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제국의 수도, 엑스라샤펠
제도 엑스라샤펠.
인류를 구원하라는 옛 신들의 계시를 받고, 성검을 뽑아들어 이종족들과 전쟁을 벌였던 전설적인 영웅, 카롤루스 대제.
그가 열두 기사들과 함께 인류를 핍박하던 이종족들을 전부 몰아내고, 마침내 황제가 되어 대관식을 치렀던 도시의 이름이었다.
칼 로스 제국이 수립되는 것과 동시에 그 수도가 된 엑스라샤펠은 기나긴 제국의 역사 동안 끝없는 증축을 반복했고, 오늘날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이자 하나의 거대한 요새가 되어있었다.
도시를 감싸며 우뚝 솟은 세 겹의 성벽은 800년 동안 단 한 번의 침공조차 용인하지 않았으며, 그 자체로 제국의, 인류의 불변할 권위를 상징하는 증표가 되었다.
제도의 성문을 통과한 것은 늦은 저녁쯤이었다.
성벽에 내려앉았던 태양은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뒤이어 찾아든 적막한 밤하늘이 도시에 그림자를 드리우려 기어들어왔으나, 제국의 수도는 여전히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며 아침해와 같이 번쩍였다.
그 광채야말로, 어떠한 억압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불변의 의지.
인류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위대한 증표였다.
도시의 거리마다 줄지어 세워진 가로등에서 새하얀 마력광이 별빛처럼 빛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를 흩뿌리며 제도의 밤거리를 소란스레 산책하고 있었다.
밤이 없는 성. 제도 엑스라샤펠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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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일단 바로 후작님의 저택을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나이젤이 마차의 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제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용건이 생길 때마다 나이젤이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가리는 천을 치우고 말을 걸어왔었다.
그러나 일단 제도에 들어선 이상, 약간의 노출조차 위험할 수 있으니 최대한 삼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제도에 저택이 있어? 아, 하긴 그렇겠네. 후작 정도 되는 대귀족이니까 당연하겠지.”
사용하지도 않는 고급 저택이라.
루드비히 후작은 동부전선을 총책임지는 입장이니만큼 보통 란덴부르크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도 대귀족이라면 원하지 않더라도 간간이 제도를 방문해야 할 사정들이 생기는 법.
후작 체면에 그때마다 따로 숙소를 구하거나 황궁에 거처를 의탁하기도 난감한 일이니, 그 저택은 아마 그럴 때를 대비한 별장이라 할 수 있겠지.
그 저택에서 당분간 머무르라 이건가.
렘넌트 아카데미는 전원 기숙사제이지만 아직 입학식까지는 일주일가량 남았다고 들었으니까.
“예. 후작님께서 제도에 방문하실 때마다 임시로 거처하시는 그다지 크지는 않은 저택입니다. 지금은 후작님이 란덴부르크에 계시니만큼 사용인들 역시 몇 없겠지만, 그래도 도착하면 느긋하게 피로를 풀고, 아마 따뜻하게 데운 물로 목욕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슬슬 이 꿉꿉한 냄새가 오랜 친구처럼 익숙해질 지경이었는데.
매일 노숙하며 지내다 보니까, 게임상에서 정령사를 파티에 맞이하면 파티원의 사기가 늘어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정령사가 세탁에 목욕에 건조까지 책임져 주는 게 틀림없어.
“온수 목욕이라. 기대되는걸.”
슬쩍 웃음을 흘리며 바로 출발하라는 뜻으로 마차 문을 두 차례 두드렸다.
“저택까지는 십 분쯤 걸릴 겁니다. 혹시 직접 가지고 내리실 짐이 있으시다면 미리 채비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부석으로 돌아간 나이젤이 마차를 몰고 자갈로 포장된 대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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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덴부르크 가문의 마차가 제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받은 듯, 저택의 정면을 장식한 무수한 창문 너머로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회칠한 외벽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저택이라 낮춰 말하던 것치고는, 적어도 마흔 명은 넉넉히 지내고도 남을 법한 상당히 화려한 대저택이었다.
나란히 선 두 마리의 늑대 석상이 정문 양옆을 지키듯 세워져 있었고, 화려한 문양을 그리는 정문의 쇠창살 너머로, 잔디가 깔린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는 광경이 얼핏 엿보였다.
정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깔끔하게 다듬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달빛을 반사하며 희뿌옇게 번뜩였고, 도로 한가운데선 사자가 조각된 화려한 분수대가 연신 물을 뿜어냈다.
이게 크지 않은 임시 별장...? 그럼 내가 그동안 알던 집들은 대체......?
거대하기로는 후작성이 몇 배는 거대했지만, 그곳은 사방이 온통 딱딱하고 칙칙한 회색 바위벽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성이다 보니, 유적지에 온 듯한 기분이라 그다지 대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반면 이곳은 장식 하나하나마다 화려하되 정돈된 품격이 느껴지는 게, 제국의 변경백이라는 직위에 담긴 힘과 무게감을 새삼스레 내게 증명하는 것 같았다.
금화궁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긴 정작 그쪽은 애초에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지 정원은 말라붙었고 복도는 먼지투성이에, 내 침실만 좀 멀쩡했으니까.
정문 앞에 마차를 세운 나이젤이 마부석에서 내려 늑대 석상 쪽으로 다가갔다.
소식을 전하는 마도구라도 장치되어 있는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쪽에서 한 무리의 하인들이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흘끗 본 나이젤이 저택 정문의 걸쇠를 풀고 정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닥을 긁어내며 진동하는 쇠창살이 으르렁대는 소음을 토해냈다.
...보통은 하인들이 도착해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나......?
뭐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지. 나이젤이 성실하게 괴상한 짓을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문을 연 나이젤이 다시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하샬르 님, 곧 내리실 시간입니다. 준비는 끝마치셨습니까?”
“그래. 들고 내릴 건 다 챙겼어. 나머지야 하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예, 그럼 저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말고삐를 붙잡은 나이젤이 마차를 이끌며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뒤따르듯 마차 바퀴가 대리석 바닥에 두 줄기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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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덴부르크 가문의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왕녀님, 나이젤 경.”
저택 앞에 도착하자 흰머리를 단정히 뒤로 빗어 넘긴 노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꽤 훌륭한 저택인걸. 루드비히 후작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 나중에 전해 줘.”
나는 풀어뒀던 검을 다시 허리에 찬 뒤 마차에서 내려 마주 인사했다.
검은색 연미복 차림에 외알 안경을 보아하니 아마도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인 듯했다.
하긴 저 겉모습으로 집사가 아니라면 그게 오히려 설정오류겠지.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왕녀님.”
노인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등 뒤에서, 하인들이 분주히 짐을 내리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왕녀님이라, 듣기 싫은 소리긴 한데 나이젤과 달리 일주일 보고 말 사이이니 굳이 지적하기도 그렇네.
저쪽 입장에서는 어쨌든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말일 테니까.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터, 그럼 바로 저택 안을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무엇보다 우선 목욕이 좀 하고 싶은데, 목욕시중 같은 건 필요 없고.”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노인이 하녀 하나를 손짓으로 불러, 다가온 하녀에게 목욕물을 데우라 일렀다.
종종거리며 다가온 하녀가 내 쪽을 흘끗 보고 조금 놀라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돌려 복도 너머로 향했다.
아마도 카`하르를 처음 본 거겠지.
하녀의 모습이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노인이 이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일단 의복은 세탁할 필요가 있으니 맡아두겠습니다만, 다른 짐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이젤이 알아서 할 거야. 쟤한테 물어봐.”
마차 옆에서, 하인들에게 짐을 내리라 명령하는 나이젤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아닌, 후작에게 지원받은 물건들의 관리는 나이젤이 전담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원래 이런 건 전문가에게 적당히 맡겨야 하는 법이다.
내가 뭐 직접 본다고 해서 꼭 필요한 물건과 필요 없는 물건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일단 오늘은 나이젤에게 맡기고 좀 쉬고, 내일 자세히 설명을 들으면 되겠지.
“흠, 그럼 그 부분은 나이젤 경의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노인이 하녀들에게 뭔가 지시하더니, 이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지시를 받은 하녀들이 나이젤 쪽으로 향하는 걸 보니. 아마도 나이젤을 도와 짐을 정리하라던가 뭐 그런 내용의 지시였겠지.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지?”
“네. 별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별채의 침실에 짐을 풀어 두시고, 그 옆의 욕실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온수 목욕이라, 이게 진짜 얼마 만이지.
기대에 찬 채 노인의 안내에 따라 별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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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끝마친 뒤, 별채의 침실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에 푹 드러누웠다.
따뜻한 목욕물 덕분에 달아올랐던 신체가 서서히 가라앉아가며,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답답한 마차 생활 동안 알게 모르게 피로가 꽤 쌓여있었던 것일까.
나는 천장의 무늬를 멍하니 들여다보며 눈앞까지 다가온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아카데미 입학식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다고 했던가.
과연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불안감 때문인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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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황실은 제국이 카`하르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이들을 유사인종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제도 엑스라샤펠이 충격과 혼란으로 뒤흔들렸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식을 들은 누구나 이게 과연 사실은 맞는지부터 의심했고,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베렝게리아가 세워진 이래로 카`하르가 동부국경을 넘어온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흉악한 악명과 잔혹한 일화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카`하르의 왕녀가 이미 제도에 찾아왔으며, 아카데미에 특례입학생으로 입학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국경 너머까지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흥미로워했고, 누군가는 분노에 가득 차 검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나는 나이젤에게 검을 배우느라 바빠, 날 둘러싼 소문 따윈 신경 쓸 시간도 없었지만.
입학식이 눈앞까지 다가왔기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27 : 후반부에 한문단을 더 추가했어요.
자꾸 이야기가 맴돌려 해서 그냥 과감하게 바로 보내버리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