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18화 (18/100)

제 18화

입학시험을 구경하러 가자

렘넌트 아카데미는 본래 카롤루스 대제가 제국을 세운 뒤, 체계적으로 기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수도에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이었다.

제국 전역에서 발굴한 우수한 인재들을 한데 모아, 전문적인 교육과 집중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들을 달인의 영역에 도달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달인급 기사들의 힘을 이용해 제국의 치세를 영원토록 유지시킨다.

그것이 카롤루스 대제의 초기 구상이었다.

그렇기에, 초창기의 렘넌트 아카데미는 단순히 기사들만을 육성시키기 위한 기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양한 학부가 추가되면서 아카데미의 규모는 더욱 확장되었고, 그렇게 렘넌트 아카데미는 점차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거대한 종합 교육기관의 형태로 변모해가게 되었다.

설립으로부터 800년.

현재의 렘넌트 아카데미는 단순히 제국군의 지원을 받고 있을 뿐, 사실상 전투과목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민간기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 하여도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선배들을 따라 제국군에 지원하는 만큼, 여전히 제국의 핵심 군사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게임상으로는 단순히 저렙 캐릭터들을 쓸 만한 레벨까지 육성하는 훈련 시스템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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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입학지원서를 작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공 학부는 역시 기사학부로 하시겠습니까?"

후작 저택의 정원에서 한창 검술을 연습하고 있던 와중에, 나이젤이 서류 한 장을 들고 찾아왔다.

"입학지원서?"

"예. 일반 학생들은 오늘부터 나흘간 입학시험을 치르겠지만, 특례입학생의 경우 입학시험이 면제됩니다. 이 지원서만 작성해 제출하시면 바로 입학이 허가되지요."

나이젤이 평안한 어조로 설명해주었다. 과하게 딱딱했던 말투가 보다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역시 어젯밤에 제발 그 어색한 말투 좀 줄이라고 이야기한 보람이 있네.

여전히 딱딱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 흡족했다.

모든 대화를 다 나 까 로 끝맺음하려 드는 어색했던 말투.

나이젤 본인은 군인다운, 기사다운 말투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본데, 솔직히 어색한데다 들을 때마다 군 시절이 떠올라서 내심 불편했었다.

어젯밤 내 하소연을 들은 나이젤은 고개 숙인 채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시정하겠습니다.'라는 힘빠진 한마디를 남겼다.

묘하게 풀죽은 모습이던 것이, 자기 말투에 상당한 애착이나 신념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던 것 같았다.

아니면 그러는 게 기사다운 멋진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살았거나.

검을 내려놓고 서류를 건네받아 정원의 테이블로 향했다.

입학지원서라. 이런 것도 있구나.

자세한 내용을 읽어보았다.

양면으로 필기 된 서류 앞면에는 지원 학부 및 간단한 개인 인적사항을 적기 위한 빈칸이 마련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특례입학생이 지켜야 할 입학수칙이 적혀 있었다.

일단 입학수칙부터 읽어보았다.

별 내용은 없었다.

복장은 기본적으론 일반 생도들과 달리 종족 고유의 복장을 입는 것이 허용되지만, 윤리규정을 지나치게 위반하는 복장은 제한될 수 있다는 항목.

특례입학생 전용 기숙사의 혜택 및 이용방법, 통금시간과 취침시간같이 기숙사 내부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눈길을 끈 내용은 특례입학생 두 사람이 요구할 시, 교수 하나의 참관하에 결투가 허락된다는 부분일까.

결투의 결과는 오로지 당사자들만의 책임이며, 결투로 인한 피해에 제국은 어떠한 외부적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는 건 상관없는데, 그게 외교 문제로 확대되는 건 철저히 막겠다 이거네.

...잘 지켜질 것 같지는 않은 규정인데.

하긴 또 모르지.

생각해보면 나나 자진해서 볼모로 온 거지, 보통 볼모로 보내진다는 건 자국에서 그다지 입지가 높지 않다는 말이니까.

제국에게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 법한 사고사라면 모를까, 자발적으로 나내다 죽어 나자빠질 경우엔 딱히 신경 쓰지 않을지도.

입학수칙을 확인한 뒤 서류를 뒤집어 지원 학부 부분의 설명을 읽어보았다.

기사학부, 마법학부, 전투종교학, 전술학부

총 네 가지의 학부가 간단한 설명과 함께 표기되어 있었다.

기사학부는 근접 전투직을 한데 모아 총체적으로 육성하는 근본 학부인 반면, 마법학부의 경우 학파에 따라 전공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이곳 역시 기본적으론 전투에 특화된 마법 위주로 가르치기는 하지만.

전투종교학의 경우에는 11 주신교의 요구로 설립된 학부였는데, 애초에 교단 소속이 아니면 지원할 수조차 없었다.

자기들끼리 끼리끼리 해먹겠다 뭐 그런 건가.

전술학부는 전투직을 육성하기 위한 학부가 아니라, 부대전술에 관한 지휘관 교육을 실시하는 학부였다.

공업대학의 문과 캠퍼스 같은 거네.

펜을 들어 기사학부에 체크한 뒤, 뒤이어 인적사항을 작성했다.

인적사항란은 이름, 종족, 나이, 성별, 국가명의 단순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샬르 아이샨기오르. 카`하르. 18세. ...여성. 아이샨.

국가명을 카`하르라 적어야 하나 좀 고민했는데, 일단 공식적인 이름은 아이샨이긴 했다.

종족도 사실 인간이라 적는 게 맞긴 한데 제국이 그걸 인정하진 않을 테고.

유사인종으로라도 취급받게 된 게 어디야.

"여기. 이거면 되지?"

다 작성한 서류를 나이젤에게 되돌려주었다.

나이젤이 서류를 반듯하게 접어 흰 편지봉투에 집어넣었다.

"예. 이대로 아카데미로 지원서를 보낸 뒤, 입학식 전날까지 기숙사로 입교하시면 됩니다."

"나흘 후면 이 저택과도 안녕이네. 짐은 다 챙겨뒀어?"

"무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필품들은 아카데미에서 제공해줄 테니, 예비용 의복들만 좀 구해두면 될 것 같습니다."

딱히 가져갈 게 많지는 않았다.

후작의 지원이라고 해 봐야 제도까지 여행 오는 동안 필요한 물자가 대부분이었고, 남은 건 학비랑 한 달 치 생활비가 전부였으니.

학비 정도는 대 주겠지만, 생활비가 필요하면 알아서 벌어서 쓰라고 하더라.

렘넌트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준 기사 수준.

적어도 C급 모험가 정도로 바로 인정될 테니, 돈이 필요해지면 틈틈이 모험가 길드에라도 찾아가 보라고 했던가.

허리춤에 찬 가죽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웠다.

그러고보니 이것도 벌써 몇 개 안 남았네. 후작이 그래도 세 갑 정도는 챙겨줬었는데.

매일 생각날 때 마다 피다 보니 어느새 반 갑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 역시 나중에 모험가 길드를 가 보기는 해야겠다.

그쪽 의뢰는 보통 몬스터 토벌이나 던전 수색 같은 거니까, 경험 삼아 해볼 만하겠지.

...굳이 담뱃값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어차피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될 수 있는 한 힘을 키워야 했다.

지금이야 제국이 나름 평화롭다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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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아카데미 입학은 내 희망찬 인생계획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시작점은 통과했으니,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이 세계를 구해낼, 잘나신 주인공의 면상을 좀 확인해봐야지.

쓸 만 하다면 어떻게든 친해져서 배드엔딩만 잘 피하고, 난 주인공의 뒤에서 적당히 도와주며 묻어가면 될 테니까.

그러다보면 주인공이 알아서 세상을 잘 구해주겠지.

바닥을 치는 내 이미지도 조금쯤 나아질테고.

원본 하샬르...그냥 헤르셀라라 부를까?

그래, 그러자.

아무튼 헤르셀라가 저지른 악행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지독한지는 모르겠는데, 말만 들어보면 아주 데인인들 피로 목욕을 하다시피 했나 보다.

그 정도 수준이면 사과해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

오히려 내가 죄를 인정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순간, 어떻게든 그걸 빌미삼아 물어뜯으려고 혈안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고.

그러니 헤르셀라가 저지른 짓은 그때는 데인이 적국이었으니 카`하르인으로서 당연한 전쟁 행위였다며 오히려 뻔뻔하게 굴어야 한다.

당연히 원성을 사긴 하겠지만, 사과한다고 딱히 원성을 사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이곳에서 공을 세워서 그걸로 덮는 편이 낫겠지.

뻔뻔하고 비겁한 생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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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부터 일반 입학생들의 입학시험이라고 했었지? 제출하는 김에 직접 한번 구경하러 가 봐도 되려나?"

소란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일이다.

소란이야 어차피 입학한 뒤엔 계속 겪게 될 일이고, 지금은 일단 주요 캐릭터들이 확실히 등장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권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굳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황실이 이미 카`하르를 유사인종으로 인정했고, 란덴부르크의 이름이 건재한 이상 후작님의 후원을 받는 하샬르 님을 대놓고 해하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차피 나중엔 다 겪을 일이니까. 그러면 가 보자."

"예. 그러면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어디 한 번 주인공의 실력 좀 구경해볼까. 주인공이 오늘 입학시험에 참가한다면 말이지만.

뭐, 오늘은 주인공이 없다 해도, 다른 주요 캐릭터들은 있을 수도 있고.

삼십 분 정도 후였을까, 마차가 드디어 아카데미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정문 앞은 입학시험을 치르러 찾아온 수많은 지원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머리카락들이 우후죽순 뒤섞이며 눈을 어지럽혔다.

노란색, 금색, 갈색, 빨간색, 파란색, 연두색, 하얀색...

......심지어 핑크색도 있네.

적게 잡아도 천 명은 넘어 보이는 인파였다.

이래서야 가까이서 마주하거나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도 힘들겠는데.

그냥 고개를 돌려 아카데미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벽돌 울타리가 부지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고, 정문의 쇠창살 너머로 열 채가 넘는 다양한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는 보습이 보였다.

양옆에 나란히 세워진 경비 건물 앞에서, 두 명의 기사가 경계를 서며 방문객들을 확인하고 통과시키고 있었다.

쇠창살 위쪽에 자리한 아치형의 장식에, 유려한 제국어로 '나라를 지키는 요람' 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뭔가 많이 익숙한 디자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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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우리 차례가 되자, 마부석에 앉은 나이젤이 경비 기사들에게 특례입학 증명서류를 내밀었고 그걸 본 기사들이 정문을 열어주었다.

나이젤이 아카데미 내부의 주차 공간에 마차를 매어둔 뒤, 문을 두드렸다.

"하샬르 님,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잠깐만."

막상 찾아오게 되니 예상치 못했던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몇개 안 남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가에 물고 불을 붙였다.

속을 옥죄는 초조함 때문일지, 성냥을 쥔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래, 아무 문제 없어.

욕이야 하겠지만, 나한테 뭘 어쩌겠어.

어차피 대부분 나보다 약할 텐데.

적당히 받아넘기면 그만이야.

연기를 폐 속 깊이 들이킨 뒤 심호흡하듯 내뱉었다.

한숨처럼 뿜어져 나온 연기가 마차 내부를 감돌았다.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장검을 다시 허리에 찬 뒤, 그 옆에 나이젤에게 부탁해 구했던 단검 한 자루를 마저 꽂았다.

뒤이어 갑옷도 다시 가다듬었다.

털가죽 위에 금속 미늘을 겹쳐 덧댄 스커트와 케이프, 장갑과 부츠 앞쪽을 덮는 철판까지.

흉갑은 가슴팍이 답답하고 거추장스러워서 그냥 입고 오지 않았다.

어쩐지 원작에서도 평소엔 흉갑을 벗고 다니더라니.

마지막으로 서릿발을 넣어 둔 금속 케이스를 허리 뒤춤에 가로로 매달았다.

서릿발을 대충 천으로 묶어 차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본 저택의 집사가, 차라리 이걸 쓰시라면서 직접 가져다준 케이스였다.

좋아. 흉갑은 없지만 이 정도면 거의 완전무장이다.

"다 됐어. 지금 나가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마차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내 쪽을 향해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화는 대부분 설정 설명이었네요.

하샬르는 여전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고요.

하긴 내심 억울하긴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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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국 요 람

그렇습니다. 렘넌트 아카데미는 한때 신병교육대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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