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화
대화재
======[지하수로]======
16일째의 저녁.
지하수만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던 수로가, 격한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평소의 고요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르렁대는 숨소리와 짐승의 누린내가 지하공간을 가득 채웠다.
수로의 물고기들은 겁에 질린 채 강바닥으로 숨어들었다.
대전사 셋. 순혈 전사 열둘. 그리고 혼혈 전사가 열셋.
스물여덟에 달하는, 밀리치야의 전원이 마침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믿음직스럽지 않나, 안드레이?"
보리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만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글쎄......그래. 그렇군. 참으로 믿음직해."
안드레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보리스를 슬쩍 쳐다보고는 동의했다.
'굳이, 사기를 꺾을 필요는 없겠지.'
늙은 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목적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오늘 밤 자신들 중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국의 수도를 습격한 자들에게 퇴로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보리스는 아직 젊은 탓인지, 그저 복수와 전투의 희열만을 상상하며 웃고 있었지만.
아니. 그 역시 알고 있으리라. 신경 쓰지 않을 뿐이지.
밀리치야는 본래 이러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으니.
제국을 향해 쏘아진 뒤, 부러질 화살.
그것이 밀리치야였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지? 열등 혼혈들이라면 이미 뭐든지 저지를 준비를 마친 상태인데."
"그거야 이제부터 설명할 참이지."
나탈리아의 물음에 보리스가 그녀 쪽을 돌아보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다섯 개의 손가락 중, 세 개만을 편 채로.
"부대를 셋으로 나눈다. 나, 안드레이, 그리고 나탈리아 네가 각각의 지휘를 담당하고. 각각, 습격대, 결사대, 행동대라 부르지."
"결사대라..."
그 불온한 어감에 안드레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마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쓰러지게 되겠지.
바라마지 않던, 훌륭한 죽음이다.
"적의 발을 묶고, 제도를 혼란에 빠트려 어린놈들을 꺼낸 뒤, 본래 목표를 습격한다. 자세한 계획은......"
보리스가 상세한 작전계획을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수인들이, 보리스의 말이 끝나자 그르렁대며 웃었다.
"...나쁘지않은 계획이로군. 그렇다면, 난 언제쯤 시작하면 되지?"
"자정에, 나탈리아가 봉화를 당기고...그래, 20분 후 정도면 되겠군. 그게 본격적인 축제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안드레이의 질문에 대답한 보리스가, 모두를 바라보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스스로에게 감격하고, 그들을 선동하면서.
강한 확신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마침내 이때가 왔다. 전사들이여!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손으로, 정당한 복수를 이루어낼 영광의 날이! 혹한의 대지로 추방당한 선조들을 위해, 살해당하고 노예가 된 동포들을 위해! 가증스러운 인간의 제국을 불사를 순간이!"
긴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전사들이 이에 답하듯 거칠게 울부짖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피로 이 세상에 발톱 자국을 남길 것이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새기리라!"
울려 퍼지는 짐승들의 포효에 수로의 기둥들이 몸을 떨었다.
세 시간 뒤, 제도 전역에 맹렬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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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샬르님! 일어나십시오, 하샬르 님! 비상사태입니다!"
나이젤의 고함이 잠을 깨웠다.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급박함과 경악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아직 조금 비몽사몽한 상태로 침대에서 비척이며 일어났다.
"...비상 사태라니, 뭔데.....?"
"밖을 보십시오! 제도가...!"
나이젤의 말에 커튼을 젖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야. 이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기운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제도가 불타고 있었다.
화려했던 도시 여기저기에 세찬 불길이 피어오르며, 재와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화마를 피해 도주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흐릿하게 울려 퍼졌다.
밤이 오지 않는 도시는, 이젠 낮보다도 더 밝아져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게임에서 이 장면을 본 적이 있기는 했으니까.
문제는, 그건 헤르셀라가 제도를 습격할 때의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이젤!"
"저도 모릅니다! 사고인지, 방화인지. 갑작스럽게 제도 전역에 불길이 피어올랐습니다! 일단 무장하십시오! 저는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나이젤의 달음박질 소리가 멀어져갔다.
황급히 장비를 챙겨 들었다. 손끝이 당황으로 떨렸다.
어째서.
이 시점에, 제도에 대화재라고? 대체 누가...
설마.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등골이 떨려왔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아니야. 설마. 왜.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두드리고, 볼을 타고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린다.
이 시점에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
이 시점에 그런 결정을 했을 리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수인들이 굳이 이런 무리까지 두어 가며, 습격을 앞당길 이유가 어디에도 없잖아.
저런 난동을 벌여봐야 제도의 기사들이 출진하면 얼마 못 가 진압될 텐데.
이런 변수가 발생할 이유가-
아.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호흡이 멎었다.
있었다.
단 하나, 이 세상에 떨어진 이물질이.
이 세계의 무언가가 바뀌었다면, 애초부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다시 한번 창 밖을 쳐다보았다.
불길 속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는 제국의 수도를.
고민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나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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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상황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습격자들이, 제도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다 합니다! 일단 황궁 쪽의 기사들을 파견해 진압할 예정이니, 아카데미생들은 대기를-"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딱 보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와 나이젤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제도의 북쪽.
화려하게 반짝이던 황궁의 외벽 한구석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수백년간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제국의 상징에, 잊지 못할 흉터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저건, 대체...?"
나이젤이 눈가를 떨었다.
나 역시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전율했다.
단순히 벽이 무너진 것 때문이 아니다.
저 정도야 나나 나이젤이라도 할 수 있는 짓이니.
밀리치야의 대전사 역시 저런 파괴공작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황궁이 공격당했다는 사실 자체였다.
양동이다.
이렇게 되면, 제국의 기사들은 황궁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어.
그들에게 황실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그러면, 제도의 화재를 진압하는 일은 누가 담당하지?
답은 하나뿐이다.
아카데미생들을 내보내겠지.
적들이 원하는 대로, 분산해서.
안 돼.
막아야 한다. 최소한 적의 정체가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어째서인지 아카데미는 적들이 수인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까.
그대로 본관 쪽으로 달려가려다, 순간 발이 멎었다.
잠깐, 잠깐만.
그러면 여긴 어떻게 되지?
이놈들의 목적은 원래, 특별관이잖아.
원작에선 큰 피해 없이 격퇴된다. 그때의 특별관엔, 특례입학생 전원이 있었을 테니까.
페르네, 칼릭스, 레이시, 프리데, 아샤. 그리고 에비앙인가 하는 놈까지.
아마 칼릭스나 레이시, 에비앙의 호위들도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단 셋뿐이다.
페르네. 프리데. 아샤.
적의 습격이 너무 빨랐다. 한 달이나 일찍 공격해올 줄이야.
아니, 내가 안일했다.
프리데의 말을 들었던 날, 그때 느꼈던 의혹을 기우로 흘려넘기지 말고, 곧바로 행동했어야 했다.
이틀이나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저 세 명만 가지고, 이곳으로 찾아올 별동대를 막아낼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손끝이 덜덜 떨렸다. 깊이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이 순간에도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데다가, 점점 희생자들이 늘어날 테니.
마굿간으로 달려가, 묶여있던 말고삐를 풀고 안장을 올렸다.
나이젤이 황급히 뒤쫓아왔다.
"하샬르 님?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본관이다. 일반생들 쪽으로 갈 테니, 나이젤 넌 특별관을 지켜!"
"무슨 말씀을...! 제 임무는 하샬르 님의 호위입니다!"
그녀가 격하게 반대했다. 타당한 반박이었다.
그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까, 일단 날 지키려 하겠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아카데미가 일반생들을 내보낸다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기 전에, 당장 가서 말려야 했다.
의심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명령이야! 적의 양동이다. 양 쪽 모두를 지켜야 해!"
"적? 양동? 설마, 저 방화의 목적이 아카데미라는 겁니까? 무슨 근거로...!"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일단 프리데에게 알리고, 모여서 이곳을 방어해! 나도 금방 돌아올 테니!"
일단 일반관에 위험을 알린 뒤 돌아올 생각이었다.
적들이 수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일반생을 내보내더라도 최소한 분산시키진 않을 테니.
아마 교수들도 동행할 테고.
그 뒤에, 특별관을 습격해오는 놈들을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뒤이어 일반생들을 도와 제도에 불을 지른 놈들까지 처리한다.
고작 이것이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흐음, 눈치가 꽤 빠른데......본능적인 직감인가? 아무튼, 그렇게 놔둘 수야 없지."
갑작스럽게, 짐승들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나이젤이 경악하며 창을 꺼내 들었다.
말도 안 돼. 내 감각을 속이고, 이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아카데미의 외벽.
일곱 개의 그림자가, 불타는 제도를 뒤로 한 채 벽돌 울타리 위에 올라서 있었다.
몬스터에 가까운 거대한 체구. 털로 뒤덮인 근육질의 몸. 짐승의 형상을 한 머리.
체구에 걸맞은 갑옷을 걸친 채, 거대한 무기들을 들고 있는 괴물들.
"하샬르 님, 주의하십시오. 저건, 저 놈들은...!"
나이젤의 목소리가 확 잦아들었다.
감당하기 까다로운 위기상황이라는 듯이.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수인."
그것도, 순혈의 수인 전사들.
"그래, 바로 맞췄다. 우리는 밀리치야. 혹한의 왕국, 바랴크루스의 첫 번째 화살. 너희를 죽일 발톱이지!"
가운데에 서 있던 늑대와 비슷한 수인이 목울대를 울렸다.
놈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인사하듯 가리켰다.
"내 이름은 이바노프. 밀리치야의 머리이자, 바랴크루스의 대전사. 보리스 이바노프다!"
긴 포효가 울려 퍼졌다.
아는 이름이었다.
원작대로였다면, 신입생들을 습격해 그 대부분을 도살하는 주범.
검은 늑대 이바노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하루하루가 고민과 도전의 연속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