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화
북부대공녀는 친구가 없어
프리데 반 페일룬.
북부의 대공국 페일룬의 공녀.
문자 그대로, 북부대공녀이다.
페일룬은 툭하면 하늘산맥을 넘어 침공해오는 수인들을 막는 최전선이었다.
그러니, 아카데미의 교수들을 제외하면 아마 프리데만큼 수인에 대해 잘 아는 자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교수들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고.
문제는 카`하르가 사실상 동부의 수인들이라 할 수 있는 족속들이다 보니, 나한테까지 악감정을 드러낸다는 건데...
아직도 조금씩 진동하는 문짝을 내려다보다, 슬쩍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역시나 잠겨 있었다.
나와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다 이건가.
뭐, 이정도 문전박대는 예상했으니까.
그래, 문 앞에서 박대당해 못 들어간다면, 문이 없으면 되는 거잖아?
문짝을 뜯어버렸다.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경첩이 박살 나며 문이 뜯겨나갔다.
프리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쳐다보았다.
제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바지와 블라우스만 입고 있는 차림새였다.
적갈색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물들어 떨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좀 들어간다."
"정신 나갔어? 아, 당연한 소리를. 제정신일 리가 없지. 당장 안 꺼져, 야만족?"
프리데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당혹에서 분노로 바뀐 감정이 내 쪽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
책상 위쪽으로 향한 오른손이, 당장에라도 무기를 집어들려는 모양새였다.
얘는 말끝마다 야만족이네. 괴물 소리보다야 낫지만.
찾아온 손님에게 꺼지라며 무례하게 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야만적인 일 아닌가.
무시하면서 방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방 꼬라지 봐라. 이게 진짜 야만인의 방 아니냐?"
말꼬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벽 한켠의 커다란 게시판에는 온갖 종류의 생체 해부도가 붙어 있었고, 그 아래의 선반엔 내장이 담긴 표본 병 같은 것이 가득했다.
맞은편 벽에는 일곱 자루가 넘는 흉악한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거대한 톱. 가시가 빼곡히 돋은 채찍과 메이스. 괴상한 펌프가 달린 창.
쇠사슬과 연결된 도끼, 박히면 빠지지 않게 작살처럼 만들어진 단검까지.
고문에 관한 책에서나 봤었던, 눈알 뽑는 집게까지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수인에게서 벗겨 낸 가죽이 전시되어 있었고, 가죽을 벗겨 내고 남은 몸통은 구석에 박제되어 있었다.
...사냥꾼과 이단심문관과 흉악살인범을 한 방에 모아두면 이런 인테리어가 되지 않을까.
볼 때마다 참, 친구가 없는 이유를 대충 알겠다 싶다가도...
까보면 또 새로운 이유가 양파껍질처럼 계속 튀어나오네.
"꺼지라는 말, 못 알아듣겠어? 아니면, 지금 나랑 결투라도 하자는 거야?"
프리데가 신경질을 냈다.
새하얀 피부가 분노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당장 무기를 뽑아들지 않는 건, 여기가 아카데미다 보니 나름 자제하는 거겠지.
"그건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문이 고장 난 것 같아서."
그래서 잘 열리게 고쳐줬지.
이제 멋대로 문이 잠겨서 고생할 일은 없을 거란다, 프리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고? 감히 나한테, 이딴 식으로 쳐들어오면서? 네까짓 야만족이?"
"선배잖아? 후배 좀 도와달라고. 나도 중요한 일만 아니었으면 안 왔어."
소파에 걸터앉으며 분을 참지 못하는 대공녀 아가씨를 달래보았다.
당연히 택도 없었다.
"나가라고. 이, 짐승년아!"
내 머리통을 노리는 발길질을 오른팔로 슬쩍 막았다.
프리데 쪽도 진심으로 싸우려고 내지른 발차기는 아니었는지, 큰 힘이 실려있지는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처신에 신경쓰는 거겠지.
아카데미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간 대공에게 폐가 될지도 모르니까.
발길질이 막힌 프리데가 씩씩댔다.
조금 더 자극했다간 진짜 결투라도 신청하려 들지도 모르겠는걸.
여기까지만 할까, 프리데를 진정시킬 마법의 단어는 이미 준비해두었으니까.
"수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안 들을 거냐?"
프리데가 화를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처음엔 잘못 들었다는 듯.
다음엔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 것인지, 의심하듯 눈살을 찌푸리며.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한동안 눈을 감고,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등을 돌린 프리데가 방구석의 금속 케이스 쪽으로 걸어가더니, 손잡이를 잡고 열어제꼈다.
케이스 내부는 냉각 마법을 걸어둔 듯,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안쪽엔 서른 개 정도의 술병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와인 냉장고 같은 건가. 마법이란 참 편리하구만.
프리데가 병 하나를 꺼내고는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꽤 독한 술인지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여기까지 풍겼다.
"하아아아......"
술을 반쯤 비운 프리데가 케이스 위에 병을 대충 놓아두고는, 내 쪽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좀 붉어져 있었고, 발걸음도 아까보다 거칠었다.
내쉬는 숨에선 과일과 알코올 냄새가 났다.
미간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였다.
프리데가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래, 들어주지. 어디 한번 이야기해 봐."
역시, 수인 이야기를 꺼내면 들어줄 줄 알았다.
페일룬의 사람이니 수인 관련 문제에 관심이 없을 리 없지.
남은 건 어디까지 이야기하느냐인데...
일단 그 부분은 말하면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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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페일룬이라면, 수인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니야? 많이 만나봤을 테니까."
"그래. 지금 내 앞에도 하나 앉아있네."
"술을 그렇게 처마시더니, 환각이라도 보나 봐?"
"환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찢어버릴 수라도 있지."
분위기는 싸늘했다.
아니, 오히려 불꽃이 튀어오를 듯 뜨겁다고 해야 하나.
아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건 분명히 싸움이 날 상황이라며 눈을 빛낼 정도로.
...이럴 때가 아니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내가 수인을 상대할 일이 좀 생길 것 같은데, 전문가의 조언을 좀 듣고 싶어서."
"수인을? 네가?"
프리데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페일룬도 아니고, 제도에서 1학년이 수인을 상대할 일이 어디 있다고?"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면,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까. 증거도 마땅치 않은 일을.
아카데미 습격 사건.
입학식으로부터 3개월 후, 중간실습 때 벌어지는 대규모 습격이다.
제도 내에 잠입한 수인들의 비밀 테러조직, 밀리치야가 아카데미생들을 급습하는 사건.
북부 설원 너머, 수인 왕국 바랴크루스의 지시에 따라 벌어지게 될 일이었다.
그날 학생들의 3할이 죽는다.
데미안으로 제대로 클리어한다고 해도 말이지.
그러니 막아야만 했다.
문제는 내가 이런 말을 해 봐야 증거가 없다면 믿을 리 없다는 건데...
증거 없이 강하게 주장해봐야, 나중에 사실로 밝혀져도 오히려 의심만 더해질 테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서.
그러면 블러핑을 좀 섞든가 해 볼까?
"짐승 냄새가 났거든. 저번에."
"씻고 살아."
......얘는 수인에게 죽게 놔둬도 되지 않을까.
얼마 전의 각오가 참, 무색해지는데.
"아니 진짜. 다물고 좀 들어. 내가 얼마 전에 지하수로인가 그걸 구경하러 갔었거든? 거기서 짐승 냄새가 났어."
거짓말이다. 거기선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원작에서도 밀리치야는 지하수로에서 튀어나왔다고 했으니까.
"사람 냄새는 확실하게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 동물 냄새도 아니었지. 그 두 가지가 괴상하게 섞인 냄새였거든. 위치까진 못 찾았지만...그래서, 혹시나 해서 말이야."
"지하수로...? 흐음, 그럴 리가 없긴 한데...일단 알겠어.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정확히 뭔데?"
프리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제대로 대화할 마음이 든 모양이지.
"수인의 특징이나 약점 같은 걸 알고 싶은데. 난 동부에서 살다 보니, 수인은 만나본 적이 없어서."
"특징이라... 2~3m 정도의 키에, 짐승과 사람을 뒤섞은 외형. 순혈에 가까울수록 짐승을 닮았고, 피가 옅으면 사람과 비슷해. 신체능력도 뛰어나고, 지성도 남아있지. 심지어 재생력까지 어느 정도 갖췄고."
프리데가 소파의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한마디로, 트롤과 오거와 사람의 장점만 섞은 뒤, 그걸 두 배쯤 늘려놓은 놈들이야. 하나하나가 괴물이지."
일단 일반생들이 정면으로 싸워서는 상대조차 못 할 수준이란 건 나도 안다.
그래서 굳이 프리데를 찾아온 것이었으니.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거야 내 전문이지."
그녀가 씨익 웃으며 무기가 전시되어 있던 벽을 가리켰다.
맹수의 이빨처럼 섬뜩하게 돋아있는 톱날들이, 천장의 조명을 반사하며 흉악한 빛을 발했다.
"트롤이랑 똑같아. 찢어발겨, 피를 흘리게 해. 재생 못 할 때까지."
"그게 다야?"
"아니면 뭐, 심장을 뽑거나, 목을 따던가? 훨씬 어렵겠지만 말이야."
좀 더 편한, 꼼수 같은 방법은 없나? 나 하나가 활개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나 말고 다른 녀석들도 쓸 수 있을 방법 같은 게 필요하단 말이지.
"나 말고 다른 학생들도 쓸 만한 방법 같은 건 없어? 결정적인 약점이라던가."
"그런 게 있었다면, 우리가 진작 저것들을 멸종시켰겠지."
정론이었다.
젠장할. 이러면 골치 아파지는데.
"은이 좀 효과가 있긴 한데, 무기로 쓰기에 좋은 금속은 아니라."
"강철 무기 표면에 도금한다든가 하면?"
"해 봤는데, 싸우다 보면 다 벗겨져 나가서. 뭐, 안 하는 것보단 낫지만."
안 하는 것보다 낫다면 해 보긴 해야겠지.
"마법은? 트롤은 불이나 전기에 약하잖아. 수인은 안 그런가?"
"그야 전신을 활활 불태우면 죽기야 하겠지만, 딱히 약점이라 할 수준은 아니야. 쉽게 맞아줄 놈들도 아니고."
하긴 생명체는 원래 불타면 죽는 게 정상이긴 하지.
맞추긴 힘들다지만 통하긴 한다 이건가.
"사제의 축복은?"
"아인종은 마물이 아니야. 메네스의 사제들이 쓰는 기적은 좀 효과가 있긴 하지만."
메네스인가. 달과 꿈의 신.
...메네스의 사제들은 거의 다 북부에 있으니, 이것도 무리겠네.
역시, 그나마 실력 좋은 녀석들에게 의지해야 하려나.
데미안이라던가 오필리아같이.
오필리아야 적극적으로 굴 리 없지만, 데미안은 같이 훈련하며 실력을 높이면 원작보단 나아질 것 같긴 한데.
그 녀석들을 방벽으로 삼아, 남은 학생을 강제로라도 한곳에 모아서 대처하면...
"...생각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네? 마치, 수인들이 덤벼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프리데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슬쩍 날 노려보았다.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역시 수상했나?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은 괜찮겠지.
"내 후각과 본능을 확신하는 거지. 내가 맡은 냄새가 수인이 맞다면, 숨어 있는 이유는 분명 뭔가 저지르려는 것일 테니까."
"제도에, 수인이라...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믿기는 어렵지만."
프리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할 이야기가 다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란 뜻인가.
"만약 제대로 된 증거를 가져온다면 아카데미랑 북부에 보고는 해 주지. 사실이라면 그건 확실히, 무척이나 위험한 일일 테니까."
결국 어떻게든 두 달 안에는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는 건가...
증거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미리 기사단이라도 소집해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설마 두 달이나 남았는데 못 찾기야 하겠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굴고, 까칠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거칠게 구는 하샬르...!
감각이 적의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태도가 나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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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이트님 후원 고맙습니다! 내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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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프리데...원래는 보통 귀족다운 냉정한 태도를 항상 유지하려 하는 성격이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야만인은 살면서 처음 겪어봤기에...컨셉이 무너져버린 것...!
그녀에게 술을 선물해준 건 알콜중독 엘프녀 페르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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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2]
카`하르인과 이종족들은 카`하르를 제대로 발음하지만
다른 일반 제국인 등의 사람들은 카하르라고 발음하는 것...!
정말 사소한 설정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