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15년에 걸쳐 화석으로 변해버린
렘넌트 아카데미의 건물 부지는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직사각형이 이어진 십자 형상을 이루고 있다.
11주신교 내에서도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하늘과 은총의 신 엘피넬을 섬기는 엘피넬 교단.
과거 대천신교라 불리웠던 엘피넬 교단의 성물이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카롤루스가 황제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대천신교였던 만큼, 황제 역시 그들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십자가의 정 중앙, 본관에는 훈련 및 교육 일체를 담당하는 주 강의실들이 밀집해 있다.
그 서쪽에는 특례입학생들의 숙소인 특별관이, 북쪽에는 전술학과의 숙소와 전술학 강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일반입학생과 취급이 상이한 특별입학생들, 아예 교육과정이 완전히 다른 전술학과 등을 따로 분리해놓은 형태였다.
남쪽에는 전투종교학을 수강하는 성직자들의 교육실과 교단 숙소가 위치했고 그 바로 아래에 아카데미의 정문이 있었다.
이들은 교단의 교리상 정기적으로 외부봉사활동 등을 수행해야 하는 만큼, 외출이 용이하도록 정문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배정된 것이다.
주 강의실 동쪽, 긴 도로를 건너 쭉 나아가면 네 개의 낡은 건물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검술학부와 마법학부, 남성과 여성으로 각각 나누어진 네 채의 5층 건물.
그곳이 바로 일반입학생들의 기숙사, 일반관이었다.
오래된 외벽은 여기저기 칠이 떨어져 나가, 안쪽의 벽돌들을 흉물스럽게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원까지 마련된 특별관 쪽과는 실로 큰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학부별, 계층별로 입학생들을 철저히 구분해 놓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구조.
아카데미 측은 차별이 아닌 구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아카데미 내에서 평등은 이미 순진한 농담이나 다름없었다.
----
특별관의 외관은 제국의 효율주의를 상징하듯, 장식 없이 담백한 직사각형 형태의 3층 건물이었다.
깔끔하게 회칠한 벽이 희게 빛났고, 스무 개 가량의 창문이 군데군데 열려 있었다.
측면에는 별도의 작은 개방형 건물이 붙어있었고, 그곳에 마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특례생의 말들을 관리하기 위한 마구간이 다소곳하게 자리해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한가로운, 마치 저택의 정원에서 느긋하게 오후를 즐기던 때와 비슷한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오, 하샬르 공. 좋은 아침이오. 기숙사에 입주하러 왔소?"
특별관 앞, 작은 공터에서 몸을 풀고 있던 칼릭스와 마주쳤다.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것인지, 평소에 입던 승복 차림이 아닌 소매가 짧은 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드러난 팔 사이로 이두박근이 살벌하게 꿈틀대며, 비늘들이 맞부딪혀 찰각거리는 소음을 내뱉었다.
"어. 그쪽은 아침부터 열심이네. 거기서 더 키울 근육이 남았어?"
"단련 역시 수행. 하루라도 빼놓아선 안 되는 법이라오."
칼릭스가 허허거리며 득도한 것 마냥 웃었다.
"참으로 바람직한 사상입니다."
나이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쟤도 어지간히 단련중독이니까.
그러고도 근력은 내 쪽이 더 높은 것이 솔직히 신기하긴 한데.
내 몸은 근손실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건가.
나는 그냥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깨에 걸친 미늘 갑주가 흔들리며, 칼릭스의 비늘과 비슷한 마찰음을 흘렸다.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이니, 별다른 예정이 없다면 소승이 특별관을 안내해 주려 하오만, 어떻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칼릭스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특별관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젤이 정문 앞에 마차를 묶어둔 뒤, 짐을 챙겨 뒤따라왔다.
----
"안쪽은 생각보다 깨끗하네."
"일반 입학생들의 숙소와 달리 이곳은 직원분들이 매일 청소해주고 있으니 말이오."
"그래? 사치스럽네......그러고 보니, 아샤는 아직 안 왔어?"
2학년인 칼릭스나 프리데와 달리, 아샤는 나와 마찬가지로 1학년이니까. 오늘 내로 특별관에 들어와야 하는 것 아닌가?
"아샤 공이라면 어제 입주했다오. 그 뒤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인의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질 않고 있소만."
"반인이니까, 뭐 갑자기 만들고 싶어진 물건이라도 생긴 것 아니겠어?"
"소승도 그리 생각한다오. 뭔가 비틀고 조이는 듯 끼익 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으니."
소음공해 아닌가? 옆집 소음은 결투까지 일어날 수 있는 중대문제일 텐데.
그 옆방에 입주한 학생은 어지간히 신경 줄이 굵은가 보네.
1층 로비에 들어선 칼릭스가 팔을 들어올려 여기저기를 지목했다.
"특별관의 1층은 식당 및 편의시설을 위한 공간이라오. 식사, 휴식, 단련 같은 것들 말이오. 특별관의 식사는 그 질이 훌륭하니 하샬르 공 역시 만족할 수 있을 것이오."
"그거 기대되는걸."
"아, 그리고 다양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민원실도 1층에 있소."
지원?
"지원이라면 어떤 것들?"
"흠. 일단 파손된 무기나 방어구의 수리, 의복의 수선 및 세탁...그리고 생필품의 보충 정도라 할 수 있겠소."
생필품이라.
"마력초도 요청하면 좀 주려나?"
그러면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제국 만세쯤은 외쳐줄 수도 있는데.
"...단순한 기호품은 안 되오. 마법학부였다면 또 모르겠소만, 일단 그런 건 본인 사비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오."
칼릭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비늘이 긁혀나갈 정도로 단호한 태도였다. 마력초를 싫어하는 건가.
그건 그렇고 담배 보급은 역시 안 되나...
결국 돈 벌 방법도 어떻게든 찾아봐야 한다는 거네.
----
"2층과 3층은 각각 신입생과 상급생의 숙소라오. 지금 특례생은, 보자......여섯 명. 그래, 공을 제외하고 총 여섯 명이오."
턱을 두드리던 칼릭스가 손가락을 뻗어 벽에 붙어 있는 약도를 가리켰다.
2층과 3층의 방들을 표시하는 열여섯 개의 사각형들 중, 몇 개인가의 사각형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2층에 둘, 3층에 다섯. 확실히 총 일곱이었다.
"신입이 셋, 선배가 넷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아샤랑 프리데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누구야?"
"상급생은 요정이 한 분, 인간이 셋이라오. 신입은 하샬르 공과 아샤 공 둘 뿐이고."
"요정이 있다고?"
아카데미에 요정종이 있었어? 게임상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말 나온 김에 소개해 드리겠소. 마침 그분은 숙소에 있으니 말이오."
요정이라, 기대되는걸.
세계수를 불살라버리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선 대수림 밖으로 나오질 않는 종족이니까.
칼릭스와 함께 중앙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방음이 잘 되는 것인지 복도는 부스럭대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나이젤은 약도를 보고 내 방을 확인하더니, 짐을 미리 풀어놓겠다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 셋이라 했었지?"
"그렇소. 프리데 공, 레이시 공, 에비앙. 이 셋이라오. 프리데 공은 만나보았으니 알 것이고. 남은 둘은 각각 성국과 파남에서 찾아온 사람이라오."
에비앙은 모르는 캐릭터였지만, 다행히 레이시는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레이시.
성국 엘피렘의 주축, 11 주신교를 구성하는 일익, 엘피넬 교단이 내세운 성녀 후보의 이름이었다.
아직 성흔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성녀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했었나.
"프리데 공은 지금쯤 단련실이겠고, 레이시 공은 제도 내 환자들의 치료를 돕겠다며 밖으로 나갔소. 에비앙이야 뭐 어딘가에서 또 놀고 있을 테지."
에비앙은 파남 사람이면 남부인이겠네.
반인들의 공화국 힘멜과의 교역을 독점하는, 제국 남부의 해양왕국.
칼릭스가 유일하게 존칭을 붙이질 않고 말하는 걸 보면...그다지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려나.
----
이윽고, 3층 제일 안쪽의 방문 앞에 도착한 칼릭스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뿔 뒤쪽을 슬슬 긁었다.
"일단 이곳이오만...너무 놀라진 마시오."
"놀라?"
"여러모로 특이한 분이라...뭐 직접 보는 편이 빠르겠소. 슬슬 일어나 계실 터이니."
특이하다고? 머리 민 근육 덩어리 용인보다 특이한 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나?
말을 마친 칼릭스가 방문을 두드렸다.
내 생각 이상으로 강하게 두드린 것인지, 문짝이 쿵쿵대다 못해 덜컹거렸다.
"...뭐야아아아아......"
문 너머에서, 추욱 쳐지고 갈라진 가느다란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일 주일 동안 목이 매달린 카나리아를 연상시키는, 실로 기묘한 음성이었다.
"페르네 공. 칼릭스라오. 신입생이 들어와서 공을 소개해주고자 하는데, 폐가 되지 않겠소?"
"신이이입...? 잠시마아아안......"
내 쪽까지 맥이 빠질 것 같은 느리고 나른한 어조였다.
잠시 동안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얼마 후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윽, 뭐야 이 냄새...!
나도 모르게 콧등을 찌푸렸다.
질식할 정도로 짙은 단내와 알코올 향이 뒤섞여 방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냄새만으로도 취해버릴 정도로 지독한 공기였다.
"얘가 그 신입이야아..? 카`하르를 보는 건 오랜만이네에......"
가슴께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레몬색 머리통과 긴 귀가 눈에 들어왔다.
요정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실로 충격적인 꼬락서니였다.
언제 빗었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뻗치고 엉킨 머리카락, 늘어난 목깃이 흘러내려 아예 한 쪽 어깨에 걸쳐져 있는 상의.
그나마도 하의는 제대로 입지도 않은 속옷 차림이었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셔댄 것인지 전신이 붉게 상기된데다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문고리를 붙든 채 쓰러질 듯 말 듯한 자세로 기대어 있었다.
핏발이 선 자줏빛 눈동자는 술기운에 짓눌리듯 반쯤 감긴 채였다.
...나도 이렇게는 안 살았다.
"요정...? 이게......?"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게 요정일 리 없어, 이런 건 요정이 아니야!
대수림 깊은 곳에 찬란한 문명을 세우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장수종은 어디 가고, 왠 알콜중독 말기 방구석 폐인 아가씨가.
"말이 심한거얼...너도 한 삼백 년쯤 살아보려어어엄......"
"그러게 술 좀 적당히 마시라지 않았소."
칼릭스의 핀잔에 요정이 머리통을 느릿하게 흔들었다.
"어떻게 그래애......아무튼 반가워어...넌 이름이 뭐야아......?"
"어...하샬르. 하샬르 아이샨기오르. 그쪽은?"
"페르네이시아......메르첼리우스...에피락서스......페르네라 불러어어..."
요정답게 괴상하고 긴 이름이긴 했다.
페르네가 하품하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술 냄새가 네 배는 더 진해졌다.
"그러엄...난 더 잘 거야아......안녀엉..."
방문이 닫혔다.
난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칼릭스를 추궁하듯 쳐다보았다.
칼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악동처럼 웃고 있었다.
"대체 저건 뭐야......? 요정이 맞긴 해?"
"저래 보여도 이 아카데미의 대선배 시라오. 3년 졸업 제인 렘넌트 아카데미의, 전설 속 15학년. 아마 어지간한 강사들보다도 아카데미에 더 오래 계셨을 것이오. 방에서 나오시진 않지만 말이오."
세상에. 게임상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유가 그거였나.
----
어지러웠던 만남을 끝마친 뒤, 칼릭스와 헤어지고 그대로 내 방을 찾아 들어왔다.
방 안은 생각보다 깔끔하면서도 넓고 기능적인 구조였다.
쿠션이 놓인 침대와 옷장이 한 귀퉁이에 자리해 있었고, 창가 쪽에는 고급스러운 책상과 책장, 의자가 놓여있었다.
책상 앞쪽의 유리 창문엔, 두꺼운 벨벳 커튼이 햇빛을 가리며 늘어져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고, 바닥엔 양털로 짠 카펫이 깔려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욕실과 연결된 문이 달려있었고, 맞은편 벽 쪽은 시종을 위한 작은 방이 이어져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하샬르 님. 요정 분은 잘 만나셨습니까?"
옷장에 옷들을 놓아두던 나이젤이 날 보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래...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더라......"
나이젤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 대강 얼버무리며, 갑옷을 벗어 건네주었다.
어차피 나중에라도 만나게 되면 나이젤도 요정의 실상에 대해 잘 알게 되겠지만.
어째서일까, 아직 정오조차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몸이 축 늘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첫 에피소드에 등장할 캐릭터들은 대강 소개가 끝났네요!
소개에 시간을 쏟으면 전개가 느려지고, 전개를 빠르게 가져가려 하면 설명과 묘사가 너무 단순해지고.
참 균형잡기 어려운 문제라 할 수 있겠네요.
====
가끔 캐릭터 컨셉을 너무 과하게 잡았나 싶기도 하지만
일반생은 전형적으로, 특례생은 과장되게 캐릭터를 구성하기로 했었으니 이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은 강의 시간이겠군요! 슬슬 진지한 스토리로 다시 접어들어야겠네요!
====
삼층 건물로 쓸지 3층 건물로 쓸 지 고민해보다가
구글에 삼층 건물을 검색했을 때, 결과 대부분이 3층 건물로 나오는 걸 보고 3층 건물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