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화
하루 종일 설득만 늘어놓는 기분인데
훈훈하게 미소짓는 밀리아의 모습에, 나는 그저 입꼬리를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운을 띄울 겸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본 질문이었는데...생각보다 무거운 대답이 돌아와 버렸다.
결국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게임 속 설정을 좀 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 정말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였는지.
설정들이 말해주는 건 고작해야 단편적인 정보들뿐이었는데.
데미안과 소꿉친구라는 것, 그를 동경해 기사를 지망한다는 것.
실력이 부족해서 고생하는 와중에, 데미안의 파티원이 늘어날 때마다 표정이 나빠지다가...끝내 타락한다는 결말.
그리고 사실 검보다 활에 재능이 있다는 점. 그것뿐이었다.
사람 하나를 이해했다고 여기기엔 턱없이 부족한 내용에 불과했다.
그녀의 선한 본성도, 데미안을 향한 동경의 깊이도.
기사를 향한 열망도.
직접 만나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조금, 양심을 쿡 찌르는 듯한...그런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상에선 나도 자주 써먹었었으니까.
밀리아의 자살특공으로 초반을 빠르게 클리어하는 사탄 같은 공략법을.
레벨 낮은 캐릭터 하나를 버리는 것만으로, 나중의 보스몹도 하나 줄이고......주인공에게 초반 경험치 버프까지 걸리니까.
나는 슬쩍 밀리아의 얼굴을 피했다.
여러모로 난감했다.
그래도 그건 게임이었고, 예전 일이니까 넘어간다고 쳐도...
나는 이제부터 그녀가 동경하는 데미안을 대련으로 두들겨야 했고, 그녀에게 검 대신 활을 잡으라 조언해야 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어 놓고 말이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려나...
'넌 검보단 활이 더 어울려.' 같은 가벼운 소리는 입이 찢어져도 꺼낼 수 없겠고.
"하샬르?"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밀리아가 다시 날 쳐다보았다.
"어...좋은, 이야기네. 그래. 그러니까, 데미안과 같이 싸우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거지?"
"응. 아직 데미안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지."
안 되더라.
여긴 게임이 아니니까, 만에 하나 진짜로 검으로 강해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방법은 없어서.
그렇다고 저렇게 웃는 얼굴을 상대로 턱도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차선책으로 가자.
"흐음...그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어때?"
"하샬르 네가? 어떻게?"
활을 들어라.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일단...아 그래, 기사라는 건 결국 제국인들의 전사인 거잖아? 그렇다면 전사의 소양부터 갖추는 게 맞겠지."
좋아. 설득할 방법이 번뜩였다.
"전사의 소양...?"
"카`하르에서 전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무조건 갖춰야 해. 무예, 기마술, 그리고 궁술까지.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것이 우리들의 기본 전술이니까, 전사라면 당연히 익혀야 할 것들이지. 그러니까, 밀리아 너도 한번 활을 연습해보는 건 어때? 의외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잖냐."
"활이라..."
밀리아는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하긴, 그야 제국의 기사는 딱히 궁술을 연습하지는 않으니까.
활 쏘기는 궁수들에게 맡기고, 본인들은 그 시간에 무예를 연마하지.
"익혀둬서 나쁠 건 없어. 궁술을 배워두는 것만으로도 대응능력과 전술의 폭이 확 늘어나니까. 데미안과 함께 다니다 보면, 나중에 어떤 적들을 만나게 될 지 모르잖아? 여러모로 꽤 도움이 될 거야."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절대 강요할 생각은 없다는 의도가 잘 전해지도록.
"딱히 그쪽에 집중하라는건 아니고, 그냥 배워두면 좋다는 정도지만."
일단 활을 잡게 만들기만 하면 그 뒤는 밀리아 본인이 선택하겠지.
그냥 검술만 가지고 발버둥칠지, 아니면 자기 재능을 살려볼지 말이야.
그 선택까지 내가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인생이니, 뭘 선택하든 그녀의 자유니까.
결국 검술만을 선택해 강해지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지켜주면 될 테니까. 죽지 않도록, 엇나가지 않도록.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하샬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알았어. 한번 생각해 볼게."
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본다, 인가.
나쁘진 않네. 그렇게 말할 정도면, 다음 병기술 수업 때 활을 한번 들려줘 보면 되겠어.
지금 해 보자니, 내 활은 아마 밀리아의 근력으로는 당기지 못할 테니까.
"그래. 활 말고 검술도, 내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말고."
"응. 고마워."
밀리아가 말이 잘 통하는 타입이라 다행이었다.
검술은 대련하면서 단점을 짚어주는 방식으로 도와줄 생각이다.
제국 검술을 가르쳐주자니, 그건 장검의 활용에 기반한 검술이라 세검과는 잘 맞지 않아서 애매하고.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대련을 마치고 돌아온 데미안이 우리 둘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전사라면 활쏘기를 배워두는 게 좋다던가 하는."
"밀리아가, 활을? 음...나쁘지는 않겠네. 나나 밀리아나 전위직이다 보니, 멀리 있는 적을 상대할 방법이 부족하니까."
잘 말했다, 데미안. 역시 용사다운 훌륭한 도움이었다.
이걸로 밀리아가 활을 연습할 확률이 5배쯤 올라갔으리라.
슬쩍 쳐다보니 벌써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긴, 그야 친구의 설득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 더 효과적이긴 하겠지.
이걸로 밀리아의 설득은 대충 성공한 것 같고, 다음은 데미안이네.
"그건 그렇고, 데미안."
"왜?"
너는 실력을 좀 끌어 올릴 필요가 있어.
굳이 대검 하나만 파겠다면, 실력으로 압도하기라도 해야지.
"오후에는 자유대련이라 했으니까. 나랑 한판 하자. 벌써 상대를 정해놓진 않았겠지?"
"어, 하샬르...?"
대련 신청은 데미안에게 했는데, 정작 깜짝 놀란 것은 밀리아였다.
"내가, 하샬르 너랑? ...못 이길 것 같은데."
데미안이 난감하다는 듯이 슬쩍 웃었다.
그야 당연히 못 이기지. 설마 나한테 이길 생각이었냐.
아직 성검도 없고, 영웅은커녕 달인급도 아니면서.
그런 너한테 질정도면 내가 그동안 흘린 피땀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그럼 이길 수 있는 상대랑만 싸우려고? 그래서야 실력이 늘 리가 있겠냐. 못 이길 상대랑도 싸워 봐야지."
"그 말이 맞긴 하네...알았어."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데미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주로 데미안 쪽을.
"저기, 하샬르...그, 저번처럼 할 건 아니지...?"
아무래도 첫 대련 때 중경상 넷에 중상자 하나를 만들었던 일이 마음에 걸리나 본데.
그야 당연히 그 정도로 싸울 생각은 아니다.
그때는 힘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내 인상을 확실하게 박아둬야 하니,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저지른 거고.
이번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와선 딱히 효과도 없을 테고.
다들 코볼트나 트롤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경험한 시점에서, 유혈엔 익숙해진 상태니까.
이젠 제대로 힘을 증명해야 할 때였다.
데미안도 단련시키고, 내 강함도 증명해두고. 일거양득이지.
"걱정 안 해도 돼. 적당히 두들기기만 할 거니까."
데미안은 강철과 같은 사내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진다는 점에서.
망치질을 좀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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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강의를 마치고, 특별관으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했다.
내 상대였던 마법학부생이 데미안의 상대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난 결국 오전 대련에선 열외로 처리되었다.
어차피 남은 인원들 중에선 딱히 내 상대가 될 만한 녀석도 없었고.
식당에 앉아있던 프리데가 날 흘끗 보더니, 무시하고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태도가 나아진 것 같긴 하네.
남은 시간엔 아샤를 찾아가보았다.
은 도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 했으니까.
"은 도금이요? 그야 뭐 은이 있으면 도금은 금방이긴 한데, 뜬금없이 왜요?"
"수인이나 마물 상대로 은이 효과가 있다고 들어서. 도금해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녀석들과 싸울 일이 있나 보죠?"
아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싸움이란 말에 눈을 빛냈다.
"음...아마 쓰게 된다면 2학년 이후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일단은 미리 준비해두려는 거지."
"그걸 벌써부터 준비한다고요?"
역시 물어보는구나.
하긴 상식적으로 내년에나 필요할 물건을 굳이 지금 준비할 필요가 없긴 하니까.
적당한 변명은 이미 생각해두긴 했지만.
"...이건 추측이긴 하지만, 그때쯤이면 은 가격이 크게 오를 것 같거든."
"그건 꽤 흥미로운 이야기인데요...은 가격이 왜요?"
검지를 치켜들고 입가에 살짝 가져다 댔다.
너한테만 말해주는 중요한 정보니까, 비밀로 하라는 듯이.
"동부에 있을 때 궁에서 수인들에 대해 들은 적 있거든? 북부 설원의 동향에 대해서는 카`하르도 꽤 신경 쓰는 편이라서."
카`하르가 수인들에 대해 신경 쓴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수인들이 준동하면 보통 제국의 눈길이 북쪽으로 집중되기에, 그 틈을 노려 활개치기 편해지니까.
"내가 듣기로, 수인들의 기세가 요즘 심상치 않은 것이, 얼마 안 가 다시 대규모 침공을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만약 그렇게 되면 은 수요가 크게 늘어날 테니까, 그때 가서 사려고 하면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가겠지?"
"어...사실이라면 꽤 좋은 정보긴 한데......으음...은 사재기를...흐으으음......"
아샤가 머릿속으로 돈 계산이라도 하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저러다가 설마 전 재산을 은을 사는데 갖다 박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알았어요.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 은을 가져오거나 재료비만 내면 해 드릴게요."
일단 확답을 받기는 했다.
남은 문제는, 내게 은을 대량으로 구매할 정도의 돈이 없다는 건데...
어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좀 빌려줄, 손 큰 호구 하나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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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와 이야기를 끝내고 연병장으로 되돌아왔다.
이전과는 달리 자유대련 역시 대부분의 인원이 참여의지를 밝혀온 탓에, 나와 데미안의 차례는 한참 나중이었다.
실력은 여전히 애매하지만, 다들 조금이라도 강해지려는 마음이 들었다면 좋은 일이겠지.
그 조금이 나중에 생사를 결정하는 경계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
얼마 후 나와 데미안의 차례가 다가왔다.
흑철 장검에 경화 점액을 발라 날을 없애고, 연병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주위에서 날 보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예전만큼 크게 일렁이는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경멸이든 공포든, 다들 아무래도 꽤 무뎌지긴 한 모양이야?
그럼 이제 경외감을 느끼게 해 줄 차례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좋은 밤이에요! 날이 꽤 많이 따뜻?해 졌네요.
하샬르가 난감해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답니다!
게임할 때 밀리아를 경험치 사탕으로 써 버리곤 했던 일.
기사가 되겠다고 눈을 빛내는 애한테 활을 권해야한다는 점.
데미안의 활약을 보고 동경하는 친구 앞에서 데미안을 패배시켜야 한다는 점이지요!
처음엔 밀리아를 약간 관심병사 막내 보듯이 여기고 있었기에, 그녀의 심리상태까지 크게 신경쓰진 않았지만...
지금은 친?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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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는 실버코인을 탈 지도 모르겠네요!
화성에 갈 지, 한강에 갈 지...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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