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화
개전
"잠깐만. 싸우기 전에, 일단 이야기 좀 하지."
당장에라도 날 들이받을 기세였기에, 황급히 말렸다.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일 테니까.
죽일 자에게도, 죽을 자에게도.
"이야기? 카하르가, 적을 앞에 두고 대화를 입에 담는다고? 농담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크누트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어깨마저 조금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진심인데. 이래 보여도 난 평화주의자거든."
"...헛소리를."
어깨에 걸친 도끼날이 달빛에 물들어 검푸른 광택을 번뜩였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실인데.
내가 저지르는 모든 짓들은, 내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들이었으니까.
"하긴 그야 뭐, 내가 그쪽이었어도 믿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정말 쓸데없는 싸움은 딱 질색이라고."
"쓸데없는...싸움이라......"
크누트가 낮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날 이렇게까지 증오하는지는...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나한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미안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어. 혹여 네 동족들에게 사과하길 원한다면, 그래. 사과해줄 의향도 있고."
슬쩍, 장검의 검자루에 오른손을 올렸다.
아이멜라의 검은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받아 온 검이었다.
만약 싸우게 된다면, 일단은 이 검부터 써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대화로 넘어갈 수는 없겠냐? 굳이, 얼굴도 모를 동족의 원수를 갚겠답시고, 서로 피를 보아야만 하나? 대답해 봐, 데인인 크누트."
내가 널 죽이지 않아도 될 이유를 줘.
"굳이, 피를, 보아야만 하냐고?"
이를 악문 크누트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휘몰아치는 살의가 숲을 찍어눌러, 벌레들조차 숨을 멈춘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굳이, 피를 보아야만 하냐고...!"
내리비치는 달빛이 이지러졌다.
"역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군...그래. 네놈에게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이었겠지...!"
크누트가 몸을 떨며, 악문 이빨을 드러내고 도끼를 겨누어왔다.
웅크린 채,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깊디깊은 원한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검게 썩어버린 증오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젠장할.
설마했는데, 직접적인 피해자였나.
...대화로 해결할 가망은 없어 보였다.
역시, 어쩔 수 없는 걸까.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서늘한 밤 공기를 깊게, 아주 깊게 들이마셨다.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아니라, 날 위해서 말이야.
나는 강철 장검을 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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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아아앙!
휘둘러지는 도끼가 검은 잔광을 남기고, 받아치는 장검이 울음을 토한다.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격렬한 충돌음에, 잠에서 깨어난 숲이 술렁였다.
처음부터 전력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실력을 감추고 지냈듯이, 크누트 역시 본래 힘을 드러내지 않았을 가능성도 꽤 높았으니.
내지른 장검이 도낏자루에 작은 흠집을 남기며 스쳐 지나가고, 막아낸 도끼날이 장검의 날밑을 파고들었다.
확실히, 전과는 달리 특별히 준비한 무기인지 일격일격이 강인하고 묵직했다.
결국 받아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내 쪽이 더 강하니까.
장검을 옆으로 휘둘러 내리 찍히는 도끼를 걷어낸다.
도끼날이 검신을 거칠게 긁어 뭉개며, 듣기 싫은 소음을 토해냈다.
불똥이 폭포수처럼 튀어 올라, 갑옷을 적시며 사그라진다.
"하앗!"
찌르듯 내뻗은 내 발끝을, 크누트가 옆으로 굴러 피해낸다.
연이어, 내 발목을 노리고 휘둘러오는 도끼를, 다리를 들어 피하고 그대로 크누트를 걷어찼다.
도낏자루를 끌어당겨 간신히 막아낸 크누트가 미끄러지듯 튕겨 나갔다.
뒤를 쫓아 내던진 단검이 도끼날에 막혀 빗겨나갔다.
단검에 스친 크누트의 왼뺨에서 옅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아앗!"
도약하며 검을 찔렀다.
검자루 끝에 왼손바닥을 대고, 밀어내듯이 힘을 더하며.
그대로 명치를 꿰뚫어버릴 생각이었다.
크누트가 발밑의 시체를 걷어찼다.
반쯤 쪼개진 코볼트의 시체가, 검게 굳은 핏가루를 흩뿌리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왼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쥐고, 공을 쳐 내듯 검면으로 후려쳐 치워낸다.
쳐날려진 코볼트가 팽이처럼 회전하며 살점을 흩뿌렸다.
도끼날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검신을 되돌려 막아냈다.
콰각, 소리와 함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놈도 스무 합을 버텨내질 못하네.
"아이샨기오르으으으!"
"카아아아앗!"
크누트가 포효하며 한층 기세를 높였다.
나 역시 날카로운 기합을 내지르며 맞받아쳤다.
도끼와 장검이 미친 듯이 춤춘다.
고막을 찢어발기는 금속의 비명이 쉴 새 없이 귓가를 두드린다.
스쳐나간 공격들이 서로의 갑옷을 찢으며, 쇳조각을 흩뿌렸다.
검신이 점점 깨져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검술을 감출 여유는 없었다.
제대로 흘려내지 못하면, 곧바로 검이 부서져 버릴 공격들이었으니.
무거운 힘을 담았음에도, 내 검을 따라올 정도로 빠른 연격.
거기에, 내 공격을 버텨낼 정도로 강고한 무구까지.
확실히, 입학시험에서 보여 준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제국 검술...! 감히, 카하르 따위가!"
내 검술을 알아본 크누트가 한층 더 분노했다.
그 얼굴은 격정과 원독으로 일그러져, 광분한 야수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분노한 채 휘두르는 공격은 허점이 많아지는 법.
감정이 실려 크게 휘둘러오는 공격에, 명백한 빈틈이 드러나 있었다.
내뻗은 검을 엮어 그대로 옆으로 비틀었다.
"이런...!"
크누트의 상체가 휘청이며, 머리통이 훤히 드러났다.
본능이 송곳니를 치켜세웠다.
"캬아앗!"
손끝을 세워 탄환처럼 쏘아낸다.
일렁이는 살의가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크누트가 황급히 고개를 틀어 피해냈지만, 사슬갑옷이 찢어지며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크윽!"
반격하듯 하단에서 올려치는 도낏자루를 붙잡았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건틀릿이 조금 뭉개졌다. 손끝 부분은 아예 평평하게 변해 있었다.
그대로, 장검을 내려친다.
갈라지는 바람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휘두르는 기세만으로 검신이 꺾여나가며, 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한 팔 뿐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힘을 실어 휘두른 일격이었다.
크누트가 도끼를 놓고 다급하게 뒤로 굴렀다.
유리창 수십 개가 동시에 깨져나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핏줄기가 솟구쳤다.
튀어오른 핏방울이 내 흉갑을 물들였다.
바닥을 굴러 일어난 크누트가 고개를 숙여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길게 찢어진 사슬갑옷 사이로, 대각선으로 파인 검상이 엿보였다.
딱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역시, 조금 얕았나.
박살 나 손잡이만 남은 장검을 던져버렸다.
태세를 가다듬은 크누트가 다시 도끼를 치켜들었다.
"이치를 벗어난 힘에, 더하여 제국 검술이라......그래, 이 정도 어려움은 예상했다...!"
"어렵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지그래? 마지막 충고야."
허리춤에서 흔들거리는 아이멜라의 검에 손을 올렸다.
이 검이라면 내 힘을 온전히 싣고도 부서질 걱정 없이 휘두를 수 있다.
아마도, 저 도끼마저 베어내겠지.
"경고라...그럴 수야 없지. 내 맹세는 아직 첫 발걸음조차 내딛지 않았으니까."
중얼거리던 크누트가 땅에 박혀있던 창을 뽑아들었다.
도끼와 마찬가지로, 검은빛이 도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창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다."
창을 치켜든 크누트가 내 쪽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분노만이 아닌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보듯이 흐려져 있었다.
옛 과거를 추억하는 노인의 눈처럼.
"뭘 물어보려고?"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우지? 무엇 때문에, 검을 휘두르며 그 많은 살육을 벌였나."
생각치도 못한 질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싸우냐고?
그걸 알면,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하나?
...이제 와서?
굳이 대답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다. 싸우고, 죽이지 않으면, 결국 내가 죽게 될 테니까."
오직 그것만을 위해 싸워왔다.
총을 들고 포성 속을 기어 다녔던 과거에도, 검을 들고 피바다를 헤엄치는 지금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살아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까.
"살기 위해서, 라고...?"
크누트가 어금니를 부서져라 갈아댔다.
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타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던 분노가, 이젠 끝을 모르고 화산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역시, 네놈은 전사가 아니다...아니, 사람조차 아니야...!"
치켜든 창이 격노를 버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려댔다.
한층 짙어진 살의가 몸을 찔러왔다.
나는 검자루를 움켜쥔 채, 서서히 아이멜라의 검을 뽑아들었다.
검신에 새겨진 문구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검'
인간을, 지키기 위한 검이라...
정말이지,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야.
쓴웃음을 흘리며 뽑아든 검을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신경쓰지 말자. 결국, 검은 검일 뿐이니까.
빛바랜 푸른 검신이 날을 세웠다.
그리고 크누트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뵐베르크여, 맹세를 지킬 순간이 왔도다!"
폭풍이 눈을 스쳤다.
치솟는 회색 영기가, 그의 몸을 감싸며 일렁인다.
아니, 잠깐만.
저건 설마......!
[그의 창은, 전쟁의 시작을 고한다.]
나지막한 주언과 함께, 크누트의 창에 회색 빛줄기가 엉겨들며,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주변의 자갈과 쇳조각들이 바람에 휘말려 회전하며, 서로 충돌해 연신 번쩍였다.
벼락을 토해내며 휘몰아치는 회색 폭풍.
틀림없이, 예전에 몇 번인가 화면으로 보았던 모습이었다.
개전의 창.
전사신, 뵐베르크의 신도들이 사용하는 전투용 기적.
이 자식...! 성전사였나...!
극도로 긴장한 신경이 격렬한 위험신호를 전달했다.
크누트가, 창을 들어 내던지고ㅡ
굉음이 숲을 찢어발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사실 어젯밤에 짧은 크누트 과거회상을 썼었는데 다 쓰고 나니 3000자가 되어버린 바...
그걸 그냥 이번화로 올렸다가는 독자님들께서 제게 도끼를 휘둘러 올 것 같았어요...!
따라서 크누트 과거회상은 조금 후에 다음 화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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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2페이즈!
보스몹은 반드시 2페이즈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보스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