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던전 탐색은 3D업종이다
삼, 사십 분가령 내려왔을까, 마침내 지하던전의 밑바닥에 발이 닿았다.
진흙 바닥에 물이 고여 질척했다.
안쪽 공기는 여전히 썩은 내와 습기로 탁하고 끈적거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오물이 폐에 들러붙는 듯한 불쾌감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니, 우리가 내려오던 입구가 저 멀리에서 동전만 한 크기로 빛나고 있었다.
구멍을 통해 스며들던 태양 빛은 우리와 같이 내려오는 것을 포기한 것인지, 중간부터 맥없이 힘을 잃었다.
불빛 한 점 없는 주변은 무척 어두워, 내 시각으로도 윤곽만이 간신히 보일 뿐 사물의 색까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일단 랜턴부터 켤게요."
미네아가 금속 랜턴을 꺼내 불을 지폈다. 화륵, 하는 소리와 함께 주홍빛 불길이 지하를 밝혔다.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던전 벽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축축한 진흙 동굴 저 너머로, 벽돌로 만들어진 아치형의 입구가 보였다.
어두운 입구 너머로 거인이 신음하는 듯한 웅웅대는 바람 소리가 울려왔다.
과연, 저기부터가 진짜 지하 유적이라 이거네.
"...가 볼까."
유적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선두에 서고, 미네아가 중간을, 나이젤이 후미를 맡았다.
신발 밑창에 진흙이 들러붙어 철퍽거린다.
아직 이렇다 할 생물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를 통과하자 공기의 냄새가 변했다.
썩은 흙냄새 대신, 모래사장에서 날 법한 암석 특유의 냄새 사이로,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점점이 배어 나왔다.
유적 내부는 벽과 천장, 바닥까지 벽돌로 이루어진 실내 건물이었다.
사람 너댓명은 너끈히 지나갈 정도로 넓은 복도가 쭉 이어져 있었고, 벽에는 일정 간격으로 드문드문 무언가를 걸어두는 금속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원래는 조명이라도 걸어두는 용도 아니었을까?
"제국 초기의 유적은 아니네요. 그보다 더 오래전, 종족전쟁 시절의 던전이에요."
"그런 것도 알 수 있냐?"
미네아가 슬쩍 위쪽을 가리켰다. 6m쯤 되어 보이는 높이의 천장에 군데군데 옅은 금이 가 있었다.
낡은 벽돌 틈 사이로 모래 먼지가 새어나왔고, 군데군데 이끼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었다.
"실내 복도치고는 지나치게 천장이 높으니까요.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라기엔 공간의 낭비가 심해요. 그 트롤들은 어디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 유적에 살던 종족들의 말예일지도 모르겠네요."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날 보고 주눅 들어 있더니, 정작 던전에 들어오자 꽤 태연해진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쪽 환경이 평소에 익숙하기에 그런 걸까?
담담한 어조로 설명하는 모습에서 직업정신 같은 것이 엿보였다.
"헤벨 남작이 좋아하겠네요. 이런 고대 유적이라면 꽤 가치가 높은 유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랜턴을 빌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이자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이 맛에 이걸 못 끊는 거겠지.
"네. 인류시대 이전의 유적들은 대부분 카롤루스 대제와 열두 기사들의 손에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지하 던전이 우연히 발견될 때 말고는, 그 시대의 유물들은 제국에서 찾기 어렵죠. 이종족들의 나라들에는 남아있을지 모르지만요."
"그렇구만."
미네아와 조용조용히 잡담을 주워섬기며 복도를 나아갔다.
나이젤은 그다지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을 지키며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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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쌍의 뚜벅거리는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린다.
조금씩, 공기의 냄새가 변하기 시작했다.
코끝에 역한 악취와 비린내가 섞여든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나.
팔을 뻗어 미네아를 입 다물게 하고,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눈앞이 확 뚜렷해지며,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저 너머까지 시야가 닿았다.
후각은 옅은 냄새의 차이까지 구분할 정도로 민감해졌고, 천장의 모래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서른 걸음 앞, 복도가 꺾이는 부분 너머.
울리는 바람 소리로 보아 꽤 넓은 공간.
휘몰아치는 소리가 나질 않는 걸 보면 실내에 구조물은 딱히 없겠고.
그 너머에서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피 냄새. 부패한 내장의 냄새. 짐승의 냄새.
...생물체의 기척이나 숨소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트롤에게 죽었다는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인가.
강철 장검을 꺼내 들고 천천히 걸었다.
복도 너머는 강당쯤으로 보이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중앙은 누가 치워버린 것처럼 텅 비어 있었고, 사방의 벽에는 부서지고 풍화된 정체 모를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파편들 사이에,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이 삼 할쯤 남아 널브러져 있었다.
이 방에 가득한 악취는 저것이 근원인 듯, 유독 그 주위에서 강한 냄새가 났다.
미네아와 나이젤을 입구 쪽에 멈추어두고, 미네아에게서 랜턴을 건네받았다.
그대로 조금 가까이 다가가,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일곱 구쯤 되어 보이는 시체들.
아니, 이제는 다 합쳐도 사람 세 명 정도 분량이긴 하겠네.
왼팔과 머리통만 남은 시체.
신체 절반이 납작하게 짓이겨져, 내용물들이 피부를 뚫고 터져 나온 살덩이.
수직으로 짜부라져 키와 어깨 폭이 비슷해진 고깃덩어리.
두 다리를 붙들고 반으로 찢어버린 듯 쇄골어림까지 쪼개져 두 갈래로 널브러진 병사.
그리고 이젠 어느 부위였는지도 알기 힘들어진, 뜯어먹고 남긴 고깃조각들.
시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공포와 통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강한 충격에 으깨진 것인지 남아있는 부위들은 마치 옷자락처럼 흐느적거렸고, 반쯤 썩은 안구가 얼굴 옆으로 흘러나온 채, 입가에 내장마저 튀어나와 있는 참혹한 몰골들이었다.
터져나가고 파헤쳐진 복부는 썩은 내장들이 흘러나와 끔찍한 악취를 흘렸고, 누가 뜯어먹기라도 한 듯 아예 복부가 텅 비어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끔찍해.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삼킨다.
고작 이런 것에 충격받아 구토하는 나약하고 추한 모습은 하샬르에게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
기사로 보이는 시신은 갑옷이 어느 정도 가려 준 탓인지, 그나마 덜 역겨운 모습이었다.
사지는 뽑혀 나가 몸통만 남아 있었지만.
형편없이 구겨진 흉갑의 틈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검게 굳어 있었고, 투구는 압착기에 끼워 넣고 짓누른 것처럼 납작했다.
투구 안쪽을 확인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안쪽'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투구 틈 사이로 흘러나온 검게 질척거리는 고깃조각들만 봐도 충분히 끔찍했다.
시체를 보는 일은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에게 베여 죽은 시체와, 괴물에게 박살 나 죽은 시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전력을 다해 사람을 걷어차도 이런 몰골이 되기는 하는데, 그런 시체는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가 버려 자세히 볼 일이 없었으니까.
일단 주변에서 위험 요소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미네아와 나이젤을 불러왔다.
나만 볼 수는 없지.
...딱히 나만 보기 억울하다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 혹시 내가 놓친 정보들을 알아챌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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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투구를 이 정도로 망가트렸다면, 오거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두 사람의 반응은 꽤나 담담했다.
나이젤이야 그렇다 쳐도, 미네아 역시 악취 때문에 숨을 참을 뿐, 이런 시체 자체는 익숙한 듯 태연했다.
하긴, 이 녀석들은 나와 달리 이런 건 자주 보아 왔겠지.
"오거? 어째서?"
"트롤은 보통 둔기를 사용하기에 뜯겨나가거나 터져나간 시체가 많습니다. 사람을 붙들어 힘으로 짓누르는 것은 전형적인 오거의 사냥법입니다."
"오거라...이거 진짜 둘이서 해결하실 수 있는 거 맞죠? 전 갑자기 돌아가고 싶어지는데요......"
오거가 있을 거라는 나이젤의 말에 미네아가 조금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미네아 양. 오거 하나쯤은 하샬르 님 혼자서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조금 자신이 없어지는 기분인데. 나이젤의 말을 믿어봐야겠지.
기사의 검은 아직 멀쩡했기에 챙겨 들었다.
질 좋은 강철을 쓴 것인지, 아카데미에서 받은 검보다 훨씬 튼튼해 보였다.
아카데미의 장검을 다시 집어넣고, 기사의 검으로 바꿔 들었다.
딱히 시체의 물건을 도둑질하려는 건 아니고, 일이 끝날 때까지 부러지지 않는다면 남작가에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부러진다고 해도, 결국 이 검으로 복수를 해 준 셈이니 죽은 기사도 저세상에서 만족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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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시체가 있던 넓은 공간을 지나, 유적 안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복도 안쪽에는 여러 방향으로 통하는 샛길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나, 대부분은 무너져내려 그 너머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일단 주 복도를 끝까지 탐사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훅 끼쳐오는 비린내와 썩은 내에 코가 마비될 듯한 느낌이었다.
그 강당까지 도망치는 와중에 당한 것인지, 안쪽 복도 여기저기에 터지고 뜯어먹힌 병사들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담배 냄새에 집중하며 역겨운 악취를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 후욱..!
귓가에, 숨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발걸음을 멈추고 의식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복도의 샛길 중 하나, 안쪽 방에서 커다란 생물이 꿈틀대는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주위에 그놈 이외의 다른 기척은 없었다.
아마 무리와 따로 떨어져 혼자 뭘 하고 있나 본데.
귀를 기울이니, 고깃조각을 으적거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래. 식사 중이라 이건가.
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발소리를 죽이며 슬그머니 샛길 안쪽으로 향했다.
샛길 너머로 그것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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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회색 살덩이가, 주저앉은 채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사람의 두 배가 넘는 거구는 근육과 지방으로 울룩불룩했고, 둥그스름한 머리통에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귀는 뾰족했고 코는 납작했다.
눈썹은 없었다.
푹 파인 눈가 안쪽, 붉은 흰자위와 희뿌연 눈동자가 흉칙하게 번뜩였다.
턱주가리엔 뻣뻣한 털이 듬성듬성 돋아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가에선 썩은 핏물이 질질 흐르고, 이빨 사이사이에 끼인 고깃조각이 내쉬는 호흡에 섞여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다리 사이는 너덜너덜한 가죽을 둘러 하체를 가리고 있었는데, 가죽에 달린 팔다리를 보니 아마도 사람 가죽인 듯하다.
가죽의 틈 사이로 불쾌한 사타구니가 슬쩍 엿보였다.
이것이, 트롤인가.
유적에서 뜯어낸 듯한 커다란 바위 몽둥이가 바닥에 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르르르륵...?"
내 냄새를 맡은 것일까, 한창 식사 중이던 트롤이 으르렁대며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일단 한 놈이라. 딱 좋네.
장검을 움켜쥔 채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트롤이 뜯어먹던 시체를 옆으로 던져버리고, 몽둥이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묵직한 포효가 유적을 뒤흔들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쏟아졌다.
...동료라도 부르려는 건가?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겠네.
나는 검을 치켜들고 눈앞의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식사 맛있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