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화
전사란
개전의 창.
이는 전사신 뵐베르크의 폭풍이니.
쏘아지면 반드시 적을 꿰뚫는, 선전포고의 투창을 재현해낸 기적의 이름이었다.
숲을 관통하는 폭거에 수십 그루의 나무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허공으로 비산한 나무껍질과 흙먼지가 비가 되어 쏟아졌다.
저 멀리, 암벽을 갈아버리며 송곳처럼 파고든 창이 한 줄기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욱신거리는 오른쪽 어깨를 슬쩍 쳐다보았다.
스친 것만으로, 갑옷이 통째로 갈기갈기 찢겨나가 있었다.
반응하지 못했다면 어깨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제길. 감추고 있던 힘이 이거였나.
성전사라니, 예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크누트의 전신에서 회색빛 기운이 물결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유부릴 때가 아니었다.
전사신의 성전사라면 권능 하나하나가 오로지 전투에 특화된 자.
스스로의 상처를 회복할 능력은 없는 교단이었지만,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으니.
놈이 하사받은 권능이 모두 몇 가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셋 이상이라면 골치 아파진다.
허리 뒤쪽의 케이스가 흔들거렸다.
그 안에는, 내 마지막 수단이 잠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써야 하려나?
아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내 힘으로 상대할 수 있으니.
"피했느냐. 역시 반응 하나는 재빠르구나...!"
투창을 피하느라 떨어트렸던 도끼를 크누트가 다시 주워들었다.
도끼날에 회색 광채가 스며들어 번뜩였다.
위기감이 몸을 깨운다.
달아오르는 본능이 사투를 반기며 발톱을 세웠다.
나이젤의 조언을 떠올렸다.
본능에 몸을 맡기되, 한 줄기 이성을 유지하라 했었지.
그렇다면 그리해야지.
억누르던 충동을 놓아주었다.
해방된 본성이 검을 움켜쥐고 내달렸다.
----
푸른 잔광과 회색빛 성광이 어우러졌다.
"캬아아앗!"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크누트를 향해 끝없이 검격을 퍼부었다.
놈이 창을 회수할 틈을 주는 건 곤란했으니.
개전의 창은 한 대라도 제대로 맞아버리면, 그대로 절명할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사슬갑옷이 여기저기 찢겨나가며, 피에 젖은 쇳조각을 흩뿌렸다.
전사신의 힘이 깃든 도끼는 내 검에도 잘리지 않고 버텨내었으나, 속도 자체는 내 쪽이 훨씬 우위였다.
"하압!"
가로로 크게 휘둘러지는 도끼를, 몸 전체를 숙여 피한다.
머리 위로 살벌한 파공음이 지나갔다.
그대로 단검을 뽑아, 허벅지를 노리고 내지른다.
도끼자루에 맞아 튕겨나갔다.
내 턱을 걷어차려는 발등을 막아내며, 미끄러지듯 옆으로 돌아들어가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
검신이 탄력을 받아 채찍처럼 휘어진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검끝을 울렸다.
크누트가 바닥을 굴러 피해냈다. 허리를 노린 장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감정과 기억의 속삭임이, 예지를 안긴다.]
거리를 벌린 크누트가 두 번째 주언을 읊었다.
등 뒤로 펼쳐진 흑회색 영기가, 날개와 같은 형상이 되어 그를 감싸며 스며들었다.
네 장의 날개.
반응속도와 반사신경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기적이었다.
그의 공격이 내 속도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옅은 상처 나마 입혀왔던 검격들이, 전부 막혀나간다.
아직이야.
아직 더 빨라질 수 있어.
본능에 채워놓았던 목줄을, 조금 더 해방한다.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열기에 목이 말라왔다.
"캬아아아아아!"
이를 갈며 몰아치는 공격에 야성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머리를 노려오는 도끼를 날밑으로 받아내 꺾어내고, 손끝을 세운 왼손으로 할퀸다.
크누트의 망토가 길게 찢어졌다.
몸통을 노려오는 크누트의 다리를, 오히려 손으로 짚어 회전하듯 뛰어오른다.
그대로 머리를 노리고 내려찍은 발뒤꿈치가 치켜든 도낏자루에 막혔다.
떠엉, 하는 공명음과 함께 크누트의 무릎이 푹 꺾였다.
"큭..!"
다리를 홱 접어 도낏자루를 끌어당기며, 두 손에 단검을 뽑아들어 그대로 양쪽 어깨를 내려찍었다.
크누트가 허리를 활처럼 젖혔다.
단검이 사슬갑옷의 가슴팍을 스치듯 긁어내며 불꽃을 튀겼다.
그의 주먹에 얻어맞아 뒤로 나가떨어졌다.
왼뺨이 얼얼했다.
입안이 좀 찢어졌는지, 뱉어낸 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들고 있던 단검들은 뭉툭해져 쓸모가 없어졌기에 놓아버렸다.
크누트가 내 장검을 줍더니, 그대로 이쪽으로 내던진다.
머리를 노리고 쏘아지는 검끝. 창이 아니기 때문인지 회색 폭풍은 휘감겨있지 않았지만, 그 기세는 여전히 매서웠다.
손을 뻗어 반사적으로 붙잡는다.
검신이 장갑을 베어가르며 손바닥에 긴 상흔을 남긴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미간이 꿰뚫렸을 것이다.
검자루를 다시 거머쥐고, 몸을 일으킨다.
왼손에는 단검 한 자루를 새로 뽑아든 채.
...이걸로 아홉 자루 남았나.
크누트도 여기저기 베여나가 피투성이였지만, 아직 치명상은 없었다.
걸치고 있던 사슬갑옷은 걸레 짝처럼 너덜너덜해졌지만.
확실히, 이성 없는 몬스터들과는 다르네.
힘으로 밀어붙이자니, 강한 힘이 실린 공격마다 틈을 노려 굴러 피하고 반격해온다.
결국 공격 하나하나를 짧게 끊어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공격들로는 갑옷 안쪽까지 박살 내기는 쉽지 않았고.
그렇다면, 더욱 강하게. 더욱 빠르게.
반응하지 못할 때까지.
전의를 더욱 끌어올린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목울대를 울려 그르렁대며 다시 도약했다.
묵빛 호선을 미끄러지듯 피하며 파고들어, 두 손을 힘껏 내지른다.
- 카앙!
가로막혔다.
아직이다.
더 빠르게.
더 맹렬하게.
머금은 열기를 토해낸다.
호흡에 증기가 섞여들었다.
격렬해지는 투쟁심에 몸을 맡긴다.
육체가 한층 더 가속한다.
"캬아앗!"
내리쳐오는 왼팔을 향해, 섬전처럼 단검을 처박는다.
단검이 사슬을 찢고 근육과 뼈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크누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걷어차오는 다리를 역으로 붙들어 휘두른다.
균형을 잃은 크누트가 비틀대면서도 도끼를 내려찍는다.
"하아아압!"
"카아아아앗!"
두 손으로 검자루를 틀어쥐고, 전력을 다해 받아친다.
회색 서광이 깨어져 나가며, 검신이 도끼날을 반쯤 파고들었다.
"괴물, 같은 놈...!"
경악한 크누트가 그대로 도끼를 떨쳐냈다.
몸이 뒤로 쭉 밀려난다.
그대로 단검 하나를 더 뽑아 내던졌다.
갑옷이 떨어져 나간 크누트의 어깨에 단검이 틀어박혔다.
"크흑..!"
전사신의 권능을 빌려 쓴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
연이은 출혈에 그의 몸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반면 내 본능은 점점 더 예리해지며, 내 육체를 한없이 달구고 있었고.
"캬하아..."
참아왔던 호흡을 내뱉었다.
흐르는 피 냄새가 달큼하게 느껴졌다.
연인을 만난 것처럼 뜨겁게 박동하는 심장이 전신에 끝없는 활력을 공급했다.
"그야말로, 짐승이로구나...! 역시, 네놈은 사람이 아니야. 여기 널브러진 괴물들과 다를 바 없지!"
크누트가 이를 갈았다.
흐려지던 이성을 긁어모아 대답했다.
"아까부터...내 말에 꽤 화가 난 모양인데...! 살기 위해 싸운다는 말이, 그렇게도 아니꼬웠냐...? 전사가 아니라느니 말이야..."
"아니꼽냐고? 하, 그래! 저것들을 보아라!"
크누트가 격정적으로 주위의 코볼트들을 가리켰다.
붉게 물든 턱수염에서 핏방울이 흩날렸다.
"이성도, 신념도 없이. 오직 본능에 따라 먹기 위해 싸우고, 즐거움을 위해 죽인다! 너희와 무엇이 다르지?"
도끼를 치켜든 크누트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휘둘러지는 도끼날을 하나하나 검으로 쳐냈다.
검신이 맑은 울림을 토하며 진동했다.
도끼날에 어려 있던 회색 광채는 아지랑이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전사란, 사람이란.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신념을 위해 싸우며, 명예를 위해 죽어야 한다!"
"아, 그러셔...!"
고리타분한 전사관이네. 그나마도 편협한.
살기 위해 싸운다는 건 신념이 아니라 이거냐?
너는, 그런 걸 신경 쓰며 싸운다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만.
어깨를 노리는 공격을 몸을 틀어 피하고, 그대로 복부를 걷어찼다.
남아있던 사슬이 산산이 터져나가며 크누트가 뒤로 날아갔다.
나무둥치에 충돌한 크누트가 피를 토했다.
"크으으윽...아직 끝이 아니다...!"
이를 악문 크누트가 마지막 주언을 읊었다.
[탐욕과 굶주림이, 영원한 투쟁을 가져오리라!]
에인헤랴르.
상처의 통증과 장해를 무시해,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투능력을 유지시키는 축복.
부상을 치료하는 권능이 없는 전사신 교단이, 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벌떡 일어난 크누트가 달려들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빨라진 몸놀림이었다.
깨진 도끼와 장검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충돌했다.
전투가 한층 격해지며, 빗나가고 흘려나간 공격들이 사방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깨져나간 암석이 바닥에 떨어져 땅을 울리고, 잘려나간 나무가 쓰러지며 잎사귀를 쏟아낸다.
"그 힘...! 주위의 모든 것들을 난도질하는 그 흉폭한 힘으로는 그 무엇도 지킬 수 없을 테지! 애초에 너 자신 말고는 지킬 생각도 없을 테고!"
도끼날이 허벅지에 틀어박혔다. 갑옷이 깨져나가며 피가 솟구쳤다.
장검이 크누트의 왼팔을 길게 찢었다. 벌어진 상처 틈으로 긁혀나간 뼈가 엿보였다.
"살기 위해서라고? 수천 데인인을 죽인 이유가, 고작 네가 살기 위해서라고! 신념조차 아닌 궤변이구나!"
내던진 단검들이 크누트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반격해오는 발길질을 막은 왼팔이 시큰거렸다.
"명예라 할 만한 것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겠지!"
뒤로 뛰어올라 나무를 박차고 도약하며 검을 내질렀다.
장검을 막아내려던 도낏자루가,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잘렸다.
"뵐베르크여-!"
금속 봉으로 변해버린 도낏자루에 회색 폭풍이 깃들었다.
아차.
다시 한 번 쏘아진 개전의 창이 내 머리로 치달았다.
간신히 막아낸 장검이 내 손아귀를 찢으며 튕겨 나갔다.
등으로 나무들을 박살 내며 나가떨어졌다.
흉갑 뒤쪽이 박살 난 듯, 금속 파편들이 등을 찔렀다.
울컥, 치밀어오른 피를 토해냈다.
젠장...그야 날카롭게 잘린 금속 봉이면 짧은 창이나 다름없긴 하지...!
몸을 일으키는 틈에, 크누트가 전투 초반에 던졌던 창을 불러들였다.
왼손에 쥔 창에서 다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너는, 전사도 사람도 아니다.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저 괴물에 지나지 않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다음화는 얼마 안 가 올라옵니다!
두 화를 올리고 나면, 아마 내일 낮이랑 저녁에 한 화씩 더 올릴 수 있겠네요!
크누트가 좀 내로남불같다면 느끼신 부분이 아마 맞을 겁니다!
이미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
[크누트가 전사신에게 하사받은 권능들]
[개전의 창]
- 멀어져가던 오르한에게, 손끝 하나 닿지 못했던 무력감.
[네 장의 날개]
- 조금이라도 더 빨랐다면, 여동생과 함께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
[에인헤랴르]
-상처 때문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자괴감.
전사신의 권능은 보통 그 신도가 가장 원하던 힘을 선사해줍니다.
의식적으로 바란 것이든, 무의식적으로 바란 것이든요.
그것이 선의일지 조롱일지는, 사람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