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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25화 (25/100)

제 25화

역시 공강이 주 2일은 되어야지

=======[오르한]=======

기억한다.

불타오르는 부족을 뒤로 한 채, 분노와 굴욕을 참으며 말고삐를 움켜쥐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바룬 강 앞에 부족의 깃발을 세우며, 언젠가 초원을 발아래에 둘 야심에 부풀었던 젊은 시절을.

그 후로 이십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들을.

시작이다.

"아이샨기오르에 영광을! 전사들의 출정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세르 칸."

"그래. 내게도 그리 보이는구나."

오르도스의 외성벽, 그 정상에 올라선 채 오르한은 성벽 아래에 도열한 자신의 전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십 년에 걸쳐 모아온, 초원을 불태울 4만의 군세를.

네 가지 색의 깃발들 아래에, 끝없는 군세가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메우듯 질서정연하게 자리해 있었다.

청색 깃발과 적색 깃발을 휘날리는 가죽 갑옷 차림의 기병들이, 오른손에 쥔 창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곡도 맞은편에는 화살이 가득 담긴 화살통이 흔들리고 있었고, 말안장에는 기병용 각궁을 매달아 놓았다.

청기군과 적기군. 아이샨기오르 군단의 핵심이 되는 주력 기병들이었다.

흰 깃발을 든 백기군의 병사들은 기병이 아닌 보병들이었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허리에는 짧은 곡도를, 등에는 활을 매달고 기대에 찬 눈으로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깃발의 기병들은 육중한 미늘 갑옷을 걸친 채, 월도를 움켜쥐고 질서정연하게 정렬해 있었다.

이들의 말 역시, 다른 기병들과는 달리 강철 미늘을 이어붙인 묵직한 마갑을 걸친 채였다.

오르한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최정예 중장기병대, 흑기군이었다.

조금 소란스러운 다른 부대와 달리, 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 엄숙하게 침묵한 채 묵묵히 오르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 병단의 선두.

오르한이 가장 신임하는 네 명의 대전사들이 깃발을 높이 든 채, 전의에 가득 찬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군세를 마주하며, 오르한이 소리높여 외쳤다.

"내 목소리가, 너희 칸의 목소리가 들리느냐! 아이샨의 전사들이여!"

수만 자루의 창이 허공을 찌르며, 성벽을 진동시킬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흥분한 말들이 투레질하며 앞발로 땅을 긁어댔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10년 전의 치욕, 8년 동안의 정체! 말들은 살찌고 창칼은 녹슬었으며, 활시위가 늘어진 채, 우리는 8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지!"

오르한이 핏대를 세우며 하늘 높이 부르짖었다.

"기나긴, 너무나도 기나긴 세월이었다. 늑대가 아닌 양처럼 살아간, 그 굴욕적인 시간들!"

격정을 참지 못해 움켜쥔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굶주린 채, 이를 갈며 기다렸던 기회가, 마침내 다시 되돌아왔다!"

전사들의 함성은 서로 뒤엉켜, 이제는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뇌성을 토해냈다.

오르한이 팔을 뻗어 동쪽 초원을 가리켰다.

"이제 대평원은 우리의 사냥감이 될 것이다! 보이는 적 전부를 죽이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빼앗아라! 푸른 늑대의 이름 아래에!"

희열어린 환호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던 오르한이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쪽. 제국의 땅.

그곳에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증오하는 오랜 숙적과, 분노를 토해내던 어린 딸의 모습을.

날 죽이고 싶겠지. 루드비히.

가족의 원수라.

그래. 가장 흔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강렬한 원한이지.

사람이 광기를 머금게 하는 감정, 복수심의 근원.

새파랗게 불타오르던 눈으로, 아이멜라의 죽음을 추궁했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를 기억하기에. 딸이 제국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대로 아비를 배신할지, 아니면 아이샨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음에도.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으냐, 하샬르?

오르한은 한 차례 눈을 감고, 딸의 모습을 떠나보낸 뒤 다시 동쪽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머무는 땅. 그의 야심이 인도하는, 드넓은 대평원을 향해.

...그러려면 아주 많이 준비해둬야 할 게다.

출정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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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나.

침대에 파묻혀있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알콜중독 요정을 목도한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을까, 기숙사의 침대에 엎드린 채 나도 모르게 그대로 잠들었던 것 같다.

뭔가 아주 심각한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정작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꿈이었지...?

"일어나셨습니까, 하샬르 님? 마침 잘 됐군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이젤이 옅게 웃었다.

어느새 사복으로 갈아입은 것인지.

평소에 입고 다니던 갑옷 겸 코트를 벗어두고,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만을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공문 같은 것이라도 확인하는 중이었는지, 나이젤의 뒤쪽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부터 드리운 어슴푸레한 저녁노을이 서류들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며 방 안에 내려앉았다.

"...지금 몇 시지?"

"오후 6시 정도입니다. 푹 주무시더군요."

나이젤의 손에는 한 묶음의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단정한 차림새로 차분하게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이, 평소와 다른 세련된 지성미 같은 것을 머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꽤 생소한 느낌이었다.

"푹 자긴 했네. 꿈자리는 뒤숭숭했던 것 같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읽고 있는 건 뭐야?"

"점심 즈음 전달받은 아카데미의 강의계획서입니다. 하샬르 님도 슬슬 읽어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이젤이 들고 있던 서류 한 뭉치를 건네주었다.

나는 하품하며 침상에 걸터앉은 채, 건네받은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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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넌트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지원학부, 재학학년에 따라 각기 전혀 다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1학년의 경우 기본적인 이론과 전투술 교육, 연습대련과 실습훈련 등의 정석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아직 미숙한 신입생을 단련시킨다.

마법학부는 자질이나 학파에 따라 세분화된 선택교육이 진행되지만, 기사학부의 경우 학부생 전원이 강의계획서에 적힌 강의를 일괄적으로 수강해야 했다.

물론 특례입학생들은 예외였다.

강의계획 자체는 동일했지만, 참여하든 안 하든 그들의 자유였다.

일반입학생들이 강의계획을 거부할 경우 퇴학 처리하면 그만이었지만, 특례입학생은 퇴학제도가 없었으니.

나 역시 모든 강의에 출석할 생각은 없었다.

기마술이나 기본 체력단련 같은 강의들은 들어봐야 시간 낭비에 가까웠으니까.

재학한 지 1년이 지나, 2학년이 된 후에는 교육방식이 급변한다.

본래 렘넌트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재능 넘치는 원석을 발굴해 달인 급 실력자로 가공하는 것과, 일반 기사들의 공백을 메울 즉시 전력을 양성하는 것.

그렇기에, 아카데미 2학년부터는 단순한 교육생이 아닌 실전에 즉시 투입 가능한 준 전력으로 간주된다.

실제로도 보통 아카데미 2학년 정도면 기사들이나 마찬가지인 실력을 갖추었으니.

아카데미는 이들의 교육환경을 보다 자율적으로 바꾸어, 일종의 학점 제도를 도입했다.

2학년부턴 원하는 심화강의들을 자율적으로 선택해 수강할 수 있도록 허가된다.

그 대신, 이들이 3학년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치 이상의 학점이 요구되며, 미달할 경우 가차 없이 1학년 과정으로 강등되었다.

강의보다 실전을 원할 경우, 아카데미에서 알선해 준 파견임무 등을 수행한 뒤 보고하면 그 결과에 따라 학점이 부여된다.

그렇기에 재학생들은 보통 전문적인 강의 몇 개만을 수강하면서 파견임무를 통해 경험과 인지도를 쌓고는 했다.

어찌 보면 모험가 길드의 상위 기관이나 다름없는 형태라 할 수 있겠다.

3학년의 경우, 이미 실력이 보증된 즉시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보통 이미 제국기사단 등의 특정 조직에 합류할 것이 결정된 상태이며, 해당 조직의 예비인력으로 취급된다.

그렇기에 아카데미가 아닌 해당 조직과 함께 숙식하며, 그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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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겨 기사학부 1학년의 강의내용을 읽어보았다.

기사학부 1학년의 경우 학부과목 4개와, 공통과목 3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기의 활용 및 체술의 연계.

전위직의 역할 이해.

대규모 기마전투 훈련.

집중신체단련.

다양한 대인전투의 분석 및 학습.

적성체 연구 개론.

신앙의 이해.

철저히 실용적인 지식만을 가르치는 계획서였기에, 신학과목 하나만 유독 이질적이었다.

'제국의 역사' 같이 아카데미라면 마땅히 교육할 법한 과목들조차, 실용성이 없다며 배제했으면서.

신학은 예외라는 건가.

11주신교가 성국으로 분리되어 독립했음에도, 교단의 영향력은 여전히 제국 내 깊숙이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뜻이겠지.

일단 기마전투와 집중신체단련, 신학은 필요 없어 보이니 무시하기로 했다.

다른 특례입학생과 달리 본국이나 변경백으로부터 생활비 지원 따위가 올 리 없는 만큼, 시간을 비워 소소히 돈을 벌어두어야 했으니까.

이렇게되면 수요일과 목요일, 일요일이 비게 되는 건가.

당분간은 이틀 안에 수행할 수 있는 의뢰 같은 것들이라도 받아서 하면 되겠지.

내 기억에 아카데미에서 첫 사고가 터지기까지는 아직 석 달은 남았으니까.

혹시 모르니 미리 대비해두긴 해야겠지만.

카`하르와는 별 관계없는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내 입학으로 인해 어떤 변수가 생겼을지 알 수 없으니까.

"흐음...그래서, 입학식은 내일이었지? 뭘 준비해야 하려나?"

서류를 내려놓고 나이젤에게 물음을 던졌다.

입학식이라, 또다시 그런 눈초리들과 마주하게 되겠지.

나를 밀어내려는 듯한, 거부감 섞인 강한 감정들을.

그래도 입학생들 면면을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해둬야 할 테니, 단단히 마음먹고 가긴 가야겠다.

내가 기억하는 신입생 캐릭터들이 전원 입학했는지 궁금하니까.

"아니요. 특례입학생들은 입학식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복장 때문에 행사의 통일성을 해친다는 이유라 하더군요."

그 정도로 구분을 둔다고?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납득은 갔다.

하기야 일반 수업이면 모를까, 그런 행사들은 통일성을 크게 신경 쓰긴 하겠지.

제복 입은 학생들 사이에 이런 옷을 걸치고 가면 시선이 집중될 테니까.

원래 세상에서도 중요한 행사를 진행할 때는 복장을 하나로 규정해 일체감과 규율감을 주는 편이었고.

"그래? 그럼 뭐 제대로 된 아카데미 생활은 모레부터겠네. 그러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네, 안내하겠습니다. 하샬르 님. 오늘 저녁은 향초를 넣고 구운 오리가 나온다더군요. 꽤 기대가 큽니다."

"그래? 괜찮겠네......그러고보니, 일반관은 뭘 먹으려나? 신입생은 아직 입주하지 않았겠지만 2학년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호밀빵과 튀긴 순살 물고기라 들었습니다."

...격차가 엄청나지 않나?

일반입학생 중에도 제국의 귀족 자제들은 있을 텐데, 그런 걸 잘도 먹고 사네.

"일반관 학생들이 칼을 물고 특별관에 쳐들어오지 않는 게, 그야말로 기적이라 생각되지 않아?"

"특례입학생들에게 호위병을 허가한 게 그 때문 아닐까요."

나이젤과 나란히 웃으며 1층으로 향했다.

적어도, 몸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다행이라 여기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동부 정복으로 바쁠 시기라 한동안 등장하지 못할 오르한을 위해, 초반부에 꿈 속에서 잠시 깜짝 등장을 시켜주었습니다.

제 소설에 대해 평가해주시는 분들을 보면, 저런 진지한 부분들을 많이 좋아해주시는 것 같더라구요.

저도 좋아한답니다.

오르한은 자기들이 8년간 양처럼 지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딱히 양처럼 지낸 적은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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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아이샨기오르 군제.

청기군 8천, 적기군 8천으로 경기병 1만 6천.

흑기군 중장기병 6천.

백기군 보병 1만 8천입니다.

여기에 오르한에게 400, 자식들 각각에게 200의 친위대가 배정되어 1200명이 추가됩니다.

기동전을 벌일 생각인지, 기병 비율이 어마어마하게 높네요.

tmi답게 이런 설정이 있다 정도이니 독자분들께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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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아카데미의 1학년은 신교대, 2학년은 대학+용병, 3학년은 인턴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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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로스 vs 명순튀

그야말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 극단이라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일반입학생들도 제국 토박이 부르주아들이 많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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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티아님 소중한 후원 감사합니다!

이제 겨우 도입부로 접어든 소설을, 다들 많이 사랑해주셔서 기쁘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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