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화
누군가가 단체로 밥을 먹는다면 누군가는 홀로 밥을 먹어야 해...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널찍한 식당은 사람없이 한산했다.
옅은 라벤더 향이 식당 전체에 퍼져 있었고, 천장을 장식하는 샹들리에들이 잔잔히 흔들리며 밝은 조명을 드리웠다.
식당 한가운데엔 붉은 식탁보가 깔린 6인용의 원형 테이블이 각기 3개씩 2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고, 좌석마다 흰 손수건 위에 크리스털 잔과 은제 식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식당의 한 쪽 벽면은 조리실과 연결된 금속 문으로 가로막혀 있었고, 문틈 너머로 허기를 돋우는 고기 냄새가 슬며시 흘러나왔다.
한 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샤가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 사흘만이네요, 하샬르. 식사하러 왔어요?"
"그래. 아샤 넌 혼자 먹으러 온 거야?"
비꼬려는 뜻은 아니었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설마 이 세계에서도 그렇게까지 조롱받을 만한 일은 아마도 아니겠지?
"칼릭스는 고기를 안 먹어서 따로 먹는다 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만난 적 없고요."
"네 호위는 어디다 두고?"
칼릭스야 그렇다 쳐도 특례입학생은 호위를 한 명 둘 수 있으니 그 사람과 같이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나도 나이젤과 같이 식사하러 왔는데.
"제 호위는 자동기계거든요! 식사할 필요가 없죠. 나중에 한 번 보여 드릴까요?"
"아, 그래..."
아샤가 해맑게 웃으며 포크를 흔들었다.
역시 반인종. 중세에 가까운 세계관에서, 자기들끼리만 기술혁명을 일으키고 사는 종족다운 말이었다.
아샤의 옆자리에 앉자 나이젤이 식사를 주문하고 오겠다며 조리실 쪽으로 향했다.
"어? 저기 프리데도 식사하러 왔나 보네요?"
"그 은발 여자?"
아샤의 말에 입구 쪽을 바라보자, 프리데가 홀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더워 보였던 모피 코트는 벗어둔 상태였지만, 기숙사 내인데도 여전히 단정한 아카데미 제복 차림이었다.
정작 아샤도 기계장비를 벗어둔 채 간단한 옷만 입고 있는데 말이지.
식당 내부를 슬쩍 훑어본 프리데와 눈이 마주쳤다.
눈썹을 확 찡그린 프리데가 고개를 돌렸다.
"프리데도 혼자인가 본데, 이쪽으로 불러볼까요?"
"부른다고 오겠어? 내가 여기 앉아있는데. 괜히 서로 불편하기만 하지."
"하긴 그렇겠네요. 아쉬워라."
프리데가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앉더니 슬쩍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보면 쟤는 또 왜 혼자 먹으러 온 거지. 친구가 없나?
곧 나이젤이 자리로 돌아왔고, 저녁 식사가 도착할 때까지 셋이서 잡담을 나눴다.
나이젤은 호위라는 신분을 신경 쓰는 모양인지, 먼저 말을 꺼내는 일 없이 대부분 아샤의 물음에 대해 단답 정도만 해 주었지만.
곧 시종 하나가 금속 손수레에 오리 로스 네 개를 담은 채 우리와 프리데에게 가져다주었다.
코스 요리까지는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듯, 메인 요리와 흰 빵, 와인만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구성이었다.
기름진 오리 구이를 나이프로 적당히 찢어가며 씹어 삼켰다.
달콤하고 고소한 육즙과 향신료의 자극적인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흘끗 프리데 쪽을 쳐다보니, 고기를 아주 잘게 썰어서는 눈을 감고 우아하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래, 대귀족이라 이건가.
"이틀 뒤면 첫 강의 시간이네요. 하샬르는 참석할 건가요?"
"첫 강의면 병기의 활용과 체술의 이해였나? 무슨 내용일지 일단 한번 들어보려고."
"제가 듣기로는 첫날이라 일단 기초대련부터 진행한다고 하던데요? 저희에게도 대련을 시킬지는 잘 모르겠네요."
"대련이라......"
갑자기 허벅지가 욱신대는 것 같아 흘끗 나이젤 쪽을 쳐다보았다.
고기를 우물거리던 나이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씹고 있던 고기를 그대로 삼켰다.
"하샬르 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무것도 아니야. 고기가 맛있네."
"예. 조리사들의 실력이 훌륭한 것 같습니다."
나이젤이 끄덕이며 고기 한 조각을 다시 포크로 찍어 베어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 같은 일은 없겠지.
제국 제일의 교육기관이니까 그 정도로 상식이 없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릿발은 숙소에 놓아두고 가야겠다.
그걸 가지고 가면 어째서일지 유혈사태가 벌어질 듯한 느낌이니.
대련이라. 나한테 대련을 신청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하긴 그 데인인이 좀 걸리긴 하는데. 크누트였나?
입학시험 뒤로는 본 적이 없었지만, 강의에 나가면 다시 보게 되겠지?
소름끼칠 정도로 집요하게 날 노려보고 있었으니.
...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아카데미 내에서 대놓고 날 죽이려 들긴 힘들 테니까.
식사를 마치고 아샤와 헤어진 뒤, 다시 방으로 향했다.
프리데는 어찌나 잘게 잘라먹고 있는 것인지, 절반도 다 못 먹은 상태였다.
......혼자 먹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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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나이젤. 혹시 장검 한 자루만 구할 수 있으려나?"
방에 돌아온 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이젤에게 검 한 자루만 구해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원래 검은 누가 알아보면 곤란할 물건인 것 같으니까.
검신을 보기 전까진 평범한 고급 장검으로 보이기 때문인지, 여태까진 운 좋게도 딱히 알아본 사람이 없던 것 같지만.
그래도 아카데미 내에서 그걸 계속 사용하다 보면, 검신의 문구를 보고 검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장검 말입니까? 평범한 물건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만, 장검 두 자루를 동시에 휘두르는 건 그다지 효율이 좋지 않을 겁니다."
나이젤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내가 장검으로 쌍검술이라도 시도하려는 줄 알았나 본데.
하긴. 멀쩡한 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데도 새 장검을 구하려 드는 이유라 하면, 그야 쌍검술 같은 것밖에 짐작 가지 않을 테니.
"그건 아니고. 이 검은 나름 아끼는 거라서. 아카데미에선 일단 평범한 장검을 쓰려고."
"그렇습니까? 그럼 내일까지 비슷한 형태의 장검을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아카데미 측에 요청하면 되겠지요. 강철 장검 정도야 많이 있을 테니."
"아, 평범한 강철 무기 정도는 무료로 제공되나? 그럼 이런 것도 요청해도 되려나?"
내친김에 나이젤에게 서릿발의 형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비늘로 이어진, 끝 부분이 날카롭게 갈린 왼팔 갑주의 모습을.
헤르셀라의 본래 전투방식은 서릿발과 장검을 동시에 활용하며 연쇄적인 공세를 퍼붓는 것.
하지만 서릿발 자체는 냉기 문제도 있고, 볼 때마다 무언가 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서 사용하기 거북했다.
그렇기에 일단 비슷한 형태의 장비 정도만 갖추고, 헤르셀라의 전투방식에 적응해볼 생각이었다.
정 급하면 가릴 것 없이 써야겠지만, 역시 굳이 대련에서까지 꺼내 들만 한 물건은 아닌 것 같으니.
"흠...이런 형태라면 재고품은 없을 테고, 아마도 주문제작을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문제작? 그러면 얼마나 걸리지?"
"적게 잡아도 나흘 정도는 걸릴 겁니다. 제작비도 좀 들 테지요."
주문제작은 제작 비용을 요구하나 보네.
어쩌려나. 한 달 생활비가 반도 남지 않았는데.
"우리 남은 생활비로 감당이 되려나?"
식대와 숙박비로 나갈 돈이 없으니, 당분간은 딱히 생활비가 필요 없기야 하겠지만.
"하루 흡연량을 반으로 줄이시면 이번 달은 충분합니다. 다만, 다음 달이 오기 전까지 자구책을 마련해둬야 하겠군요."
"그럼 그렇게 해 줘. 까짓 거 한 번 줄여보지 뭐."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1층에 내려가 지원요청서를 제출한 뒤 제 방에 있겠습니다. 혹여 용무가 있으시다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보나마나 방에서 운동이나 하겠네.
일단은 호위 신분이니만큼, 혼자 단련실에 내려가 머무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 알았어. 수고해."
나이젤을 보내고 책상에 앉아, 내가 당분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첫 강의시간에 기선 제압하기.
아카데미 강의내용 새겨듣기.
데미안과 친해지기. 너무 많이 친해지진 말고.
다른 메인 캐릭터들과도 안면 익혀두기.
크누트가 무슨 속셈인지 밝혀내기.
헤르셀라의 본능에 적응해 익숙해지기.
아카데미 외부로 나가, 주에 이틀 정도 소비해서 돈 벌 방법 찾아보기.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래, 지하수로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지. 아직은 아무 흔적도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 아래에 연이어, 기억나는 사건들을 쭉 적어 놓았다.
아카데미의 훈련내용은 나레이션으로 대충 스킵된 탓에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이후 수년 간 아카데미 밖에서 벌어질 큼직한 사건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응, 그래. 이 정도면 되겠네. 당분간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메모를 마친 종이를 잘 접어 책상 서랍장 안에 넣어두었다.
슬슬 해가 완전히 저문 것인지,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외벽 너머는 온갖 조명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외벽 안쪽은 바깥과는 단절된 세상마냥 적막하고 어두웠다.
욕실로 가 욕탕에 입욕제를 풀고 몸을 담갔다.
은은한 장미향이 스며 오르며, 따뜻한 물이 목덜미 아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물 속에 반쯤 잠긴 채, 담배 한 대를 물고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뱉어낸 연기가 허공을 유영하다, 욕실 위쪽의 작은 환기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앞으로 이틀인가. 내일은 단련실에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조금이라도 몸을 익숙하게 풀어둬야겠지. 대련이든 사투든, 앞으로는 싸울 일이 꽤 많을 테니까.
목욕을 마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침의로 갈아입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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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이 찾아왔다.
밀려드는 신입생으로 가득 찬 아카데미 중앙 쪽은 시장통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특별관은 언제나와 같이 평온했다.
칼릭스는 여전히 비늘을 울리며 근육을 단련했고, 페르네는 계속 술독에 빠져 있었으며, 아샤는 다시 무언가를 제작하러 방에 틀어박혔다.
다른 둘은 기숙사에 복귀하지도 않았다.
성녀 후보야 그렇다 쳐도, 에비앙이라는 작자는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칼릭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가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에비앙이라면 제도의 유흥가를 전전하고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다.
탁한 금발에 남부인 특유의 갈색 피부를 드러내고 다니는 사내이니, 혹시 만나게 되더라도 가급적 무시하라던가.
응. 역시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을 놈인것 같다.
나는 나이젤과 같이 단련실에 찾아가, 새로 건네받은 장검의 무게감이 손에 익을 때까지 휘두르며 하루를 보냈다.
생각보다 잘 만들어진 튼튼하고 균형 잡힌 장검이었다.
단련실에 찾아왔던 프리데가 맞은편에서 운동하던 나이젤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대답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내 쪽을 한참 쳐다보았다.
평소같이 적의와 경멸이 서린 짜증스러운 눈빛이 아닌, 당혹감과 불신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이었다.
내게 뭐라 말을 걸려 하는지, 한참을 입을 달싹거리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단련실을 나가버렸다.
대체 나이젤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의아하여 나이젤에게 프리데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보았다.
"저를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제 이름과 직책을 물어보시기에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것만으로 그렇게 경악한다고?
음. 생각해보니 시종처럼 충실히 따라주고 있어서 잊고 있었는데, 나이젤은 사실 꽤 높은 위치에 있던 기사였던 것 아닐까?
본인 스스로도 란덴부르크의 열 번째 검이니 뭐니 했었잖아.
"그러고 보니 란덴부르크의 열 번째 검이라고 했었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거 아니야?"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란덴부르크의 검이라는 건 후작님께서 내려주신 일종의 명예직일 뿐이니까요."
나이젤이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숙였다.
옅은 홍조가 볼을 물들였다.
"후작이 직접 내려준 명예직이면 대단한 것 맞지 않아?"
"다른 아홉 분과 비교하면, 전 아직 미숙한 일개 기사 수준입니다. 후작님께서 저를 높게 평가해주신 것뿐입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꽤 단호한 어조였다.
즉, 후작에겐 나이젤보다 강한 기사가 최소한 아홉 명은 더 있다는 소리네.
...역시 같은 편이라 참 다행이었다.
거기서 후작과 적대했었다간 저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그대로 잡혀 죽었겠네.
아무튼, 나이젤이 겸손하게 굴 뿐이지, 프리데의 반응을 보면 확실히 란덴부르크의 검이라는 칭호가 확실히 꽤 대단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기사가 내 시종 역할을 얌전히 수행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앞으로는 좀 더 잘 대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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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장검과 갑옷을 걸치고, 아샤와 함께 주 강의실로 향했다.
서릿발은 케이스째 책상 아래에 놓아두었다.
아샤는 저번에 보았던 기계 가방을 등에 멘 채, 오른손에는 팔 쪽의 금속 프레임과 연결된 접이식 랜스를 들고 있었다.
기계 가방 역시 그동안 개량하고 있었던 듯, 그 형태가 다소 변해 있었다.
전에 비해서 노즐과 파이프가 더 늘어나고, 외부로 드러나던 부분들이 금속판으로 감싸여 있었다.
호버링 중에도 빠른 방향전환을 할 수 있게 개량했다고 하던가.
여전히 카`하르인이 이해하면 오히려 이상할 전문지식을 즐겁게 늘어놓기에, 못 알아들은 척 적당히 동의해주었다.
이윽고 주 강의실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많은 분들이 새로 찾아와주시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쁘네요!
오늘은 글이 좀 늦어져버렸네요.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내일은 드디어 첫 수업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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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프리데는 친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