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그래도, 나는
추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팔다리에 남은 커다란 상처들은 옷을 찢어 동여매 두었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피가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언뜻 보이는 피부는 이미 창백하게 질려 시체와도 같이 변해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당장이라도 치료를 받아야 할 마당에, 일부러 빙빙 돌며 혈흔을 여기저기 퍼트렸으니.
널린 피들이, 그저 평범한 몬스터들의 흔적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그렇지 않으면.
지표면에 점점이 떨어져 굳은 붉은 자국들이, 살인자의 행방을 알리는 이정표가 될지도 모르니까.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코볼트들은 모조리 죽였다.
땅에 쓰러진 채, 반쯤 망가진 한쪽 팔만 가지고도 코볼트 따위는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몇 군데 베인 상처가 늘긴 했지만.
피곤해.
바닥을 기어 동굴로 되돌아가며 그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크누트.
복수를 위해 목숨을 불태우며 덤벼든, 결국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내를.
멍하니 흐려진 의식 속에서, 흩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끌어모으며 사고를 이어간다.
가족과, 동포의 복수를 맹세했다고 했었지.
그에게는 정당하나, 나에게는 부당한 원한을 토해내면서.
아마도 그자는 시작에 불과할 뿐,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죽여야 할 테고.
슬픈 일이었다.
대안이 없다는 점이 특히나.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
카`하르가, 헤르셀라가 그들에게 새긴 상처 자국은 너무도 깊어, 결코 아물지도 잊히지도 않을 테니까.
그들에게 죽어 줄 수도 없다.
내가 원한을 받아들이고 죽어 준다면 그걸로 끝날 일조차 아니니까.
카`하르는 여전하고 오르한도 건재하다.
만약, 오르한을 죽이는 게 원작의 헤르셀라였다면?
내가 여기서 죽어주는 순간, 이미 뒤틀린 이야기가 손쓸 수도 없는 곳으로 치달을 것이다.
죽지 않은 오르한이 언젠가 헤아릴 수 없는 군세를 이끌고 찾아오겠지.
그로 인해 죽게 될 사람들은 전부 내 책임이었다.
그건 내가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 때문에 벌어지게 될 일이니까.
그러니 내가 막아야 했다.
언젠가 찾아올 오르한의 군세가, 장벽을 넘지 못하도록.
루드비히 후작이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거절하진 않겠지.
다시 손끝을 뻗어,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나아간다.
오르한만이 아니다.
앞으로 이 세계엔 수많은 죽음이 펼쳐질 것이다.
수인들, 마물들. 그리고......
...그래. 데미안이 있으니 언젠가는 평화가 찾아오긴 하겠지.
직접 만나본 그 녀석은, 그런 확신을 주는 녀석은 아니었지만...그래도 주인공이니까.
계속 강해지고, 점차 용사다워지리라.
그러나 그때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까?
"커흑! 켁, 케헥..! ...하아아...하아아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라, 기침하듯 피를 토해냈다.
숨을 몰아쉬며 흙을 헤집어, 뱉어낸 핏덩이를 덮었다.
아파.
내가 했던 게임은 평화로운 작품이 아니었다.
긴장감을 주기 위해, 카타르시스와 흥분감을 주기 위해 수만 명도 우습게 죽어나가곤 하는 지옥도였지.
아샤도, 밀리아도, 라나도, 프리데도, 오필리아도.
선택 하나를 실수하는 것만으로,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때는 모니터 너머의 그림에 불과했지만.
이젠, 이것이 내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지켜야 했다. 지키고 싶었다.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가로막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직접 죽이게 되더라도.
쓴웃음이 치밀어올랐다.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다.
역시, 참으로 지독한 모순이었다.
그렇다 하여도.
싸우고, 죽여서, 후회하고, 아파하고.
그래도 다시 일어나, 싸워서. 지켜내자.
세상을, 사람들을 구하는 거야.
엉망진창에 모순투성이일지언정, 이것야말로.
내 신념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어느덧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그림자에 잠긴 숲 속.
흙에 파묻혀 기어 다니며,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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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입구엔 밀리아가 서성이고 있었다.
어째서 저 녀석이 나와 있는 거지...?
한스가 불침번을 서고 있을 시간 아닌가?
일단 그쪽으로 계속 기어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묶어둔 상처에서 다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하샬르...?"
날 발견한 밀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하며 달려왔다.
잠들지 못했던 것일까, 눈가에 짙은 피곤이 서려 있었다.
"뭐야...한스는 뭐 하길래, 밀리아 네가..."
"지금 그게 중요해? 세상에, 이 상처 좀 봐! 괜찮은 거야?! 한스! 라나아! 이리 좀 와 봐!"
밀리아가 호들갑을 떨며 날 들쳐 안고 동굴 안으로 향했다.
괜찮은 거냐고...? 그야 괜찮지는 않지......
슬슬 육체도 정신도 한계였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래도, 라나가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하샬르 양? 아니 대체 뭘 하다가 이렇게...!"
"그것보다 당장 치료해야 해요! 밀리아 언니, 하샬르 님을 이쪽에 눕혀주세요!"
밀리아가 날 침낭 위에 내려놓고, 라나가 목에 걸고 있던 성표를 움켜쥐었다.
"대체...뭘...트롤조차...밀리아 양...알고 있었..."
"나도...! 그저...인 걸로만...설마 이런......!"
"...하신......어머니, 샤울리테시여...를...님에게...!"
슬슬 청각마저 어두워져, 세 사람의 대화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심장을 얼려오던 냉기도, 상처를 지지는 듯한 아픔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주홍빛 성광이 피어오르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정신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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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모닥불이 타닥이며 불씨를 토해냈다.
몸 속이 사막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극심한 갈증이 밀려들었다.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크, 으아읏...!"
"어...? 아, 하샬르 님!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으으...물, 물 좀...!"
라나가 물주머니를 꺼내 내 입에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메말라버린 목구멍을 적시며 위장으로 스며들어 갔다.
주머니가 텅 빌 때까지 전부 마시고서야, 마침내 갈증이 좀 잦아들었다.
"...고마워. 라나 네가 치료해준 거야...?"
"샤울리테 님의 은총이에요. 자칫했으면 그대로 돌아가셨을 텐데...그분께서 특별히 강한 축복을 내려 주신 덕분에, 살릴 수 있었어요."
신의 도움이라.
역시, 신 정도쯤 되면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크누트는 전사신이 자신을 인도했다고 했었지.
단순한 관용구 같은 말이라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그래...? 샤울리테의 은총이라...나중에 교단에 헌금이라도 해볼까."
"대체 뭐랑 싸웠길래 그렇게 다치신 거에요? 마치 용이라도 상대한 것처럼."
용은 아니고, 성난 불곰 비슷한 사람이었다.
용이랑 싸웠으면 죽었겠지. 사람이 용을 어떻게 이겨.
"그냥 좀 강한 놈..."
적당히 말을 흐렸다. 그야 동급생을 죽이고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
"아무튼 당분간은 푹 쉬셔야 해요. 부상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데다가, 출혈도 심각했고, 심지어 저주마저 걸려 있었으니까요."
"...저주?"
그거 설마...
"네. 지독한 저주였어요. 정신을 무너트리고 생기를 앗아가는, 명계의 냉기를 품은 저주요."
역시 서릿발이었나...!
적도 아니고 주인에게, 그 정도의 저주를 끼얹는 물건이라니.
대체 헤르셀라는 어째서 이런 물건을 만든 거지.
...아니면, 그녀 역시 저주를 예상하진 못했던 걸까?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밀리아와 한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적막한 동굴 속에는 오직 라나만이 남아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밀리아 언니는 입구를 지키고 있어요. 한스 아저씨는 몬스터들을 잡으러 갔고요. 곧 돌아오시겠네요."
"혼자서...? 위험할 텐데......"
코볼트 너덧 마리를 상대로도 다치던 녀석들이, 혼자 이 숲을 돌아다닌다고?
트롤이라도 만나면 어쩔 셈이야.
"저는 하샬르 님을 돌봐야 하고, 누군가는 동굴을 지켜야 하니까요."
라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역시, 그냥 가만히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나 보네.
조금이라도 성적을 잘 받아두려는 건가.
내가 발목을 잡아버렸으니까, 그 정도는 도와줘야겠지...?
"그렇구나...밀리아를 좀 불러주겠어?"
"네. 여기서 쉬고 계세요!"
라나가 동굴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난 그 사이에 내 몸 상태를 대충 확인해보았다.
전신에는 붉게 물든 붕대가 휘감겨 있었다.
이것도, 한스가 준비해온 거려나.
한기는 조금 가셔 있었지만, 팔다리는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야 찔리고 꿰이고 찍히고 뒤틀렸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등 쪽의 부상도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화끈거렸다.
...이래서야 실습이 끝날 때까지 전투는 무리겠네.
침낭 너머에, 넝마 조각이 된 갑옷이 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갑옷은커녕, 옷으로조차 쓸 수 없는 모양새였다.
저걸 고치려면 또 얼마가 들어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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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아 언니를 불러왔어요, 하샬르 님!"
"깨어났어, 하샬르? 몸은 괜찮아?"
얼마 지나지 않아 라나가 밀리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밀리아가 침낭 옆에 걸터앉아 걱정스러운 듯이 내 안색을 살펴보았다.
"견딜만해...그것보다, 한스 혼자 숲으로 갔다며. 위험할 텐데."
"그야 말려보긴 했지만. 한스는 성적에 꽤나 신경 쓰던 모양이라..."
장학금이라도 노리는 건가.
오필리아의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나와 싸웠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돈이 꽤 궁한 모양이네.
"...할 수 없지. 오늘은 일단 넘어가고, 내일부턴 나를 데려가라."
"안 돼요! 아직 상처가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라나가 고개를 흔들며 반대했다. 밀리아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제대로 움직이지조차 못할 텐데, 그건 무리야."
"싸울 생각은 없어. 이 몸으론 너희 말대로 싸우지도 못할 테고."
이 상태로 전투 따위를 했다가는 자멸이다.
애초에 전투를 도와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기도 했고.
"날 업고 움직여. 그러면 너희 셋이 같이 돌아다닐 수 있잖아. 이 동굴에 두 사람이나 묶여있을 필요 없이."
"그건...그렇지만......"
"난 코볼트랑 트롤의 기척만 알려 줄 테니. 싸우는 건 둘이서 알아서 하고. 그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정찰이야 뭐 감각기관만 멀쩡하면 문제없으니까.
트롤이랑, 지나치게 많은 코볼트 무리들만 피해 다니며 움직이면 되겠지.
"...일단 한스랑 이야기해 볼게."
밀리아가 마지못해 수긍하더니, 갑자기 라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라나, 잠깐 언니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미안하지만 입구에서 한스를 기다려줄 수 있겠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소리쳐 부르고."
"어...네! 그렇게 할게요!"
잠시 고민하던 라나가 동굴 입구로 향했다.
얼마간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밀리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모닥불의 역광 때문인지, 그 얼굴은 일렁이는 그림자에 가려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 라나는 보냈으니, 이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하샬르."
나직한 목소리에 어두운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금 늦어버렸네요...! 그러나 자정 전까진 반드시 다음화가 올라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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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하샬르의 심리 편이 마무리되었네요.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이유는
사실 자기가 죽으면 못 구할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용사보다 더 용사같은 마인드.
전설 속 존재라는 착한 일진이 틀림없네요!
이제 몸을 좀 회복하고, 계속 나아가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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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보다 약한 녀석들은 손쉽게 박살 내지만,
비슷한 급의 적을 만나면 매번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이 세계의 치료술이 효율이 어마어마해서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