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화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자
날 눈앞에 두고도, 꽤나 도도하신 어조인걸.
제국의 고위귀족이라 이건가.
"그래,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냐, 빨간 머리?"
"...나는 오필리아. 시그밀러스 백작가의 둘째, 오필리아 반 시그밀러스야. 보아하니, 아무래도 추가대련 상대를 찾고 있는 모양인데, 저 머저리들은 너랑 싸울 생각이 그다지 없어 보이는걸. 안 그래?"
오필리아가 경멸스럽다는 듯이 신입생들의 태도를 비꼬았다.
그거야 뭐, 나도 보면 안다. 그래서, 자기와 대련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서 나랑 싸워봐야 이기지도 못할 테고, 괜한 관심만 살 테니까.
주목받기 싫어하는 성향 아니었나?
"그래서, 뭐. 나랑 한 판 붙자고? 하긴 마법사 상대도 나쁠 건 없겠지."
"내가? 아니. 그럴 리가. 단지, 상대를 찾고 있다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어서."
오필리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신입생들 쪽을 가리켰다.
"도와준다고?"
"그냥 대련하자고 하면 당연히 거부할 테지. 하지만 한 학기 학비 정도만 나중에 따로 주겠다던가 하면, 돈이 궁한 서민들은 좋다고 받아들일걸? 아카데미의 학비는 저것들에게 꽤 부담이 클 테니까."
"...나도 돈 없는데."
루드비히 후작이 안 챙겨 주거든. 학비는 내 주지만.
"그 정도야 내 쪽에서 내 주지. 대신,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면 말이야."
"부탁?"
오필리아가 목소리를 확 낮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 누구 한 사람을 좀 죽여버리려 하는데, 제국에 딱히 연줄이 없으면서도 유능한 전사가 있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거든."
수풀 속을 기어 다니는 뱀처럼, 음산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살인청부가 목적이라는 건가 지금?
얘도 한 성격 하네.
"...누굴 말하는 건데? 나도 제국에서 사고 치기엔 꽤 곤란한 입장인데."
"승낙한다면 나중에 말해주도록 할게. 그래도, 딱히 큰 사고가 되지는 않을 거야. 그냥 그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사람들을 고르고 있을 뿐이니까."
신뢰하기 어려운 발언인데. 누군지 가르쳐 줄 생각은 없다는 건가.
이 시점의 오필리아가 죽이고 싶어 할 사람이 누가 있지?
......가족?
한번 떠볼까.
"꽤나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하는걸...죽이고 싶고, 영향력을 잘 알고, 죽여도 문제는 없지만 일단 비밀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그러고 보니, 백작가의 '둘째'라고 했었지?"
오필리아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정답인가?
"......의외로 눈치가 빠르네. 야만 민족의 직감, 뭐 그런 거야?"
"형제자매끼리는 원래 다들 서로 죽이려 드는 법이거든."
"하아아아...그래, 맞아. 내 언니, 클레어 반 시그밀러스. 그 가증스러운 여자를 죽이고 싶어."
역시. 예상대로 이것이 정답이었다.
이 때부터 이미 자기 언니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었나.
"실행하는 건 한참 나중이겠지만. 아무튼, 네겐 전혀 문제없을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어때, 승낙하겠어?"
그거라면 뭐, 어차피 시그밀러스 가문은 나중에 처리해야 했으니까.
그게 오필리아를 제대로 육성시키는 전제조건이기도 하고.
"좋아. 승낙하지. 대련 상대들이나 잘 모아달라고. 좀 다쳐도 문제없을 녀석들로."
"그건 안심해도 좋아.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수준만 아니라면. 그럼, 나중에 잘 부탁해."
내 대답을 들은 오필리아가 신입생들 쪽으로 향했다.
...역시 절단까지는 안 되나.
그러면 부수기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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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약속대로 네 명이나 되는 상대를 준비해주었다.
방패와 도끼를 든 사내 하나, 장검을 든 청년 하나.
마법학부에서 남자 둘.
총 네 명의 남자가 나와의 대련을 승낙했다.
여자를 골라오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엔 같은 여자끼리라지만, 아무래도 여학생을 박살 내 놓는 것은 공포보다는 경멸이나 혐오를 더 살 것 같으니까.
이놈들도 실력 자체는 결국 다른 신입생들과 큰 차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한 명을 제외하면, 다들 날 보는 눈빛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마법사 한 명만이 두려움이 아닌 도전적인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뭐. 그래도, 그나마 좀 괜찮아 보이는 녀석이 하나는 있네.
여하튼 다들 저렇게 두려워하는데도 덤벼 올 정도면, 돈이 꽤 궁하다는 뜻이겠지.
정작 이 대련이 끝나고 나면 나보다 돈이 많아진 상태가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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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조의 대련이 모두 끝나고, 추가대련 시간이 되었다.
굳이 첫날부터 이 이상 힘을 빼고 싶지 않다는 걸까, 추가대련에 지원한 것은 날 포함해 열한 명 정도였다.
그나마도 나와 대련하기로 한 인원을 빼고 나면, 고작 여섯 명인가.
"추가 대련을 시행할 인원은 이게 전부인가?"
칼라인이 조금 불만스러운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야 확실히, 미래에 제국의 안녕을 책임져야 할 인재들이 싸움을 망설이는 모습이, 군인 입장에서 보기 좋진 않겠지.
입착 첫날 아침부터. 괜한 피를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신입생들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겠지. 저래 봐야 자기들만 손해니까.
앞으로 벌어질 혼란들을 생각하면 최대한 힘을 키워놓는 편이 좋겠지만, 충고해봐야 저 녀석들이 내 말을 듣지는 않을 테고.
내 쪽을 제외한 6인은 서로 싸우기로 짝을 짓고 왔기에, 대련은 한 번에 한 팀씩,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에 네 번 연속으로 싸우겠다고 자청했다.
그 편이 보다 인상적일 테니까.
"...뭐 좋다. 준비하도록. 바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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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의 여섯 명은 큰 이변 없이 대련을 마무리했다.
에드가는 여전히 치유의 축복을 걸고, 서로 한 대씩 공격을 주고받는 회복력 싸움을 벌였다.
자신의 상처는 축복의 힘으로 계속 치유되니 최종적으로는 상대만 만신창이가 되는, 성기사 특유의 비열한 전법이었다.
마법사 하나와 창을 든 기사학부생의 대결은, 날아오는 마법에 창을 집어 던지고 맨몸으로 달려든 기사학부생이 승리했다.
마법사가 단검을 뽑아들어 저항하기는 했지만, 기사학부생의 주먹을 이기지는 못하더라.
이어지는 마법사 둘의 마법전은 꽤 화려했다.
불화살과 뇌전이 서로 충돌해 폭발하며 불꽃놀이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최종적으로는 한쪽이 마력을 전부 소모하였다며 기권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돌아왔다.
앞서 대련한 놈들을 잘 지켜봐 둔 덕분에, 마법사와 싸울 방법은 대충 감이 왔다.
날아오는 마법은 무기를 던져 상쇄시키거나 하면 되고, 그 뒤에 접근해 근접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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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상대는 튼튼한 원형 방패와 도끼를 든,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상대였다.
이름이 한스라고 했던가. 딱히 기억해 둘 필요는 없겠다만.
내가 밀리아를 박살 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한스가 방패를 치켜든 채 신중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검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땅을 박차고 돌진한다.
화들짝 놀란 한스가 방패를 들이밀어 왔다.
글쎄, 못 막을 텐데.
"카아앗!"
두 팔에 힘을 더해 사선으로 올려친다.
장검이 부러질 듯 휘어지며, 솟구친 참격이 방패를 후려쳤다.
- 콰앙!
폭음과 함께, 박살 난 나무파편이 허공으로 터져나갔다.
손가락 두 개가, 파편 사이에 뒤섞여 점점이 붉은 수를 놓았다.
"크아아아앗!"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 허리로 휘둘러오는 도끼를, 아예 팔을 내려쳐 막아낸다.
콰득, 소리와 함께 한스의 오른팔이 바깥쪽으로 접혔다.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도끼가 맑은 쇳소리를 울렸다.
그대로 몸을 틀며 그의 복부를 걷어찬다.
갈비뼈가 두 개쯤 부러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크헉!"
뒤로 날아간 한스가 피를 토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저 정도는 허용범위겠지.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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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검을 든 청년이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여자 깨나 울릴, 꽤 미끈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아니꼬운걸.
찔러오는 검을 장검으로 받아쳤다.
어디서 검술을 배워오긴 한 것인지, 청년이 검을 비틀며 내 장검을 얽어오려 했다.
그런데 나한테 그런 걸 성공시키려면 나이젤 급은 되야 하는 거고.
그냥 힘으로 짓눌렀다.
"크윽..!"
내 근력에 눌린 청년의 팔이 그대로 몸통 근처까지 밀려났다.
자신의 검에 어깨를 짓눌린 청년의 표정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어깨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건 뭐, 한 팔로도 되겠네.
칼자루에서 왼손을 떼,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고 청년의 안면을 살짝 두드렸다.
계란 껍질이 깨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안면 골격이 딱 의도했던 만큼만 부서졌다.
다리가 풀린 청년이 그대로 픽 고꾸라졌다.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지면에 처박고, 뒤통수만을 보인 상태로 움찔거리며 경련했다.
처박힌 안면 아래로 슬금슬금 피가 배어 나왔다.
하늘로 치켜든 엉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대로 머리를 살짝 밟을까 하다가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한 짓 같아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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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학부의 남학생 하나가 짧은 지팡이를 꼭 움켜쥔 채 걸어나왔다.
열다섯 살쯤 되었을까, 굶주린 호랑이라도 마주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얘는 어린 애니까. 좀 살살 해 줘야겠네.
남학생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크게 흔들었다.
감각이 날카롭게 가다듬어진다.
항마의 축복이 반응하며, 마력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뿔싸...이전화 끝부분에 원래 오필리아 대사까지 있었는데, 그 부분을 자르고 이번화로 넘기는 바람에
다들 오필리아와의 전투를 기대 하실 줄이야......전부 제 불찰입니다!
결국 원래 양민학살이던 4인 전투의, 마지막 한명의 실력을 상향했습니다!
그 결과, 9시에 올리려던 4천자가
다 쓰고 나니 시간은 11시에 글자수는 6천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반씩 나누어, 다음화는 12시 정각에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