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화
질주
베어낸다.
휘두르는 검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분노일까, 죄악감일까. 그런 생각조차 남지 않고.
그저 어깨가 주저앉을 듯이 무거웠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죄와 마주한다.
한 마리를 베어낼 때마다 시체들이 나를 비웃는다.
점점, 눈앞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열기로 끓어오르는 머릿속에서.
모두가 배를 잡고 웃는다.
웅웅대며, 미칠 것 같이. 텅 빈 눈동자로.
다시 검을 휘두른다.
짐승들이 조각난다.
조각조각.
조각조각.
팔다리가 사이좋게 뒤섞인다. 흙바닥을 나뒹굴며.
사람의 것일까, 짐승의 것일까.
잘라놓고 나니 이젠 구분할 수 없어서.
그래서 계속 잘라낸다.
"이, 괴물 새끼...!"
수인 하나가 고함치며 달려든다.
털이 숭숭 난 팔에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세운 채.
열등종도 순혈도 아닌, 어중간한 혼혈 전사.
아. 그러면 밀리치야네.
원흉.
쏘아낸 왼손에 얼굴이 꿰뚫려, 돼지처럼 비명을 지른다.
혹시 돼지 수인이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쉬워라. 기껏 물어보았는데.
구멍 난 얼굴은, 입이 남아있어도. 아무것도 말해주질 않네.
손을 뽑아낸다. 으깨진 뇌와 연수가 손끝에 걸려 따라 나온다.
바닥에 털어냈다.
썩은 비린내가 역겨워서.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쉰다.
세상엔 온통 시체만이 가득하다. 내가 만든 시체들. 내가 만들 시체들.
다 같이 한데 모여 나를 쳐다본다. 사람의 눈은 파랗고, 짐승의 눈은 노랗고.
바닥을 굴러다니며 힐난하듯 바라본다.
그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제발.
웃음이 나온다. 그들도 웃는다. 다들 즐겁게 웃는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웃어. 날 노려보지 마. 날 추궁하지 마.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이 모든 일들이 내 잘못이란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선택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가 내린 선택으로, 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도 알아.
나 때문에, 모두가. 그래,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제국 놈이이이!"
짐승 하나가 포효하며 떨어져 내린다.
커다란 덩치가 시야를 가렸다.
쩍 벌린 입가에 피가 흥건하다.
이빨 사이사이에 끼인 고기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살점이.
역시, 나쁜 건 너희들이다.
장검을 움켜쥐고, 머리 위로.
죽어야 할 것들은, 바로 너희들이야!!
푸른 광채가 허공을 휘젓는다.
고기 토막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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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르다.
쏟아지는 핏줄기를 받아마신다.
이곳에 물 따위는 없으니.
있는 것은 오로지 일렁이는 불길 뿐.
꿀꺽, 하고 입안 가득 차오른 비릿한 것을 삼킨다.
목구멍 너머로 미지근한 액체가 넘어간다.
달콤해서 오히려 끔찍한 것이.
수분을 빨아들인 몸뚱이가 활력을 되찾는다.
달궈진 강철을 담금질하듯이, 녹아내리던 뇌가 천천히 식어간다.
그렇기에, 슬프게도 다시 정신이 되돌아온다.
"케헥! 케헤엑! 커허윽...!"
재와 연기로 가득찬 폐가 검은 기침을 토해냈다.
얼마나, 지났지?
분명, 데미안을 찾으러 달리다가 다시 싸우고.
또 달리다가, 싸우고.
그러다가 점점, 열기와 매연 때문에 의식이 흐려져서...
그러다가 이 꼴인가.
사람의 몰골이 아니다. 아니, 짐승의 몰골조차 아니었다.
피와 내장을 한데 그러모아, 사람 모양으로 뭉쳐놓은 듯한 형상.
그것이 내 모습이었다.
이 꼴로 도시를 뛰어다닌 건가.
마물로 오해받아 공격받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축복들의 지속시간이 다해가는 것일까, 몸에 깃든 성광이 죽어가는 반딧불처럼 깜빡였다.
얼굴을 닦아내려다 포기했다. 손으로 닦는다고 닦일 피가 아니었다.
애초에 핏덩이에 핏덩이를 문지르는 꼴이었다.
몸에 밧줄처럼 엉겨 붙은 내장들만 털어냈다. 냄새가 지독했으니까.
손에 쥔 검조차 온갖 것들이 검신을 뒤덮어 질척였다.
허공에 휘둘러 엉켜 든 피와 지방을 털어낸다.
시린 푸른빛이 다시 번뜩인다.
그래. 그래도 제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다. 데미안을 찾아야 했다.
도시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불길이 좀 약해진 것 같았지만.
비명소리도 잦아들었다. 지킨 것일까. 다 죽은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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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시를 내달렸다.
후각은 의미가 없었다. 어딜 가도 타는 냄새만이 진동했으니.
오직 직감에 의존해 찾아내야 했다.
"꺄아아아악!"
비명 소리.
발걸음이 멈춘다. 몸이 홱 돌아가며, 비명이 들린 곳으로 질주한다.
수 채의 건물들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달리는 기세에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진 핏줄기가 허공에 길게 흩뿌려진다.
붉은 꼬리를 가진 혜성처럼.
찾았다.
다섯 명. 두 명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학생 둘에, 민간인 셋?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나.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의 비겁함이, 참으로 역했다.
...자책에 물들어있을 때가 아니다.
눈을 돌려 적을 확인한다.
수인 둘. 혼혈. 전사. 밀리치야.
두 마리의 짐승이, 주저앉은 사람들을 향해 손톱을 들이밀고 있었다.
짐승 놈들이.
땅을 박차며, 전력을 다해 돌진한다.
지면에 동심원 같은 파문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유리 조각처럼 깨져나간다.
"캬아아아아아아!"
망막에 비치는 것들이 쭉 늘어지며 선으로 변한다.
공기가 망치처럼 몸을 강타한다.
적의 모습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깜짝 놀란 수인이 두꺼운 대도를 방패처럼 치켜들었다.
상관없어.
꿰뚫으리라.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해도.
움켜쥔 왼손을 쏘아낸다.
기도하듯, 확고한 의념을 손끝에 담고서.
내뻗은 주먹에 무언가가 스며든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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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인의 상반신이 눈보라처럼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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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
사실 나조차도.
옆의 수인이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방금 전까지 동족이었던 잔해를 멍하니 바라본다.
창백한 섬광이 놈의 허리를 흝었다.
수인의 상체가 미끄러지듯 떨어지며, 하반신에게 이별을 고했다.
뿜어지는 피보라에 뒤쪽의 불이 꺼져나갔다.
축복의 성광이 완전히 사그라든다.
모든 체력을 쥐어짜 낸 듯한 탈력감에, 힘이 풀린 무릎이 휘청였다.
"크으읏...!"
억지로 버텨낸다.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야.
고작, 힘이 좀 빠진 것뿐이다.
"어, 아? 어어어...?"
돌아본 사람들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모습이었다.
"일학년, 마법학부? 맞지! 정신 차려!"
학생 하나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정신 차리라고 뺨을 때렸다간 머리통이 떨어져 나갈지도 몰라서.
"아, 아으, 뭐야, 어...카하르?"
다행히 날 알아본 모습이었다.
소년이 벌벌 떨면서도 비척비척 일어났다.
이제 보니 이전에 대련했던 마법사 소년이었다.
앳된 얼굴이 공포에 질려 창백했다.
"데미안이랑 밀리아, 못 봤어?"
"데미안...? 아, 검술학부의...걔들이라면 저쪽으로......!"
소년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북동쪽인가. 정신을 집중하니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수인과 학생의 기척들이.
다들 아직 저기서 싸우고 있었나.
다행이었다.
그 순간, 그쪽 방향에서 우르릉,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어깨를 움츠렸다.
저 너머에서, 건물 한 채가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데미안.
밀리아.
위기감이 심장을 들쑤신다.
평범한 전사 따위가 일으킬 수 있는 파괴가 아니었다.
저곳에, 아마도 대전사가 있었다.
나이젤조차 동수가 고작이었던 자들이.
땅 밑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처럼,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간다.
서둘러야 했다.
"그 사람들 데리고, 아카데미로 돌아가!"
"뭐? 너는!"
대답할 시간 따윈 없다. 몸을 돌려 달려 나간다.
이 세계의 주인공을 지켜야 했다.
내 친구를 지켜야 했다.
데미안, 밀리아. 조금만, 제발 조금만 버텨.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갈 테니...!
죽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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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수 km.
그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적들이 끝없이 앞을 가로막는다.
무시하고 달릴 수는 없었다.
이들을 지나친다는 건, 옆에 주저앉은 학생들을 죽게 내버려 둔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검을 휘두르며 나아간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수인들을 전부 베어내며.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지켜내며.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족쇄를 찬 것처럼 다리가 무겁다.
기력이 다해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혹사당한 몸이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검이 멈추지 않는다.
허공에 창백한 호선이 그어질 때마다, 수인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내 앞에 선 그 누구도 두 번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은 점점 지쳐가는데, 휘두르는 참격이 점점 더 예리해진다.
짐승의 질긴 육체도, 단단한 강철 무기들도 모두 종잇장처럼 잘려 나간다.
도끼든 대검이든 창이든 전부 베어 가른다.
푸른 잔상에, 옅은 금빛이 섞여 든다.
검신에 새겨진 문장이 서서히 빛나고 있었다.
몇 마리를 베었을까, 몇 명을 지켰을까.
베어낸 숫자가 오십을 넘긴 시점에서 더 이상 세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조차 낭비였다.
머릿속을 비우고, 오직 두 가지만을 생각한다.
수인을 죽인다.
앞으로 나아간다.
오직 그것만을.
마침내 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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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잔해로 가득해, 이젠 폐허로 변해버린 공터.
암표범 하나가 무릎 꿇은 소년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머쥔 장검을 당장이라도 내려칠 것처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소년은 부러진 대검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틀거리는 소년의 몸은 여기저기 찢기고 베인 상처가 가득해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옆에.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반으로 조각난 활을 꼭 움켜쥔 채로.
피가 고인 웅덩이 위에, 미동도 없이.
무언가가 끊어지며, 머릿속이 불타올랐다.
"이, 짐승 새끼가아아아아아아!"
죽여버리겠어.
적에게 달려들며, 벼락처럼 검을 내질렀다.
- 카아앙!
전력을 다한 검격이, 그대로 가로막힌다.
두 장검이 맹렬한 불꽃을 튀기며 서로를 할퀴었다.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암표범이, 이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여자구나. 최우선목표. 카`하르의 암컷."
"그래! 내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다!"
재차 휘두른 검격이 다시 틀어막힌다. 다시. 또 다시.
파열음이 연이어 울려 퍼진다.
살을 가르는 소리가 아닌,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모든 공격이 막히고 튕겨 나간다.
힘과 속도 모두, 상대가 우위에 있었다.
우위에 있게 되어버렸다.
"큭...!"
"기세는 제법이긴 한데. 꽤 지쳤나 보네?"
암표범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느덧 20분 남았네요! 다들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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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하샬르는 반쯤 맛이 간 상태였네요!
막대한 스트레스, 고열, 매연, 악취, 탈수, 체력고갈까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리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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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둘을 잡고 나탈리아와 만난 데미안
장렬한 전투신이 모조리 생략된 것은 조연의 운명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