다 해도 딱히 이미 다친 상처가 낫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전투의 복기를 하염없이 반복했다.

지친 몸이 피로를 호소하며 이제 잠들 시간이라 속삭였다.

의식이 점차 꿈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만약 저걸 끼고 계속 싸웠더라면 결국 이기는 건 누구였을까?

- 키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눈치채셨나요?

나이젤은 항상 다나까체로 말하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군인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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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가 갑자기 확 늘었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20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문득 궁금해져서 랭킹 탭을 눌러 봤어요.

여태까지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었지만, 솔직히 사람인 이상 한 번쯤 확인해보고 싶어질 때가 있잖아요?

기뻐졌답니다.

모두 제 소설을 좋아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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