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화
나는 소꿉친구 연애담을 좋아한다
프리데와의 만남은 실로 어중간한 소득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일반생 대부분은 의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그나마 약점으로 쓸 만한 건 은을 도금해 두는 정도라...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까진 프리데도 움직이지 않을 테고.
게다가, 증거가 없으면 다른 이들이 대비하도록 설득하기도 힘들겠지.
설령 억지로 밀어붙여 대비를 갖춘다 해도 그 뒤가 문제가 된다.
습격 이후에 분명히 습격계획을 어떻게 알아챘느냐 하는 추궁이 돌아올 텐데, 딱히 답할 말이 없으니까.
혹시 그들과 엮여 있었냐는 의심이라도 사면 최악이다.
그런 의심은 크기를 불려 가며 끝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되기 마련이니까.
내가 아무리 수인들을 잘 막아낸다 해도.
일단 한번 의심하기 시작한 이상, 그조차도 사실 무슨 속셈이 있던 것이 아니겠냐며 끝없이 의혹만을 부풀리겠지.
확증편향이란 그런 것이니까.
짐승 냄새를 맡았다는 그런 어설픈 변명으로는 한계가 있다.
프리데조차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는데, 날 의심하는 사람들을 그런 말로 납득시키긴 어렵겠지.
그나마 프리데는 일단 습격이 사실로 밝혀지고 나면, 오히려 내 편이 되어주겠지만.
북부인들이 보기에 수인을 죽이는 사람은 무조건 같은 편이니까.
아마도.
결국 내가 수인들의 습격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대비시켜야 한다는 건데...
첫 단추부터 쉽지 않구나. 정말.
내 입지는 아직 불안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날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카`하르의 악녀라는 족쇄가 남아있는 한, 내가 하는 일들은 손발이 묶인 채로 강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이번 사건을 의혹 없이 해결해낸다면...그때부턴 좀 나아지겠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수인과 맞서 싸울 능력을 가진 녀석들부터 실력을 올려두는 정도인가.
실력을 올린다고 해도, 기껏해야 대련 등을 반복해서 경험을 쌓게 도와주는 게 한계겠지만.
일반생은 커리큘럼이 꽉 짜여 있으니까, 강의시간의 대련 외에는 여유시간이 나지 않는다.
수인과의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인원은 데미안, 오필리아, 에드가랑...밀리아 정도겠네.
실질적으로 내가 단련시킬 수 있는 건 데미안과 밀리아 뿐이고.
라나랑 한스도 내 말을 들어주긴 할 텐데, 라나는 대련이 의미가 없고 한스는...다른 건 몰라도 대련은 아마 무조건 거부하지 않을까.
...그래도 이젠 대련할 때 실력을 어중간하게 감출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전력으로 날뛰는 모습은 여전히 보여줄 것이 못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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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나이젤이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놓아두고, 뭔지 모를 글을 쓰고 있었다.
"아, 다녀오셨습니까? 프리데 공과의 대화는 도움이 되셨는지요?"
"애매했어. 아예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지만......그건 그렇고, 뭘 쓰고 있는 거야? 편지?"
나이젤이 펜을 내려놓고 종이를 집어들었다.
"후작님께 전해드릴 활동보고서입니다. 읽어보시겠습니까?"
"보고서? 그래. 잠깐 줘 봐."
역시 내 행적에 대해선 후작에게 보고하고 있었나 보네.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딱히 배신감을 느끼거나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나이젤은 내게 충실한 도움을 주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루드비히 후작의 기사이니까.
루드비히 후작 역시 후원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후원하는 인물의 동향을 보고받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닐 테고.
결국 나이젤이 옆에 있을 때는, 후작이 의심할 만한 행동들은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나마 보고서를 쓴다는 사실을 내게 감추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내게 불리할 내용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지는 않을 테니까.
나이젤이 내민 편지를 받아들어 슥 읽어보았다.
한 장의 종이에 요점만 적기 위해서인지, 상당히 딱딱한 어조로 작성된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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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황 >
특례입학생들과 관계 양호.
제국 검술의 이해와 습득속도가 뛰어남.
실력의 기복은 불안정하지만 빠른 속도로 성장 중.
< 불안요소 >
현재 아카데미 내부 평판이 좋지 않음.
대체로 출신과 과거사, 성향에 대한 편견.
*향후 극복 가능한 문제라 사료됨. 본인의 개선 의지 높음.
< 특이사항 >
데인인 성전사가 잠입. 크누트라는 남성. 암습으로 처리.
추후 문제가 될 요소는 없는 것으로 추정.
추신.
비용 지출이 예상 이상입니다. 활동비 제한의 완화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후작님께서 마력초를 권하셨던 것이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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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별문제 없는 보고서였다.
마력초 중독자 둘을 슬쩍 돌려까는듯한 추신 부분만 빼면.
"뭐 그럭저럭이네. 이대로 루드비히 후작에게 보내려고?"
"그렇습니다. 후작님께서 활동비 제한을 좀 풀어주신다면 다행이지만...그건 크게 기대하진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이젤이 고개를 내저었다. 주말마다 습관적으로 복권을 사는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언감생심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약 당첨된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복잡미묘한 표정.
...확실히 여윳돈이 늘어나면 도움이 되긴 할 텐데.
모험가 길드를 찾아가 토벌의뢰를 받으면 되긴 하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시간이 꽤 들어가니까.
마물이라면 모를까, 트롤이나 오거랑 싸우는 정도로는 실력 향상에도 이젠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테고.
편지를 돌려주고 잘 준비를 했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며 앞으로 할 일들을 고민하며 눈을 감았다.
일단 대련 강의에 나가서 데미안과 밀리아를 키우고...
아샤에게 도금할 은을 요청할 변명거리도 생각해보고......
나중에 지하수로에도 다시 가 봐야 할 테니, 그럴싸한 이유도 생각해둬야 하겠네.
할 일이 참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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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전투 강의에 참석했다.
오늘 강의는 다시 야외 대련이었다.
오전에는 칼라인 교수가 지정한 상대와 대련해야 했고, 오후에는 자유대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데미안과 밀리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해왔다.
"아, 하샬르."
"반가워. 요즘은 강의에 자주 나오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셋이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학생들의 대련을 구경했다.
저번 기마전투 수업에선 누가 말에게 깨물렸다느니, 신체단련 수업 때 데미안이 신입생 최고 기록을 세웠다느니,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 자랑할 정도는 아니라며 데미안이 멋쩍게 웃었다.
슬쩍슬쩍 내 팔을 쳐다보면서.
아니 뭐, 인간 신입생 1위면 자랑할 게 맞긴 하지.
내 몸이야 탈 인간 급이니 예외로 치고.
오전 대련은 각자의 실력에 맞추어 적당한 상대를 배치한 것인지, 다들 비등비등하게 싸웠다.
어느새 다들 군기가 바싹 들어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기세가 꽤 매서웠다.
밀리아의 상대는 에드가였는데...놀랍게도 밀리아가 승리했다.
에드가는 자잘한 관통상을 전부 회복하며 밀어붙였지만, 방심을 노린 밀리아의 일격이 목덜미를 건드리자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실전이었다면 목을 꿰뚫려 죽었을 터이니.
치유의 축복이 있다고 해도 즉사해버리면 의미가 없으니까.
밀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보고 세검을 붕붕 흔들었다.
그러다가 칼라인 교수한테 한소리 듣고 돌아왔지만.
데미안의 상대는 오필리아였다.
제대로 싸운다면 참 볼 만한 대련이 되겠지만, 그럴 리 없지.
오필리아는 구석에서 긴 마력초만 태우고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자 대충 걸어나온 뒤 그냥 기권했다.
교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지만, 오필리아는 느긋하게 연기를 뿜어대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데미안은 허탈한 듯 대검을 축 늘어뜨렸다.
결국 칼라인 교수가 데미안의 상대로 다른 학생을 배정했다.
본래 내 상대가 될 예정이었던, 마법학부의 청년이었다.
마법학부 입학시험 1위라고 했던가.
나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얼굴이 푸르죽죽했던 청년이, 상대가 데미안으로 바뀌자 화색이 되어 걸어나오는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그럭저럭 볼만한 대련이었다.
도약과 돌진, 회전을 주축으로 삼은 데미안의 검술은 여전히 호쾌했고, 상대하는 청년 역시 화려한 마법들을 난사했다.
쉴새 없이 연속되는 폭음과 함께 연병장 여기저기가 파여나가며 잔해를 흩뿌렸다.
데미안이 대련하는 틈에, 밀리아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아까 보니 검술도 그럭저럭 늘기는 했는데, 그래도 활을 권해보긴 할 생각이라.
"밀리아.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냐?"
"응?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물어봐도 돼."
밀리아가 내 쪽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왜 기사가 되기로 한 거야?"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데미안을 동경하기 때문이라는 설정이었지.
그래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운을 띄우기엔 딱 적당한 질문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고민하던 밀리아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러네, 조금 긴 이야기인데."
밀리아는 데미안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나랑 데미안은 같은 마을에서 살았거든. 데미안은...열 살 때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어."
옛 과거를 추억하듯 머나먼 것을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처음에는 좀 꺼려졌었어. 말도 없고 웃지도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거든. 그런데 언제부턴가 점점 잘 웃게 되었지. 집안일도 이것저것 도와주기 시작했고."
과거엔 생각보다 음침한 아이였던 모양이네.
지금의 상쾌한 모양새를 보면 상상이 가지 않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그러다가 열두 살 때, 우리 집에 나쁜 사람이 찾아왔었어. 도적이었는데, 토벌대로 찾아온 기사들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이었지. 숨을 곳을 찾아 우리 집까지 온 거야. 우리 집은 마을 외곽에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그때 하필 집에는 나와 데미안 단둘 만이 남아있었고."
밀리아가 살짝 몸을 떨었다.
"무서웠어. 나한테 아주 안 좋은 짓들을 하려 했거든. 나는 그냥 울면서 도와달라고 소리만 쳤었지."
그때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린 것인지, 그녀의 안색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그때, 데미안이 날 구해줬어. 집에 있던 농기구를 들고, 그 남자와 싸웠지. 그때까지는 한 번도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 없으면서. 떨지도 않고. 날 지켜줬어."
밀리아가 데미안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대검 한 자루를 들고, 마법을 피하고 막고 쳐내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소년의 모습을.
"결국 그 남자는 데미안이 물리쳤어. 데미안도 크게 다치긴 했지만. 도적을 추적해온 기사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몰라."
마법학부생에게 가까이 다가간 데미안이 대검을 쳐들었다.
"나는 피범벅이 된 데미안을 보고 엉엉 울기만 했는데. 데미안은 웃었지. 나한테, 괜찮냐면서.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면서."
밀리아가 속삭이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데미안의 대검이 마력장벽을 부쉈다.
"그때부터였어. 내가 데미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게......아니, 아니네. 데미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데미안의 곁에,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지. 같이 걸어가고 싶었어."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마법학부생이 맥없이 무릎 꿇었다.
데미안이 대검을 거두고 몸을 바로세웠다.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언젠가 용사가 될 소년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었다.
"응. 데미안은, 내 용사님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기사가 되기로 한 거야.
밀리아가 따스하게 웃었다.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데미안과 밀리아의 과거...옆에서보면 누가봐도 용사 새싹인 데미안...!
하샬르가 난감한 기분이 된 이유는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