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36화 (36/100)

제 36화

즐거운 던전 토벌

전투를 맞이한 신경이 저릿한 환호를 울렸다.

맥동치는 혈관이 근육을 달구고, 예리해진 감각이 날을 세운다.

시야가 선명하게 맑아진다.

내 머리를 노리는 바위 몽둥이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작은 핏방울까지 포착할 정도로.

날아드는 몽둥이는 터무니없이 느렸다.

아니. 내가 빨라진 것일까?

가볍게 상체를 숙여 피해낸다.

머리 위로 거센 바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 텅 비어버린 몸통을 그어버렸다.

비명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오며, 트롤이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조금 얕았나. 내장까지는 닿지 않았던 듯했다.

광분한 트롤이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른다.

벽과 바닥, 가구 따위에 충돌한 몽둥이가 굉음과 함께 벽톨 파편을 흩뿌렸다.

지저분한 포효와 격렬한 파열음이 방을 울렸다.

지나치게 커다란 동작에, 명백하게 직선적인 궤적.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몸을 틀고, 허리를 숙이고, 때로는 땅을 박차며 피해낸다.

흩뿌려진 벽돌 조각들이 갑옷을 두드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틈을 노려 연신 검을 휘두른다.

팔, 정강이, 허벅지, 복부, 등허리.

트롤의 전신이 날카롭게 갈라져 나갔다.

베여나간 상처에서 뿜어진 피가 내 몸에 닿아, 미지근한 열기를 흘렸다.

"그오오오오오!"

농락당하다시피 휘둘린 트롤이 분노해 울부짖었다.

아가리를 벌리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불쾌해.

옆구리는 어느새 아물어 있었고, 여기저기에 난 검상들도 옅은 증기와 함께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과연, 재생력 하나는 확실히 대단하네. 베인 상처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 이건가.

그래도, 이 정도라면. 별거 아니네.

휘두르는 방식을 바꾼다.

검신에 맞춰 예리하게 베어내는 제대로 된 검술에서, 검을 손상시켜가며 비틀어 뜯어내는 거친 궤적으로.

살덩이가 찢겨 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지 못한 트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건 좀 유쾌하네.

조각난 살덩이가 철퍽이며 바닥과 벽에 들러붙었다.

확실히 단순히 베여나갈 때보다 재생이 느렸다.

방이 어느새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몸도 그렇고.

"가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른 트롤이 몽둥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내리찍었다.

옆으로 굴러 피해낸다.

바닥이 산산조각나며 폭음이 울리고, 갈라진 금이 벽까지 뻗어 나갔다.

저 멀리서, 새로운 기척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둘러야겠네.

그대로 뛰어올라 팔을 밟고, 트롤의 목에 장검을 깊숙이 비틀며 쑤셔 박았다.

목구멍이 파헤쳐진 트롤이 캑캑대며 마구 팔을 휘저었다.

그대로 도약해, 트롤의 머리에 올라탔다.

재생력이 자랑거리라고?

어디, 머리가 뜯겨나가고도 재생할 수 있는지 확인해볼까?

한 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쥐고, 반대쪽 손으로 목덜미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잡아뽑는다.

"흐으아아아아아!"

고기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머리통이 척추째 뽑혀 나왔다.

온천수처럼 솟구친 피보라가 얼굴을 적셨다.

살덩이로 만든 분수대가 되어 비틀거리던 트롤이, 이내 무릎을 꿇으며 엎어졌다.

그래. 머리를 잃으면 죽는다 이거네.

꿈틀대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머리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었다.

"저, 저분...진짜 사람 맞나요...?"

"...단련을 좀 많이 하신 분입니다."

미네아가 질린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뭐 어때서. 어딜 봐도 멀쩡한 사람인데.

"농담할 시간 없어. 더 온다."

복도 너머에서, 트롤 세 마리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이젤도 느끼고 있겠지.

삼 대 일이라...하나하나가 이 정도라면, 별문제 없겠네.

나이젤과 미네아를 방 쪽으로 들여보낸 뒤, 복도 한복판에 선 채 무기를 점검하며 트롤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기사의 검은 과연 질 좋은 물건답게 무리한 움직임에도 크게 뒤틀린 곳 없이 잘 버텨주고 있었다.

허리춤에 꽂아둔 단검들. 여섯 개 모두 문제없고.

등 뒤에 메고 있던 활...그러고보니 활은 쏴볼 일이 없었네.

헤르셀라가 가지고 다녔다는 건 활을 쏠 줄도 안다는 뜻이겠지?

...한번 써 볼까.

검을 집어넣고 활을 꺼내 시위를 살짝 당겨보았다.

상당한 강궁인지, 가볍게 당기는 정도로는 그다지 휘어지지도 않는 튼튼한 물건이었다.

이거라면 얇은 갑옷쯤은 손쉽게 관통해버릴 수도 있겠는데.

트롤에게 쏘면 오히려 꿰뚫고 지나가 버릴 것 같고.

화살 몇 개를 꺼낸 뒤, 화살촉을 바닥에 내리쳐 끝을 뭉개었다.

이러면 살점을 짓이기며 박혀들 테니 트롤 상대로는 이쪽이 낫겠지?

복도 저편에서, 세 마리의 트롤들이 쿵쾅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뭉툭해진 화살을 시위에 매긴 후, 힘을 주어 강하게 잡아당긴다.

끼긱, 거리는 소리와 함께 활대가 크게 젖혀졌다.

의식을 눈에 집중해 트롤들을 노려보자, 그것들의 모습이 확연해졌다.

생김새는 아까 죽인 놈과 별다를 것 없었고, 그나마 턱에 자란 털들의 모습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딱 한 놈만이, 머리 쪽까지 덥수룩한 털로 뒤덮여 있어 꽤 눈에 띄었다.

조준은 감에 맡기고, 활을 겨누었다. 트롤 하나의 머리통을 노린다는 감각으로.

시위를 놓는 순간,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탄환처럼 쏘아진 화살이 트롤의 머리통에 틀어박혔다.

뒤통수 쪽으로 피와 뇌수가 흩뿌려지며, 트롤이 비명을 질렀다.

머리통에 화살이 박힌 트롤이 비틀대는 사이, 나머지 두 마리가 계속해서 달려왔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앞으로 한 발쯤 더 쏠 수 있으려나.

곧바로 화살 한 대를 더 쏘았다. 이번에는 발을 노리고.

트롤 하나가 균형을 잃고 쿵, 하고 엎어졌다.

남은 한 놈이 눈앞까지 달려들었다.

좋아. 이걸로 트롤들이 분산되었다.

남은 건, 화살에 맞은 놈들이 회복되기 전에 맨 앞부터 처리하는 것이다.

이제 삼 대 일이 아니라 일대일을 세 번 하면 되겠지.

트롤을 죽이는 방법은 이미 예습이 끝났으니.

활을 뒤쪽으로 적당히 던져버리고, 검을 뽑아들고 눈앞의 트롤에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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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오오!"

이 트롤은 바위 몽둥이 대신 쪼개진 통나무를 들고 있었다.

나무라면, 검으로 베어도 검이 부서지진 않겠지?

머리를 노리는 통나무를 회전하듯 몸을 틀어 피해낸다.

뒤이어, 바닥에 닿아 일순간 멈춘 통나무를 향해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도끼로 장작을 패듯이, 통나무 몽둥이가 둘로 쪼개졌다.

한순간에 무기를 잃은 트롤이 육중한 다리를 내뻗는다.

잘라낼 수 있다.

확신이 들었다.

두 손으로 움켜쥔 검을 휘둘렀다.

고무뭉치를 가르는 듯한 미약한 저항감과 함께, 트롤의 다리가 끊어졌다.

비명을 지른 트롤이 절단면에서 피를 뿜어내며 엎어졌다.

그대로 목을 쳐내고, 밟아 부쉈다.

경련하던 트롤이 축 늘어졌다.

그 사이, 화살을 뽑아낸 두 마리가 일제히 달려 들어왔다.

휘둘러지는 거병들을 땅을 굴러 피해낸다.

울리는 바람 소리가 마음을 고양시킨다.

양 쪽에서 연달아 공격해오니, 피하느라 바빠 제대로 반격할 틈이 애매했다.

일단, 한 놈부터 확실히 처리하자.

바닥을 박차고 벽으로 뛰어, 다시 벽을 박차고 천장에 닿는다.

내 움직임을 쫓아오듯 벽을 후려친 트롤들의 무기가, 벽돌을 부수고 안쪽 흙을 파헤치며 일순간 정지한다.

그대로 천장을 박차고, 트롤 하나의 머리통에 검을 세로로 쑤셔 박아 마구 휘저었다.

머리카락이 수북하던 놈이었다.

뇌가 고기죽처럼 갈려나간 트롤이 눈을 뒤집고 침을 질질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트롤이 내 쪽으로 몽둥이를 휘둘러왔다.

머리채를 붙잡은 채, 몸뚱이를 뒤로 타넘으며 아카데미의 장검을 뽑아 뒷목을 갈랐다.

경추가 끊어져 반쯤 덜렁거리던 트롤의 머리통을, 다른 트롤의 몽둥이가 박살 내었다.

기사의 검도 같이 조각났다. 조금 아깝네. 잘 써먹었는데.

땅에 내려온 순간, 거대한 발등이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착지의 빈틈을 노리듯 휘둘러진 발차기.

피하거나 제대로 반격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이젤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내 근력이 트롤 이상이라 했었지.

두 팔을 뻗어 트롤의 발차기를 그대로 받아내었다.

둔중한 타격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몸이 뒤쪽으로 수 미터쯤 쭉 밀려났다.

파헤쳐진 벽에 등이 맞닿았다.

강렬한 충격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전해진다.

통증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이게 진짜로 막아지네. 내 몸이지만 어이가 없다.

생각해보니 내 몸이 아니기는 하지만.

트롤 역시 사람이 그걸 막아낼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날 쳐다보았다.

그 눈알에 단검을 던져 터트렸다.

재밌네.

사타구니 쪽을 향해 단검 하나를 더 내던졌다.

트롤의 입에서 하늘까지 닿을 고음이 터져 나왔다.

힘없이 엎어져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떠는 트롤의 목을 끊어내었다.

눈에 박힌 단검 두 자루만 회수하고, 사타구니에 박힌 단검은 저승길 선물로 남겨두었다.

피와 체액으로 더러워진 단검에 굳이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거든.

"사람 아닌데요...?"

미네아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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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피를 닦아내고 계속 나아갔다.

트롤이 여섯 마리 정도일 거라고 했던가.

그럼 이제 두 마리 남았겠네. 그리고 오거가 한 마리.

더 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중간에 큰 공간이 하나 더 나왔기에, 잠시 둘러보았다.

아마도 아까의 트롤 셋이 지내던 공간인지, 여기저기에 뜯어먹힌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구석에선 배설물 냄새가 났다.

감각이 예민하다는 것도...마냥..좋은 건...아니네.....

둘을 재촉해 서둘러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이미 후각이 마비된 것인지, 무덤덤한 상태였기에 좀 억울했다.

삼십 분쯤 더 걸었을까. 중간에 간단히 한 번 휴식하며 미네아가 건네준 육포 조각을 씹었다.

주변 냄새 때문인지, 그다지 식욕이 없어 조금 뜯어먹고 말았다.

나이젤과 미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육포를 씹어먹었다.

공기부터 더러운 이곳에서, 참 잘도 먹는다.

...힘 쓰는 일은 내가 다 한 거 같은데. 왜 너희가 더 열심히 먹냐.

조금 불쾌했던 간이식사를 마친 뒤 탐사를 계속했다.

중간에 샛길 하나와 방이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도를 알기 힘든 풍화된 오브제 같은 것들이 방 안에 들어차 있었는데, 미네아 말로는 저런 것들이 꽤 돈이 된다고 한다.

어차피 전부 남작가에서 소유하기로 계약되어 있었기에, 그림의 떡이긴 했지만.

조금 아쉬워하는 눈으로 방을 바라보는 미네아를 재촉해 계속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너머에서 다시 생물체의 기척이 느껴졌다.

복도 멀리 보이는 커다란 문 양옆을, 트롤 두 마리가 지키고 서 있다.

"...아마 저 뒤쪽이 마지막 방일 거예요."

미네아가 소곤거렸다.

"어떻게 아는데?"

"지금 저희가 걸어온 경로를 보면, 입구부터 큰 사각형을 그리며 점점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거든요."

미네아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각진 소용돌이 모양을 그렸다.

"사각형 나선 구조의 던전은, 보통 정가운데에 핵심 시설이 있어요. 이 경우엔 저곳이 핵심이겠죠."

"아 그래? 역시 전문가가 있으니 편한걸. 그 말대로라면 저쪽 놈들만 다 해치우고 나면 바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겠네."

경험자다운 조언이었다.

그렇다면 방 안쪽에 몇 놈이냐 있느냐가 문제인데...

거리가 좀 있어서 애매하긴 한데, 아마 한 놈인 것 같긴 했다. 트롤보다 커다란 기척인 걸 보면, 오거인가.

"그러면, 일단 트롤부터 이쪽으로 끌어와 잡자. 물러나 있어. 랜턴 끄고."

"네."

나이젤과 미네아를 뒤쪽으로 보내고, 일부러 뚜벅이는 소리를 냈다.

복도에 울린 소리를 들은 트롤들이 서로를 쳐다보고 그르렁대더니, 이내 한 마리가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나는 복도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트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내 근처까지 다가온 트롤이 사람 냄새를 맡은 것인지, 제자리에 멈춰 코를 킁킁대었다.

지금이다.

바로 트롤의 약점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쏘아진 단검이 트롤의 하체 가리개를 뚫고 그 안쪽에 틀어박혔다.

구슬픈 비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엎어진 트롤에게 달려든다.

고개를 든 트롤이 강렬한 증오를 담아 날 쏘아보았다.

뻗어오는 팔을 가볍게 피하고, 검으로 끊어낸다.

끼긱, 하고 검신이 살짝 틀어지는 소리가 났다. 역시 아카데미 양산품은 얼마 못 쓰겠네.

그대로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고든 검신이 목 끄트머리에 걸렸다.

손을 뻗어 목을 뜯어낸 뒤 머리통을 바닥에 내리쳤다.

트롤의 머리통이 날계란처럼 으깨졌다.

동포의 비명을 들은 것인지, 다른 한 마리의 트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 너머로, 거대한 돌문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이 슬쩍 보였다.

슬쩍, 장검을 살펴보았다. 벌써부터 날이 무디어지고 실금이 가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저 트롤 놈을 잡고 나면 부러질 것 같은데.

일단 남은 단검들을 내던져 보았지만, 트롤 역시 학습능력은 있는 것인지 다리 사이를 몽둥이로 가려 단검을 막아내었다.

단검들이 몽둥이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차라리 튕겨 나갔다면 모를까, 저래서야 바로 회수하는 건 무리겠네.

그냥 때려잡을 수밖에 없나.

몽둥이를 굴러 피하고, 오금을 걷어차 무릎 꿇리고, 그대로 뒷목을 검으로 내리쳤다.

검이 목뼈를 반쯤 끊어내다 부러졌다. 트롤이 피거품을 흘렸다.

"하아아아아!"

두 손을 깍지처럼 움켜쥐고 크게 들어 올려, 그대로 머리통을 내려친다.

폭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트롤의 목뼈가 끊어지며 반쯤 으깨진 머리통이 바닥에 처박혔다.

손날 부분이 좀 많이 얼얼한데.

슬쩍 살펴보니 박살 난 뼛조각들이 장갑을 뚫고 손날에 박혀 있었다.

뼛조각을 적당히 뽑아내며, 이제 완전히 열려버린 문쪽을 쳐다보았다.

문틈을 붙잡고, 거대한 괴물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우둘투둘하고 불그스름한 피부를 가진 근육질의 괴물.

트롤에 비해 키는 크지만, 지방이 적은 근육질의 몸 탓에 외형 자체는 오히려 더 가늘어 보였다.

머리와 턱, 가슴팍, 어깨와 손목, 사타구니와 발목이 갈색 털로 뒤덮였고, 두 손에는 거대한 양손도끼를 쥐고 있다.

애초부터 거대 아인종이 사용할 것을 전제로 만든, 제대로 된 금속 도끼였다.

눈가엔 두 쌍의 뿔이 돋아나 있고, 길게 찢어진 입이 귓가 근처까지 닿아 있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얼기설기 돋아난 이빨들 사이로 긴 혀가 날름거렸다.

...트롤보다 열 배는 흉악하게 생기긴 했는데, 그래도 큰 차이는 없다고 했었지.

포효가 대지를 울린다.

아이멜라의 검을 뽑아들었다.

푸른 광택이 맴도는 검신이, 제 주인을 환영하며 맑은 울림을 토했다.

칼자루가 손아귀에 착 달라붙었다.

딱 봐도 급이 다른 수준의 명검이니, 설마 부러지진 않겠지.

나는 장검을 늘어뜨린 채, 괴물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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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치는 도끼가 지면을 박살 낸다.

산산조각난 벽돌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지진과도 같은 진동이 일어난다.

일순간 비틀대는 몸을 바로잡고, 그대로 달려든다.

머리 속에선 오거에 대한 나이젤의 조언을 떠올리며.

- 오거. 트롤보다 재생력은 약하고, 신체능력은 더 뛰어남. 이길 수 있음.

솔직히 조언이라기엔 좀 너무 대충인 내용이긴 한데. 그래도 도움은 되니까.

오거의 몸놀림은 그 근육이 장식이 아니라는 듯, 꽤 재빨랐다.

도끼날이 벽과 천장, 바닥을 가리지 않고 사방을 갈아엎으며 성난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저거에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건 좀 곤란하겠고, 소모전으로 가볼까.

도끼를 피해 미끄러지듯 다리 쪽으로 파고들며, 검을 스치듯 휘둘렀다.

물을 가르는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파고든 검끝에 오거의 종아리가 깊게 파였다.

핏줄기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럴 필요가 없겠네.

긴장감이 싹 사라졌다.

처음으로 휘둘러 본 아이멜라의 검은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명검이었다.

예리함도, 탄성도, 강인함도.

이 검에 비하면 아까까지 쓰던 기사의 검은 고철이나 다름없다.

아카데미의 양산품 장검은 애들 장난감 수준이고.

역시, 이 검을 남들 눈에 보이는 일은 어지간해선 피해야겠다.

아이멜라의 정체 이전에, 검의 성능만으로도 온갖 잡놈들이 들러붙을 것 같으니.

...미네아에게 랜턴을 꺼 두라고 해서 다행이었네.

그 여자의 시력으로는 이 어둠 속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진 못할 테니.

"그으으으...!"

신음을 내뱉은 오거가 주먹을 뻗어왔다.

몸을 옆으로 꺾어 피하며, 주먹을 향해 검신을 곧게 눕혀 들이댔다.

약간 둔탁한 감각과 함께 검신이 뼈를 파고들어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오거의 팔이 팔꿈치까지 반으로 쪼개졌다.

골수와 피에 적셔진 검신은 이 하나 나가지 않은 채, 시리게 번뜩였다.

졸지에 팔이 세 개가 된 오거가 사방으로 피를 흩뿌리며 고통스럽게 날뛰었다.

한 팔로 휘두르는 도끼는 이전만큼의 위력도, 정확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오른쪽 어깨를 갈랐다.

반으로 잘려 있던 팔이 피를 뿜으며 아예 떨어져 나갔다.

오거가 공격을 멈추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왼 손목을 잘라냈다.

도끼가 바닥에 떨어져 묵직한 금속음을 울렸다.

몸통으로 직접 부딪혀오기에, 옆으로 굴러 피했다.

오거의 몸이 벽을 부수며 틀어박혔다.

천장이 무너지며 벽돌들이 쏟아졌다.

적당히 팔로 쳐 내며 신음하며 몸을 빼내는 오거에게 다가갔다.

나를 떨쳐내려는 듯 휘둘러진 팔뚝을 상체를 숙여 흘려보내고, 오거의 배를 가로로 갈라버렸다.

뱃가죽이 쩍 벌어지며 핏물과 함께 찢어진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반쯤 소화되어, 흐물흐물하게 녹은 사람 파편들이 바닥을 적셨다.

내장에 들어찬 오물들과 소화액에 뒤섞인 시체에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한 발짝 물러나 흘러내리는 오물들을 피했다.

허리를 틀어가며 전력을 다해 단검을 내쏘았다.

손목 없는 외팔로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오거의 미간을 향해.

손잡이까지 틀어박힌 단검이 아예 머리통을 뚫고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오거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축 늘어졌다.

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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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를 처리한 뒤, 방 안쪽을 확인해보았다.

거대한 공간 양 쪽에 기묘한 부조가 새겨진 기둥들이 두 줄로 쭉 늘어서 있었고, 안쪽에는 의자와 비슷한 모양의 바윗덩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크기를 서너 배쯤 키운 돌로 만든 가구들이 반쯤 부서진 채 흩어져 있고, 방 한구석에는 거인 사이즈에 맞는 무기나 갑옷 등도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아까 그 오거의 무기도 이쪽에서 하나 꺼내온 것 같은데.

갑옷을 입지 않았던 것은 갑옷을 입을 정도의 지성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려나.

다른 곳으로 이어진 듯한 통로는 전부 무너져있어 확인이 불가능했다.

어차피 여기가 던전의 중심이라 했으니, 기껏해야 별실 같은 것들이겠지.

적당히 탐색을 마치고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김에 아까 박살 난 기사의 검을 주워 기사의 시체가 있던 곳에 되돌려주기로 했다.

복수는 잘 해주었으니 이걸로 만족하겠지?

"훌륭했습니다. 몬스터들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겠군요."

미네아가 건넨 천으로 적당히 피를 닦아내며 복도를 걷던 도중, 나이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래, 싸워보니 별것 아니더라. 재미있기는 했지만."

"예. 전보다 움직임도 훨씬 좋아지셨으니 이제 대인전 부분만 좀 더 보강하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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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줄사다리를 올라 영주성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줄이 끊어져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따지자면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에게 다행인 일이지.

하루도 안 되어 일을 끝마쳤다는 보고를 들은 집사가 놀라며, 우리를 헤벨 남작에게 안내했다.

헤벨 남작은 살이 두툼하게 오른 돼지처럼 생긴 중년인이었다.

남작은 우리의 보고를 믿지 못 하겠다 라느니, 던전에서 몰래 빼돌린 물건은 없느냐느니 하며 계속 꼬투리를 잡아댔다.

보상 역시 미네아가 적당한 금액을 제시했지만, 확인하기 전엔 줄 수 없다느니,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니 하며 계속 말을 돌려대었다.

내가 그 머리통을 내려찍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나이젤이 먼저 노성을 토했다.

지금 란덴부르크의 기사를 모욕하는 것이냐며 길길이 날뛰는 나이젤 덕분에, 적절한 보상을 받아내며 남작령을 떠날 수 있었다.

선수금 2골드, 트롤이 한 마리당 5골드, 오거가 10골드.

도합 42골드면 두세 달은 충분히 쓰고도 남을 액수였으니.

제도에 도착해 미네아에게 고용비를 건네주고도 41골드가 남았다.

1골드면 너무 짜게 준 것 아닌가 싶긴 한데, 오히려 별로 한 일도 없이 이 정도면 후하게 받은 것이라며 좋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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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만에 재회한 특별관의 침대가 다시 나를 반겨주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따뜻한 물로 씻은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전투신은 쓰면서 너무 즐거워서 억제가 안되네요...!

상세하게 묘사해서 그렇지, 실제론 보통 2~3합에 한마리씩 잡았어요.

그것도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익숙해져서 나중엔 거의 장난치듯이 죽이네요!

트롤 완전 잡몹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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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사다리를 끊고 싶은 충동이 엄청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래쪽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위에선 전혀 모를 텐데

다짜고짜 사다리를 끊는 것도 이상하더군요...

게다가 이 이상 곁다리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 또한 옳지 못한 일...!

그래서 남작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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