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화
메카는 남자의 로망 그 자체다
2층 관람석의 싸늘해진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시험장은 한창 열기어린 환호와 맹렬한 격정으로 더욱 거세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두 계층 간의 격차를 상징하듯, 난간을 경계로 여름과 겨울이 나뉘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드넓은 강당의 한복판.
여덟 명의 응시자들이 각각 둘씩 짝지어,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병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대검과 장검이 충돌하며 각자의 머리를 노리고, 양 손목에 작은 방패를 끼운 권사가 찔러오는 창을 흘려내며 파고든다.
어깨에 도끼가 틀어박힌 사내가 격통에 신음하며 검을 떨어트린다.
반쯤 헐벗은 여자가 던져대는 단검을, 짤막한 검과 방패를 든 여자가 방패로 막아내며 전진한다.
단검을 던지는 여자가 초조한 듯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연신 후퇴한다.
예기치 못한 인명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응시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무기였다.
그러나, 무기 안에 철심을 박아넣기라도 한 듯 충돌할 때마다 나뭇조각들이 비산하며 묵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철심 박은 목검이면 어차피 제대로 맞으면 중상인 건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조금 살벌한 재롱잔치라도 보는 느낌으로 그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저게 일반 응시자들인가, 생각보다 그렇게 수준이 높지는 않네.
검술을 배운 지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치고는 지독히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다섯 합 안에 무기째로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주요 캐릭터들을 제외하면 다들 고만고만한 실력들인 건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 칼릭스 역시 나른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저 주먹으로 툭 건드리면 죄다 일격이면 끝날 테니까. 애초에 인간과 용인은 기본 신체능력부터 상당한 격차가 있고.
반면, 내 왼쪽에 앉아있는 난쟁이, 아샤의 경우 그런 한심한 수준의 전투조차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꽤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몰입하고 있었다.
아까 나와 프리데의 신경전을 빙글거리며 구경한 것도 그렇고,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편인가?
프리데의 경우 다시 시비가 붙을까 봐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뒤에서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아까부터 뒤통수가 좀 서늘한 상태였다.
싸울 엄두도 안 나는 칼릭스와 달리 한 번 붙어볼 만한 느낌이긴 했지만, 역시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내가 뭐 싸움에 환장한 전투광도 아니고, 굳이 여기서 소란을 피울 것까지는 없겠지.
아까처럼 저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준다면 모를까, 내가 먼저 불화를 일으키기에는 제국에서 내 입지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 망설여지기도 하고.
게다가 어차피 억지로 싸워봐야, 결국 칼릭스에게 둘 다 사이좋게 진압당해 실려가는 미래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어쩌지.
주인공이나 메인 캐릭터들은 영 보이질 않고, 나올 때까지 이 녀석들과 좀 더 친해져 보기라도 해야 하려나?
프리데는 딱 봐도 더 이상 나와 말을 섞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차라리 아샤 쪽을 향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난쟁이들의 나라, 힘멜은 제국의 남서쪽에 있는 나라니까, 딱히 카`하르랑 원한이 있거나 하지는 않겠지?
"난쟁이, 저게 그렇게 재미있나 봐?"
"반인. 반인이라 하세요. 난쟁이라는 말은 멸칭이니까. 그쪽도 야만족이라 불리기는 싫겠죠?"
아샤가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시험장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조금 머쓱해져서 괜스레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난쟁이라는게 멸칭이었구나.
하긴, 원래 세상에서도 사람을 난쟁이라고 부르면 욕이나 마찬가지긴 했는데, 그래도 반인이나 난쟁이나 그다지 별 차이 없지 않나...?
정작 원작에서도 난쟁이라 표기되어 있긴 했는데.
그래도 멸칭은 멸칭이라니까, 사과하는 게 맞겠지.
광대뼈 언저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으며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그래? 그건 몰랐네...뭐, 미안하게 됐어."
"한 번은 상관없어요. 카`하르라면 당연히 우리들에 대해선 잘 몰랐을 테니까요."
딱히 차갑거나 화난 듯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정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겠네.
아샤의 눈동자는 여전히 홀린 듯 시험장에 고정된 채였다.
내 말에 바로바로 대답해주는 걸 보면 사람 무시하려고 저러는 건 아닌 것 같고, 정말 어지간히도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건가.
"흠...뭐, 그건 그렇다 치자. 그것보다, 내 이름은 방금 들었으니 알 테고, 넌 뭐라 부르면 되지?"
"아샤. 붉은 구리 혈족의 아샤에요. 아샤라고 부르세요, 하샬르."
꽤나 선뜻 내 이름을 불러오는걸.
그러고보니 난쟁이-아니, 반인들은 이름에 경칭을 넣어 부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서로 동등하다는 의미에서.
왕이 없는 나라. 반인들의 공화국, 힘멜의 문화적 특징이었다.
"그래, 아샤. 그래서 넌 저게 꽤 재미있나 봐? 내가 보기엔 하나같이 약해 보이는데. 싸움 구경을 좋아하나 보지?"
"좋아해요. 볼 때마다 새롭거든요. 많은 참고가 되죠."
"참고?"
실력을 높이고 싶은 거라면 보통은 자기보다 강한 자들의 전투방식을 참고하지 않나?
"네. 오히려 저런 약자들의 싸움이야말로 제 장비에 새로 적용할 영감을 주곤 하거든요. 딱 보이는 허점이라든가, 개량해 적용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신선한 발상 같은 부분이요."
"장비라면, 등에 멘 그 복잡해 보이는 쇳덩어리? 철컥거리는 게 뭐랄까, 꽤 멋지긴 한데."
아샤의 등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커다란 기계장치를 가리켰다.
남자라면 누구나 본래 복잡한 톱니바퀴와 정교한 기계장치에 강한 매력을 느끼는 법.
나 역시 그랬다.
두꺼운 갑옷처럼 등을 감싼 장치의 한가운데엔 거대한 노즐이 달려 있고, 아래쪽에도 작은 노즐 두 개가 양옆에 튀어나와 있었다.
장치의 측면에 연결된 금속 뼈대가 팔을 감싸듯 뒤덮고 팔꿈치까지 닿아있었다.
강철 프레임의 틈 사이로 수백 개의 톱니바퀴가 회전하며 실린더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위쪽으로 솟은 짧은 파이프에선 간혹 치익 거리며 옅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게 바로 아샤의 전투 장비, 차징 제트팩인가. 실제로 보니 어마어마한 로망과 박력이 전해져 왔다.
"역시 그렇죠?! 제 역작이랍니다!"
아샤가 갑작스럽게 내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강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가 있었다.
"내압성과 내식성이 높은 크롬 프레임을 기본으로 압축 실린더를 활용한 고압의 엔진 출력을 유압 피스톤과 기어를 통해 배출해서-"
"어, 어. 그래. 대단하네..."
듣고 있으면 끝없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톱니바퀴와 피스톤을 활용한 일종의 엔진 같은 구조인가 본데.
나야 대충 알아듣겠다만, 일단은 야만 종족에 속하는 카`하르인이 저 말을 듣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니까.
"아, 설명이 너무 장황해졌네요. 나도 참. 어쨌든, 이게 제 무기에요. 같은 특례입학생이니 나중에 직접 보여 드릴 기회가 있겠죠."
아샤는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배시시 웃으며 다시 시험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성격이었구나.
몇 마디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지친 듯한 기분이었다.
셋 다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던 것이, 굳이 대화해봐야 각자 피곤해지는 성격이어서 그랬던 거였나.
"오? 저 소협은 꽤 괜찮아 보이는군! 안 그렇소?"
나와 아샤의 대화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지루하게 시험장을 내려다보던 칼릭스가 갑작스럽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꽤 흥미로워하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대체 누구를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해 시험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발머리의 산뜻한 미남이 커다란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당장에라도 돌진할 듯이 두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아.
주인공이다.
선택받은 자. 성검의 용사. 인류의 구원자. 반신의 알.
데미안.
한때 내가 한창 휘둘러왔던, 이 게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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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시험은 원작 게임으로 치면 프롤로그 장면인 만큼, 데미안의 장비 역시 아직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검은색 누비 갑옷과 가죽 장갑, 가죽 부츠만을 신고 있는 가벼운 옷차림.
오른손으로 움켜쥔 대검 역시 장식 하나 없이 투박한 모습이었다.
아, 대검은 아카데미에서 준비해준 물건이긴 하겠네.
"저 금발 남자 말하는 거야? 칼 하나는 커다랗긴 하네."
통상적인 대검에 비해 훨씬 거대한 무장이었다.
검이라기엔 너무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사람의 키와 엇비슷한 길이에 검폭 역시 한 뼘에 가까운 중검.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 아니었다면, 실전성이 전혀 없어 장식용으로나 쓸 법한 물건이었다.
"그 소협도 그렇고, 맞은편의 청년도 기세가 괜찮아 보이지 않소?"
맞은편?
칼릭스의 말에 데미안의 상대 쪽을 쳐다보았다.
180cm를 넘는 키에 탄탄한 거구의 사내. 중후한 사슬 갑옷이 육중한 체구를 덮어 누르고 있었다.
탁한 금발 머리를 뒤로 넘겨 땋아 내렸고,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짙은 수염이 빽빽했다.
사내는 엄숙한 표정으로 커다란 양손 도끼를 바닥에 세운 채, 지팡이처럼 두 손으로 짚고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캐릭터인데.
"무기나 복장을 보니 데인인이네요. 일반생 입학시험에 데인인이 응시하는 것은 드문 일일 텐데, 신기하네요?"
"데인인? 데인 왕국 사람이면 특례입학생에 속해야 하는 것 아니야?"
"모든 데인인이 데인 왕국 국민은 아니라오. 데인 역시 한때는 제국 영토였으니, 여전히 제국에서 살아가는 데인인들도 종종 있다고 들었소. 저 청년 역시 그런 경우 아니겠소?"
데인인이라.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데.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데인인 사내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무심한 듯 차가웠던 푸른 눈동자가, 날 발견한 순간 시퍼런 광망을 흩뿌리며 불타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한을 한 곳에 녹여내 머금은 듯한, 원독 어린 증오.
목 뒤를 갈라 얼음물을 쏟아부은 듯한 오싹한 감각에,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조금 바뀐 분위가가 독자님들의 마음에 드실지 고민해보다 랭킹 쪽을 살펴봤어요.
그게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상관관계는 있을 테니까요.
랭킹이 많이 높아진 걸 보니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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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낮에 한 편, 자정 전에 한 편 올라갈 거 같아요.
밤샘 새벽연재보다 이 편이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것 같더라구요.
어차피 공모전 작품은 하루 2편 업로드 제한이 붙어있기도 하고요.
남은 시간엔 설정이나 개연성 등을 계속 다듬어가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