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화
'친구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재판정에 선 피고인과 같은 마음으로 밀리아의 선고를 숨죽인 채 기다렸다.
밀리아는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인지, 한참 동안 입을 달싹이며 날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화가 나긴 했겠지.
억지로 몰아붙여 입을 다물게 하고 떠난 주제에, 이 꼴로 돌아왔으니까.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 당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었는데.
크누트가 하필 전사신의 성기사, 성전사였을 줄이야.
스펙으로 밀어붙이는 내 전법상, 성기사들은 가장 상성이 나쁜 상대였다.
마법사라면 항마력으로 마법의 전조를 읽어서 대처할 수 있다.
단순한 전사라면 검술과 신체능력으로 압도할 수 있다.
지성 없는 몬스터라면 그냥 힘으로 으깨버리면 그만이니 더욱 간단하지.
허나, 성기사는 다르다.
그들은 축복으로 스펙 자체를 끌어올리고, 부상에도 개의치 않고 싸우며, 발휘하는 기적들은 항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반면 나는 아직도 내 힘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고.
검술이야 손에 익었고, 근력과 본능을 활용하는 방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업 만큼은 다루는 방법조차 감을 잡지 못했으니.
감정이 격해질 때, 헤르셀라가 쌓아 온 살업의 힘을 무의식적으로 발현하는 수준이 한계였다.
서릿발이 그 힘을 강제로 끌어내긴 했지만...그 무기는 써먹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것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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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 설명해주겠어?"
마침내 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며 동굴에 온기를 퍼트리고 있는데도, 추위가 느껴지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설명이라.
"날 죽이려는 상대와 싸웠고...생각 이상의 강적이라, 겨우 살아 돌아왔지."
"자세히."
대충 넘기려던 내 답변을, 조금도 납득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단호한 태도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저지른 짓을 털어놓았다.
"...크누트야. 그는 데인인이니까, 카`하르인 날 용서할 수 없었겠지. 계속 날 죽일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남자였어."
"그래서, 죽였어?"
나지막한 추궁이었다.
"아마도...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 상처로는 살아남을 수 없겠지."
전사신의 축복에는 상처를 치료해주는 권능이 없었으니까.
다른 교단의 성녀라도 마주치지 않고서야, 회복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죽일 수밖에 없었어?"
밀리아가 고개를 가까이했다.
녹색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쏟아져 내리며 뺨을 간지럽힌다.
그림자가 일렁이며, 침울하게 굳은 밀리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흔들림 없는 눈빛에 더 이상 공포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광물처럼 굳은 눈동자 속에, 정체 모를 감정만이 일렁이고 있을 뿐.
하긴. 나는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니, 더는 무서워할 이유도 없겠지.
"글쎄..."
죽일 수밖에 없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네.
"아마 그렇겠지...대화는 실패해버렸으니까."
"...그래?"
밀리아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지금,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밀리아는 약하지만, 정의로운 사람이다.
아니.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지. 그녀의 친구처럼. 용사처럼 말이야.
아직까지는.
그렇다면 밀리아는 나를 경멸할까?
아니면, 내가 정말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해줄까.
물론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감히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으니까.
적어도, 이 기회에 훗날 악인이 될 여자를 미리 없애두자는, 그런 당혹스러운 생각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구나."
눈을 뜬 밀리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표정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응, 그래. 됐어."
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고...? 그걸로 끝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
설명해 줘.
"내게, 뭐라고 하지는 않는 거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나를, 규탄하지 않는 건가? 비난하지 않는 거냐?
너는 정의로운 사람이잖아.
"그래. 하지 않을 거야. 하샬르 네가 어쩔 수 없다고 했으니까.
밀리아가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파하는 아이를 달래듯이.
"그렇게 싸워서, 이런 꼴이 되어서까지 하는 말이라면. 그게 맞는 거겠지. 적어도, 너에게는."
이마에 전해지는 온기는 포근했다.
마치 용서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슴속이 틀어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게 네가 살아가는 방식인 거겠지...그러니까, 이번엔 됐어. 믿어줄게."
밀리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는, 나와는 너무나도 먼 것을 보는 것 같아서.
눈이 부셔서.
반해버릴 듯이, 아름다웠다.
나는 아마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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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짓이군."
얼마 후 돌아온 한스가 내 발상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하지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긴 하겠고."
그렇게 남은 3일간의 계획이 결정되었다.
밀리아가 홀로 전위를 맡고, 짐가방 대신 나를 업은 한스가 중간, 그 바로 옆을 라나가 딱 붙어서 따라다니기로 했다.
내 감각을 이용해 위험한 상대는 미리 피해 다니고, 6마리 이하의 코볼트들만 노려 공격하기로.
자기 전에 라나의 치유를 한 번 더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찬란히 빛나는 신성한 빛은 후작성에서 만났던 여사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 여사제와 달리 치료해야 할 중상자가 나밖에 없다 보니, 하루에도 세 번은 이 정도 치유술을 걸어 줄 수 있다고 했고.
아마도 마지막 날쯤에는,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질 것 같았다.
"음, 이 정도면 조심히 업혀 다니신다면 상처가 터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네? 다행이네, 하샬르."
"그러게."
그렇게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온기로 훈훈한 동굴 안쪽에서 네 명의 조원 모두가 잠을 청했다.
한스가 아예 도끼로 나무를 패 와서는, 동굴 입구에 방벽을 달고 함정을 깔아놓았다고 한다.
두명이서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는 일은 아무래도 무리 같다면서.
그는 길잡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자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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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아침을 먹은 뒤, 내게 등을 내민 한스에게 업혀 들었다.
업혀보니 숨쉬기가 좀 답답하긴 했지만, 이 정도야 참을 만했다.
한스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난 갑옷도 벗은 상태니까, 그렇게 무겁진 않겠지?
얘도 참 고생이 많네.
오전 내내 숲을 돌아다녔다.
수원지에 들러 물을 보충하기도 하고, 소규모 코볼트 무리도 찾아다니면서.
첫날 수원지를 점거하고 있던 놈들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꼴인 이상, 다시 만나면 곤란해질 뻔했는데.
만나는 코볼트는 밀리아가 전부 정리했다.
첫날과 달리 코볼트들 상대에 익숙해진 것인지, 춤을 추는 것처럼 경쾌하게 움직이며 일격으로 확실하게 숨을 끊었다.
난 한스의 등 너머로 그 모습을 구경하며, 부상으로 피로한 몸을 기대었다.
역시 그에게도 사과해두는 편이 낫겠지.
이 숲에 찾아올 때만 해도, 이렇게 고생시킬 거라곤 생각 못 했었는데.
그래도 아무 불평 없이 날 도와줬으니까.
"...그땐 손가락 날려버려서 미안했어."
"그거라면 받은 것이 훨씬 많았으니 괜찮다. 손가락도 멀쩡히 자랐고. 좀 어려운 의뢰를 했던 셈 치지."
한스가 잘려나갔던 손가락을 까딱이며 보여주었다.
겪어보니 이 녀석도 참 유능하고 성격도 괜찮은 녀석 같은데.
기사는 어렵겠지만, 길잡이를 한다면 대성할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 등 뒤에서 가급적 꿈틀거리지 마라. 정신 사납다."
"미안. 자세가 좀 불편해서."
"...사과할 일은 아니고."
역시 사람 하나를 업고 숲을 돌아다니는 일은 힘든 것인지, 좀 지쳐 보이긴 했다.
숨소리나 얼굴색, 흘러내리는 땀방울 같은 것들이 첫날과는 꽤 달랐으니.
그렇게 사흘간, 업혀 다니며 코볼트를 사냥하고, 저녁엔 동굴로 돌아와 치료받고 잠드는 생활을 반복했다.
트롤은 냄새만 느껴져도 피해 다녔다.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잡겠지.
데미안이라던가, 오필리아라던가.
마지막 날에는 걸어 다닐 정도로 상태가 회복되었다.
실습 종료를 알리는 푸른 연기가 숲의 경계선에서 연달아 치솟았다.
우리 역시 짐을 챙겨서,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숲을 벗어났다.
최종적으로 사냥한 코볼트의 숫자는 52마리.
의외로 6위에 해당하는 꽤 높은 점수였다.
1위는 트롤 3마리에 코볼트 30마리를 사냥한 데미안과 에드가의 조였다.
오필리아 조는 트롤 하나를 사냥하기는 했지만, 코볼트는 5마리밖에 잡지 않았기에 3위였고.
아마도 오필리아 성격상, 처음에 트롤 하나만을 잡은 다음에 대충 틀어박혀서 쉬기만 했겠지.
조원들이야 혼자서 트롤을 잡는 마법사의 말을 굳이 거부하지 못했을 테고.
참고로 2위를 달성한 조는 코볼트만 90마리를 사냥한 조였다.
전부 고만고만한 실력에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어차피 트롤은 못 이길 테니, 집요하게 코볼트들이 모인 동굴들만 습격하고 다녔다고 한다.
나름 전략적이라 평가할 만한 방식이었다.
이것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만했던, 다사다난한 첫 야외실습이 모두 종료되었다.
참가자 140명. 복귀자 126명.
사망 및 실종자 14명.
관리감독을 맡았던 기사 중 1명 실종.
...죽고 실종된 자들의 이름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얼마 후, 마침내 아카데미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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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관의 숙소에서 날 기다리던 나이젤이, 내 몸과 갑옷의 상태를 보고는 경악했다.
"크누트 일곱 명이랑 싸우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 한 명한테 이렇게 당했어.
"그 녀석, 뵐베르크의 성전사였어."
"아...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꼴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나이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옷은 일단 수리를 맡기겠습니다......이걸로 또 자금이..."
돈이야 몸이 낫고 나면 벌 기회가 있겠지 아마.
솔직히 몬스터 상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슬슬 돈도 벌어두긴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강철 장비들로는, 앞으로의 전투를 버텨 낼 수 없을 것 같으니.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아샤에게 장비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든가 해야겠지.
아마 싸게 해 주긴 하겠지? 친구니까.
"아무튼, 지금은 일단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휴식입니다. 마력초도 금지고요."
마침 잘 되었다는 마냥, 나이젤이 마력초가 담긴 케이스들을 한데 모아 책상 구석에 틀어박았다.
아니 그야 뭐,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꼴로 그런 걸 피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긴 한데.
마력초를 그 정도로 싫어하나?
========[???]========
침상 하나만이 놓인 어두운 방.
격통과 함께 피를 토해내며, 죽은 듯이 누워있던 남자가 마침내 깨어났다.
"커헉..! 크흑, 커윽!... 여긴...?"
사지에 감각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남자는 고통과 당혹 속에서 꿈틀거리다,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기사의 존재를 눈치챘다.
"깨어났습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먹더니, 참 보기 좋은 꼴이군요."
여자는 싸늘한 어조와 달리, 남자의 비참한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천상궁전은...아니로군..."
"머리도 다치셨습니까? 당신을 살려보겠다고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나 아십니까."
여자가 침상에 다가와 걸터앉았다.
침상 한쪽이 푹 파여 들었다.
"포션을 물처럼 써 가며 간신히 목숨줄만 붙여 놓고, 그대로 탈주해 아카데미의 성녀 후보까지 찾아가 어떻게든 치료했습니다. 일 년 치 공작비가 모조리 날아갔고,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이 위장신분도 버려야 하겠지요. 그러고도 이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여자가 손을 뻗어 남자의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팔은 어떻게든 복구했지만, 다리와 내장은 지독한 저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생명력까지 태워서 권능을 써 댔으니, 죽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성녀 후보 덕분에 내장은 어설프게나마 수복했지만...눈과 다리는 무리였지요. 더 이상 전사로서 싸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가...신세를 졌군."
과연, 전사신의 축복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거였나.
이제 전사가 아니게 되었으니.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남자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정양하십시오. 본국에 이 일을 보고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돌아올 겁니다."
여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쪽으로 향했다.
남자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고리를 잡은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살아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크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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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4연참의 약속을...지켰습니다!
오늘은 이만 좀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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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물질적으로, 이번엔 정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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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님이 살아 계신다!
복선은 깔아 두었다...
성녀라도 없으면 죽을 거라는 하샬르의 설명.
아카데미엔 성녀 후보가 있다는 설정.
제국 내에는 데인 첩보조직이 침투해 있다는 크누트의 회상까지...!
결국 크누트는 살아남았답니다! 눈도 다리도 생명력도 권능도 없는 특급 장애인이 되었지만...
언젠가는...재등장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