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37화 (37/100)

제 37화

역시...안에는 아무것도 없네

다음 날 아침, 특별관의 식당에서 아샤와 재회했다.

"아, 오랜만이네요 하샬르!"

아샤가 아침 식사로 나온 샐러드와 잘 구운 베이컨을 오물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익숙한 모습에 살짝 미소가 배어 나왔다. 그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나이젤이 아침 식사를 주문하러 갔다.

"일주일 만이네요. 모험가 일은 재미있었나요?"

"재미는 있었는데 코가 괴로웠어. 던전은 냄새가 심하더라."

지하던전이라 유독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온갖 악취가 뒤섞인 끔찍한 공기였다.

앞으로 의뢰를 받을 일이 생긴다면 가급적 던전보다는 숲이나 이런 곳을 선택하고 싶어질 정도로.

내가 너무 민감한 걸까? 나이젤과 미네아는 태연했으니 그게 보통일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그 녀석들은 나처럼 후각이 예민하지 않으니 그런 거겠지.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한다면, 결국 던전에서 벗어날 순 없으니까.

마음 같아선 전부 데미안에게 맡겨버리고 싶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는 좀 불안하고.

게임 상에서도 컨트롤이 꼬이면 픽 죽어버리는데, 현실이 되었으니 더하겠지.

현실은 재시작할 방법이 없으니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그래요? 그러면 나중에 휴대용 정화장치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어? 반인종은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어...?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우리 사이니까 10골드만 받을게요!"

...10골드?

"...선물이 아니라 판매였어?"

"저도 먹고는 살아야죠. 재료값 빼면 그다지 남지도 않아요!"

아샤가 생글생글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들고 눈앞에서 흔들었다.

...좀 많이 익숙한 대사인데. 바가지 씌우는 장사꾼들이 항상 저런 소리를 했었지.

뭐, 그래도 반인종의 기술력이 들어간 물건에 저 가격이면 오히려 터무니없이 싼 것이 맞다.

단순한 장검조차 수십 골드를 받아먹는 종족이니까.

"그래. 그럼 나중에 하나 만들어 줘."

확실히 냄새만 아니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으니.

잔인한 광경이야 내가 흥분해서 저지른 짓들이 더 잔인하다 보니, 구역질 나는 냄새와 달리 금방 익숙해지더라.

이게 심리적 거부감과 신체적 거부감의 차이일까?

적어도 예전의 나는 그런 것들을 보고도 태연할 정도로 비위가 좋지는 않았는데.

...던전에서 처음에야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분명 토악질 나는 역겨움을 느꼈지만, 트롤 두세 마리를 사냥한 이후로는 그런 감상조차 없어졌었지.

싸우는 방식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딘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날뛰며 즐거워했고.

딱히 이성을 놓아버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동안의 행적을 돌이켜보니 문득,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심리란 호르몬의 작용, 정신은 결국 육체를 따라간다 했었지.

영혼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해도, 이 육신은 결국 헤르셀라의 몸.

싸울 때마다, 내 정신이 조금씩...그러나 확실히 변질되고 있다는 뜻이겠지.

거부감에 소름이 돋으려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킨다.

침착하자. 거꾸로 생각하는 거야.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육신의 과격함과 폭력성에 물들지 않았다면, 내가 과연 던전을 지장 없이 돌파할 수 있었을까?

그럴 리 없지.

트롤 이상의 신체능력이야 그대로이니 아마 이길 수야 있었겠지만,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기진 못했겠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트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적들이 계속 나타날 텐데, 어차피 예전 같은 정신으로는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니 이 변화를 변질이 아닌, 적응으로 받아들이자.

내가 이 세상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아침식사가 도착했기에 생각을 멈추고 식사에 집중했다.

고소한 베이컨에 아삭아삭한 양상추, 과즙 가득한 토마토의 조합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자아에 대한 고민으로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정도로

----

"그래서, 일주일간 뭐 특별한 일은 없었지?"

"딱히요? 다쳤던 학생들도 치료가 끝나서 다들 복귀했고, 그 뒤로는 대부분 이론강의라 별일 없었어요. 매일 출석한 건 아니지만요."

그거야 뭐, 아샤도 굳이 기마전투나 신앙 수업 같은걸 들을 리는 없겠지.

말은 타지도 못할 테고, 반인종의 종교는 제국과는 다르다고 했으니.

"어제가 적성체 강의였을 텐데, 그건 어떻게 되었어? 다음 주쯤에 실습을 나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목적지는 정해졌나?"

"아뇨? 목적지는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강의 내용이 코볼트와 트롤에 대한 것이었으니, 아마 그런 녀석들이 나오는 곳이겠죠. 하샬르는 가볼 거에요?"

"일단 그러려고 생각 중인데, 아샤 넌 생각 없나 봐?"

"트롤이야 고향에서 몇 번 잡아 봤거든요. 그때는 랜스를 쓰지는 않았지만요."

하긴 굳이 랜스를 들고 돌진하는 전법을 고집하는 아샤가 특이한 거지, 반인종은 원래 원거리 화력전으로 싸우는 종족이니까.

랜스를 쓰지 않았다면 오히려 잡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강의야 이제 적성체 강의랑 대인전투 정도만 듣기로 했으니, 오늘은 굳이 강의에 나갈 필요가 없어 보였다.

마침 숙소에 주문했던 건틀릿이 도착해 있었다.

서릿발을 본떠 만든 강철 건틀릿.

아카데미산 장검의 내구도를 보면, 이것도 대여섯 번 쓰면 부서질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일단 갑옷이니 칼보단 오래 버티겠지.

모처럼이기도 하니 외출을 하기로 했다.

돈이 생겼으니 담배도 좀 사 두고, 지하수로도 좀 조사해 두려고.

...전부터 조사한다 조사한다 해 놓고, 정작 시간이 안 나 시작을 못 했었으니.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별 이상 없을 것 같긴 한데.

----

잡화점에 들러 담배를 한가득 샀다. 무려 10골드 어치나.

잡화점 주인이 머리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이젤의 눈빛이 조금 따가웠지만 무시했다. 내가 번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 거니까.

나이젤에게 지하수로를 구경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지하수로를 구경하고 싶으시다고요? 굳이 그곳을...?"

나이젤이 미심쩍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긴 수도까지 와서 굳이 하수도를 구경하겠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은 드물겠지.

딱히 아직 마물이나 몬스터 같은 것이 나오는 곳도 아니니까.

"듣기로는 제도의 지하수도는 거대한 미로 같은 건물이라 들었거든. 옛 유적이라는 말도 있었고. 카`하르는 그런 지하유적이 없다 보니 한 번쯤 구경해보고 싶었어. 안될까?"

"거대한 지하유적이라면 헤벨 남작령에서 보신 것이 아니신지..."

"그건 그냥 냄새나는 폐허였잖아. 난 좀 제대로 된 걸 보고 싶다고."

적당히 변명거리를 주워섬겼다.

나이젤은 납득하지는 않은 기색이었으나,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젤의 신분 덕분에 지하수로에 들어가는 일은 별문제가 없었다.

----

지하수로.

제도 엑스라샤펠이 아직 평범한 도시였던 시절부터, 그 지반 아래에 위치해 있던 거대한 지하공간이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건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하공간을 탐사한 카롤루스 대제는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오랜 대공사 끝에, 이곳은 마침내 제도의 생활을 책임질 거대한 수로가 되었다.

찾아가본 지하수로는 예상 이상으로 청결하고 웅장했다.

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무수히 많은 기둥 사이로, 길고 넓은 수로들이 강처럼 펼쳐져 있다.

4m쯤 되는 높이의 천장에 기둥마다 마력등이 걸려 있었고, 바닥도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것인지 벌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도히 흐르는 풍부한 지하수가 제도 전제가 사용하고도 남을 물을 공급해주고, 오염되어 흘려보내진 물들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수로 옆에는 사람이 지나다니기 위한 도로가 미로처럼 깔려 있었다.

"의외로 냄새 같은 건 안 나네?"

"마탑의 마법사들이 대규모 정화마법을 설치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나이젤의 말대로, 정화마법 덕분인지 드넓은 수로를 흐르는 물 역시 꽤 맑고 깨끗해 보였다.

굳이 떠서 확인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보았지만, 수로를 헤엄치는 물고기들 말고는 이렇다 할 기척은 없었다.

지하로에 털 같은 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고. 역시, 아직은 제도까지 숨어들진 않은 건가?

두어 시간쯤 돌아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기에, 포기하고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수로 아래쪽에도 지하유적이 계속 이어진다고 하지만, 그곳은 출입금지 지역이라 들어가 볼 수 없었고.

나중에 출입금지가 의미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려나.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에도 한번 찾아가봐야 할 텐데. 한번 써먹은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고, 나이젤을 떼놓고 다니기도 힘들겠지.

골치아프네.

그래도, 아직은 괜찮겠지.

두 달 반은 남았으니까.

=======[지하수로]========

"...냄새가 사라졌군."

적막해진 지하수로의 벽 너머로, 조용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르렁대는 숨소리가 섞인, 거칠고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던데, 우리 존재가 발각된 건가? 인지 방해 마법은 완벽할 텐데."

다른 이가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으르렁대듯 내뱉는 목소리.

약간의 불안감이 섞여 있는 어조였다.

"그렇다면 기사들을 총동원해 수로를 이 잡듯 뒤졌겠지. 냄새는 두 명뿐이었으니 그건 아닐 거다."

"...그런가. 뭐,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본토에서 다음 달로 거사 일을 앞당기라는 전언이 왔으니."

두 목소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텅 빈 수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은 수로의 물고기들뿐이었다.

"앞당겨? 어째서...? 전력이 전부 모이기엔 아직 이른데."

"카`하르 놈들이 결국 제국에 고개를 숙였지 않나...본토도 애가 탄 거겠지."

첫 번째 목소리가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르렁거렸다.

"카`하르...역시, 결국은 인간. 같은 인간들 편에 붙기로 했나...듣자하니 그 왕녀까지 여기 와 있다던데."

"최우선 목표 중 하나다. 생포하거나 반드시 죽이라고 하더군. 제국과 카`하르의 연결고리를 끊어놓기 위해서 말이지."

"...재미있는 사냥이 되겠군."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

사흘 동안, 나이젤과 대련하거나 칼릭스와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한 번, 도서관에 가서 아이멜라 메디안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열두 기사들의 경우 대부분 이름만이 전해질 뿐, 그 가문의 후예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처럼.

다음날, 다시 대인전투 강의일이 돌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다들 식사는 마치셨겠네요.

어젯밤 선작이 600을 넘었어요!

다 여러분들 덕분이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