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화
첫 격돌
자신을 보리스라 소개한 늑대가 가볍게 뛰어내려 지면에 착지했다.
그를 뒤따라, 좌우에 늘어서 있던 여섯 마리의 수인들이 연이어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하나하나가 육중한 거구임에도 착지하는 소리는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놈들이 으르렁대며, 갑옷 위에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 같은 천 자락을 걷어낸다.
짐승의 기척이 급속도로 짙어졌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마법이 걸린 망토라는 거겠지.
상대 쪽에서 드러내기 전까진 기척을 거의 알아챌 수 없게 만드는, 인식 저해 계통의 마법.
이 시점에 그 효과를 풀어버린다는 건, 전투로 파손되거나 하는 걸 경계하는 건가?
아니면 애초에 전투 시엔 효과가 없는 종류인가?
아니, 지금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예비품인 흑철 검 따위가 아닌, 아이멜라의 검을.
남의 눈을 신경 써 가며 힘을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나이젤이 보리스를 묶어둔다고 해도, 나 혼자 순혈 전사 여섯을 동시에 상대해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그러나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적어도, 지원이 올 때까지는.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은은한 푸른 광택이 달빛처럼 검신을 맴돌았다.
진은으로 만들어진 검이니 수인들 상대로도 효과가 뛰어나겠지.
서릿발을 쓸 수 없는 이상, 이 검의 성능만을 믿어야 했다.
그걸 끼고 싸웠다가는...결국 나이젤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직은.
보리스가 장검을 뽑아 든 나를 보고 이를 드러냈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웃으며.
"그래. 옆의 계집이 분명, 너를 하샬르라 불렀었지?"
보리스의 말을 들은 나이젤이 내 쪽을 흘끗 보더니 실수했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를, 알고 있었나?
"하샬르 아이샨기오르. 카`하르의 암캐...운이 좋은걸. 최우선 목표가 곧바로 나타나 줄 줄이야!"
뽑아 든 대도가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그 크기와 무게는 데미안의 대검에도 견줄 만했다.
데미안과 달리, 저들에게는 한 손으로 휘두르는 평범한 무기에 불과했지만.
"최우선 목표라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마치, 이 모든 일을 나 때문에 벌인 것이라는 소리처럼 들려서.
나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는 듯이.
"설마 카`하르마저 제국의 개가 되어버릴 줄은 몰랐거든. 그러면 곤란하지. 제국의 적이, 우리밖에 남지 않잖아. 이건 배신이라고."
보리스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섯 마리의 수인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뽑아 들고 서서히 다가왔다.
숨이 막힐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저질렀던 평화협정이 문제였다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제국과 카`하르의 관계, 오르한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만을 고민했지.
설마 수인들조차 카`하르에 신경 쓸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서로 별 접점이 없는 관계였으니까.
멍청하게도.
거머쥔 검 끝이 부르르 떨렸다.
간과해왔던 책임. 그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일곱 마리의 짐승과 불타오르는 도시의 모습으로.
아니,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이놈들을 쓰러트리고 구하면 돼.
이기면 되는 거야.
이기면.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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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시간도 얼마 없으니, 대화는 여기까지다."
보리스가 다른 수인들을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우리 쪽을 가리켰다.
"내가 저 남색 머리를 맡을 테니, 나머지는 아이샨기오르를 죽여라. 아직 나탈리아가 오지 않았지만...여섯이면 충분하겠지."
"하샬르 님, 피하십시오!"
나이젤이 수인들에게 창을 겨누며 내 앞을 막아섰다.
굳은 눈매에 긴장감과 결의가 가득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내겠다는 듯이.
피하라고?
그럴 수 없다. 아무리 나이젤이 달인 급이라 해도, 이 숫자를 상대로는 이기지 못한다.
보리스만으로도 상대하기 벅찰 텐데 순혈 여섯이 협공하면 버티기도 힘들 테니.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네. 나이젤."
"하샬르 님!"
나이젤의 말을 무시하고, 장검을 치켜세웠다.
여기서 물러난다는 건 나이젤을 이 짐승들 손에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제국인을 꽤 아끼는구나, 카`하르. 벌써 제국에 길들여진 거냐? ...뭐, 좋다. 너와 저년을 죽이고, 나머지 배신자 놈들도 아침이 오기 전까지 전부 토막 내주마. 제국 놈들에게 꼬리를 흔든 대가를 치를 때다!"
보리스가 포효했다.
여섯 마리의 맹수들이 잇달아 울부짖었다.
가슴 속에 차오르는 절망감을 억지로 짓눌렀다.
시간이 없는데, 적이 너무 강했다.
승산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웃기네."
싸늘한 목소리가 포효를 끊었다.
"짐승 새끼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소리를 질러대."
나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프리데가 특별관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모피 코트 여기저기에 금속 보호구를 덧댄 차림에, 오른손에는 커다란 톱을 마치 도끼처럼 쥐고 있었다.
가시가 달린 메이스가 허리춤에서 흔들거렸고, 등 뒤로 펌프가 달린 창까지 메고 온 상태였다.
"진짜.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젠장할."
경멸과 짜증과 분노가 한계까지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 은발에 톱날 도끼...페일룬의 공녀, 프리데인가."
"개 주제에, 내 이름을 입에 담아?"
프리데가 신경질적으로 단검을 내던졌다.
쏘아진 단검이 보리스의 발톱에 맞고 튕겨 나갔다.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며, 프리데가 내 옆으로 걸어왔다.
"프리데...!"
"진은 장검 하나만 믿고, 순혈 여섯과 싸울 생각이었어? 목숨이 다섯 개쯤 되나 보지, 야만인?"
프리데가 슬쩍 내 검을 쳐다보고는, 그 재질을 알아보았는지 나를 비꼬았다.
의외로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기는 했지만.
검의 재질은 알아보았지만, 정체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건가?
하긴 검신에 쓰인 작은 문장 따위, 이 야밤엔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이 문장, 저번엔 뭔가 금빛으로 빛났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 없이 잠잠했다.
"순수한 진은이라니, 그런 귀한 물건을 어디서 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나중 일이지."
프리데가 왼손을 머리 뒤로 뻗어,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뽑아 들었다.
"절반만 맡아.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다른 사람들은? 아직 건물 안이야?"
페르네야 그렇다 쳐도, 아샤는 뭘 하고 있지?
"네 친구라면 지금 틀어박혀 무기를 준비하는 중이야. 일이 이렇게 꼬인 이상, 예비로 쌓아놨던 은 화살을 일반생들에게 건네주긴 늦었으니까. 그걸 쓸 방법을 마련한다던데."
"페르네는?"
그 전설 속 15학번은 뭘 하는데?
설마 사태가 이 지경인데 여전히 만취해 자고 있기라도 한 거냐.
"몰라. 그 여자는 멋대로 알아서 하겠지. 싸우든 구경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대책 없는 대답이었다.
"아니 무슨 그딴..."
"그게 요정이니까. 그만 징징거리고 싸울 준비나 해. 온다."
프리데의 눈빛에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그녀라 해도 순혈 여섯을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나 역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사투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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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쪽은 뭐라고 부르면 되지? 오늘 밤 잡아먹을 메뉴의 이름은 알아두어야지."
대도를 치켜든 보리스가 나이젤에게 다가갔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당연히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 가득한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나이젤이 기세를 끌어올리며 창을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위험한 적이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제국의 방패, 란덴부르크의 기사. 나이젤이다!"
나이젤이 검은 늑대를 향해 돌진했다.
대도와 장창이 충돌하며 굉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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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큿!"
미처 피하지 못한 창날에 스쳐, 뺨에서 피가 솟구친다.
새로 맞춘 갑옷은 이미 여기저기 부서지기 시작했다.
호흡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프리데의 도움이 있다고 하나, 수인 여섯과의 난전은 매 순간이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으니.
내리쳐지는 도끼날을 피해 바닥을 구른다.
창끝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눈을 꿰뚫으려는 창을 피해내고 튕기듯 일어난다.
"하앗!"
장검이 호를 그리며 억센 털가죽을 찢는다. 검 끝에 찢겨나간 상처에서 옅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크으으...낫질 않는군. 역시 진은인가."
팔뚝을 베인 회색 늑대, 볼코프가 신음했다.
재차 공격하려는 순간, 옆구리로 발톱 달린 발이 날아들었다.
사자 수인, 알렉세이의 발이었다.
허리를 틀어 간신히 피한다. 스커트가 쭉 찢어지며, 드러난 속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아릿한 통증이 열기가 되어 스며든다.
"크오오!"
정면으로, 거대한 주먹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왼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받아쳤다.
- 콰앙!
폭음과 함께, 몸이 뒤로 나가떨어진다.
정면에서 맞부딪쳐 밀려난 경험은 처음이었다.
트롤과의 싸움에서도 불안정한 자세로 일격을 막아낼 때 빼고는, 힘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는데.
근력은 놀랍게도 내 쪽이 약간이나마 우세했지만, 근본적인 체중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다행히 흑철 건틀릿은 부서지지 않고 버텨주었다.
오히려 맨손이던 갈색곰 수인, 카메네프의 주먹이 크게 파여나가 있었다.
서서히 재생되고 있긴 했지만.
역시, 아이멜라의 검이 아니라면 제대로 피해를 줄 수 없는 건가.
1:1이라면 할 만하고 2:1이라도 이길 것 같은데, 6:2는 이야기가 좀 많이 달랐다.
이런 식의 합공에 능숙한 것인지, 서너 명이 동시에 몰아붙여 공격하고 물러서길 반복하는 연계에 제대로 반격할 틈 자체가 나오질 않았다.
평소처럼 몸을 내던지듯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한 마리야 확실히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그 틈을 노려오는 다른 놈들의 공격에 너무 취약해진다.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면 그걸로 끝이다. 사람과 달리 수인에게 제대로 맞으면 그 한방으로 중상이니까.
그러니 최대한 틈을 내주지 않고 피하면서 싸워야 했다.
그나마 프리데가 없었다면 얼마 못 가 갈기갈기 찢겼겠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선배님이시다.
"짐승 새끼들이, 기가 살아서는!"
프리데가 내지른 창이 하이에나 암컷, 옐레나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충격에 펌프가 움직이며, 창대 끝으로 거센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캬아아아악!"
발작적으로 휘둘러진 옐레나의 검을 깔끔한 스탭으로 피해낸다.
그리고 다시 파고들어, 톱날 도끼로 옐레나의 옆구리를 긁어낸다.
살점이 뜯겨나오며 피가 거칠게 흩뿌려졌다.
"옐레나!"
암컷 늑대 수인, 올가가 프리데를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쳇."
혀를 찬 프리데가 작살 모양의 단검을 내던지며 물러났다.
"크으으윽!"
옐레나가 피를 줄기차게 뿜어내던 펌프 창을 잡아뽑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뒤이어 분노하며 내려찍은 오른발에 짓밟혀, 펌프 창이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녀의 어깨와 옆구리에 남은 상처는 아주 서서히 아물었다.
무기에 은이라도 섞여 있던 건지, 대량의 출혈 때문인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제길, 시간이 너무 오래 끌리는데."
"무기 덕분에 그나마 유리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진은 검만 아니었으면, 놈들 역시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거칠게 덤벼들어 왔을 테니까."
프리데의 옆에 서, 전황을 확인했다.
아직 2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프리데는 모피 코트가 여기저기 찢어지고, 창 하나를 잃은 것 외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었다.
전신이 피에 물들어있긴 했지만, 그녀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나는 갑옷이 몇군데 부서진 데다 뺨과 등허리에서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왼손을 포함해, 두들겨 맞은 부위들이 꽤 욱신대고 있었고.
그래도 상대방 쪽이 훨씬 부상이 심하긴 했다.
이런저런 상처들이 서서히 아물고 있긴 했지만, 내 검에 베인 상처들은 낫질 않으니까.
프리데의 공격으로 흘린 피도 상당할 테고.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이길 수는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뿐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죽어 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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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나이젤 쪽이었다.
나는 아직도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지는 싸움터를 흘끗 쳐다보았다.
창과 대도가 미친 듯이 충돌하며 섬광과 파편들을 흩뿌린다.
"주인을 버리고 투항할 생각은 없겠지? 아쉽군. 달인급 암컷이라면 혼혈이라도 훌륭한 새끼를 낳을 수 있을 텐데!"
"란덴부르크의 검을 모욕하는 거냐! 얕보지 마라!"
"하, 들고 있는 건 창이잖냐!"
보리스의 희열 섞인 포효가 공터를 울리고, 이에 화답하듯 나이젤이 기합을 내지르며 창과 단검을 연신 쏘아낸다.
인간의 달인과 수인의 대전사.
저 결투의 결말이야말로, 이 싸움의 결말을 확정지을 최대의 변수였다.
문제는, 나이젤이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서진 갑옷이 너덜거리고, 몇 개인가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보리스 역시 비슷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근본적으로 종의 격차가 발목을 잡았다.
나이젤의 무기도 진은이 조금 섞인 것인지, 보리스의 상처가 쉽사리 재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전사급 수인의 육체는 몇 군데의 관통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터프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단 한 번도 우리 편이었던 적이 없었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몸을 낮추고, 다리에 힘을 불어넣는다.
전의를. 살의를 끌어올리며 격한 투쟁심에 몸을 맡긴다.
중상을 각오하고. 한 놈이라도 확실히 죽이자.
균형을 무너뜨려야 했다.
팔 하나쯤 잃어버린다고 해도 감수해야 할 상황이니까.
그까짓 팔쯤이야,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 치료해 주겠지.
검 자루를 으스러져라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죽지만 않으면 돼. 죽지만 않으면 나는-
- 콰장창!
그 순간.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은 화살이 수인들을 향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은 좀 늦었습니다...
뭔가..뭔가 애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