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화
다른 이들의 싸움
=======[데미안]=======
대검이 살을 찢고 뼈를 부수며 깊이 파고든다.
적의 상체가 대각선으로 잘려 나가며, 절단면에서 피가 솟구친다.
상반신이 옆으로 늘어져 경련하는 시체를 걷어차며 데미안이 숨을 내쉬었다.
주위에는 십여 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지저분한 부랑자들.
광인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미친 듯이 웃으며 창검을 찔러대던 폭도들.
목적도 정체도 알 수 없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들을 토벌하는 것이 데미안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마법학부 학생들의 경우엔, 저 화재를 어떻게든 꺼트리는 것이 주된 임무였고.
그와 동시에, 살아남은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부상자들을 아카데미로 보내야 했다.
손이 다섯 개라도 모자랄 일이었으나 기사들이 황궁으로 가버린 이상 별수 없었다. 학생들끼리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그렇기에 다들 제도 전역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수도의 병사들이 진화작업과 대피작업을 지원한다고는 했는데...
데미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벼운 갑옷을 걸친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이곳에 투입된 병사들은 이미 폭도들에게 몰살당한 상태였다.
그래. 병사들이 이 폭도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직접 상대해본 폭도들은 몸놀림도 빠르고, 근력도 제법 강했다.
아카데미의 동기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서, 저들 모두가 준기사급이라는 소리지.
아카데미의 판단이 경솔했다.
단순한 폭동 제압이라 생각했지만, 하나하나가 이 정도라면 다른 학생들 수준으로는 버거울 것이다.
그래도 저 정도 숫자의 병사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죽어버린 건 조금 의외였지만.
'게다가, 생각보다 뭔가 질긴데...'
대검이 파고드는 감촉이 기묘했다.
사람을 베는 감각은 버터를 나이프로 갈라내는 것과 비슷했건만, 이들은 마치 덜 익은 고깃덩이 같았다.
'무기가 바뀌었기 때문인가?'
데미안이 묘한 눈으로 대검을 내려다보았다.
오후에, 하샬르가 선물해준 흑철 대검이었다.
대체 무슨 멋을 부리려고 한 건지, 도금되어있던 은이 군데군데 벗겨져 얼룩덜룩했다.
"데미안! 괜찮아?"
밀리아가 데미안 쪽으로 달려왔다. 뺨에는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왼손엔 활을 든 채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신입생들은 최소 2인 1조 이상으로 모여 행동하라고 명령받았었지.
밀리아는 고민 없이 데미안을 선택했다.
두 사람의 실력이 신입생 상위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둘이 함께 행동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었지만...
하샬르가 가급적 항상 붙어다니라고 했으니까.
어차피 졸업 후에도 둘이 계속 같이 다닐 것 아니냐면서.
그래서, 다른 조들에게 그만큼 추가인원을 할당할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 아니겠냐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이쪽은 다 정리했어. 밀리아는 어때?"
"일단 세 명 쓰러트리긴 했는데...뭔가 이상해."
죽였다, 라는 표현은 일부러 피한 걸까.
데미안이 새삼스레 밀리아를 쳐다보았다. 희게 질린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긴 밀리아는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이었던가.
'그런데 이게 진짜 사람이 맞나? 사람치고는 좀...'
아니, 속단하긴 이르다. 하샬르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같은 사람이라도 몸이 좀 기이하게 튼튼한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
...그런 것치고는 밀리아도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상하다니?"
"다들 미쳐있었어. 병사들의 무기에 몸이 잘려 나가는데도, 무시하고 달려들 정도로...그러고도 쉽게 죽지 않았고."
확실히, 그렇긴 했다.
데미안이 조금 전 전투를 회상했다.
'대검에 오히려 몸을 들이밀며...막무가내로 덤벼들었지.'
그러다 바로 죽어 나자빠지긴 했지만.
"...마치 트롤 같았어. 내 화살은 그럭저럭 통했지만."
"트롤...?"
데미안의 머릿속에 예전에 들었던 강의내용들이 스쳐 지나갔다.
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렬함.
기묘할 정도로 질긴 몸뚱이.
여럿이 덤벼놓고, 폭도 하나조차 죽이지 못했던 병사들.
...답은 하나뿐이었다.
재생능력자.
'설마...'
데미안이 폭도의 시체에 다가가 그 머리를 헤집었다.
있어야 할 귀가 없다.
대신 정수리 양옆에 무언가가 잘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역시...!"
"데미안?"
밀리아가 의아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폭도들은 사람이 아니야, 수인이다!"
"수인이라고? 그게 무슨..."
"피가 옅으면 사람과 구별하기 힘드니까, 귀를 잘라버리고 사람인 척한 거야!"
이러니 병사들이 몰살당할 수밖에.
적을 사람이라 생각했으니, 강철 무기를 들고 덤볐겠지.
그러다 칼을 맞아가며 달려드는 수인에게 밀려 그대로 목숨을 잃은 것이고.
은을 도금한 무기라도 준비하지 않고서는 수인을 상대할 수 없다.
은을 도금한 무기.
데미안이 새삼스럽게 자신의 무기를 내려다보았다.
흑철 특유의 묵직한 검은 광택 위로, 벗겨지기 시작한 은빛 도금이 불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는 대검을.
하샬르가 선물이랍시고 억지로 건네준 검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의혹이 뇌리를 맴돈다.
하샬르가 수인들이 습격해올 사실을 알고 있었음은 명백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딱 맞춘 타이밍에, 갑자기 은 무기를 준비해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무슨 수로?
제국의 기사들조차 예측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그녀는 미리 알고 있었지?
아니,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않았던 거지?
알 수 없었다. 의문과 의혹뿐이었다.
"진짜 수인이라고...? 아, 잠깐만! 수인이라니. 그러면, 다른 애들이 위험해!"
밀리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력이 비슷하다 해도, 적이 수인이라면 이길 수 없다.
서로 베어도 오직 자신들만이 쓰러질 테니까.
게다가, 밀리아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말단 폭도들. 말하자면 징집병이나 다름없다.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고 있을 뿐, 이런 체계적인 공격계획을 세운 당사자들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지휘관이 있을 것이다. 폭도들을 선동하고, 습격을 지휘한 우두머리들이.
폭도들의 정체가 혼혈 수인이라면.
이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들의 정체는.
"흠...일단 둘인가....."
등 뒤쪽에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울렸다.
밀리아가 황급히 활을 겨누었다.
폭도의 시체를 내려놓은 데미안이, 대검을 거머쥐고 일어나 몸을 돌렸다.
두 구의 그림자가 불길을 등진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큼지막한 몸통 위에 늑대의 머리통이 달려 있는 거한이 하나.
오른손에 움켜쥔 도끼가 피에 젖어 번들거린다.
옆에 선 청년은 순혈은 아닌 것인지, 사람과 곰을 억지로 뒤섞은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덩치도 늑대 수인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었고.
양손에 한 자루씩, 긴 장검을 쥐고 있었다.
"수인, 전사...!"
밀리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막연한 불안감이 사실이 되어 나타났으니.
순혈 늑대 수인에, 피가 짙은 혼혈 전사까지.
두 사람이 전력으로 싸워도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밀리아. 지원 부탁해."
대검을 움켜쥔 데미안이 앞으로 나섰다.
의혹은 머리 한구석으로 접어버렸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니까.
지금은 모든 의식을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적어도, 이 검 덕분에 싸울 수는 있으니.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짐승들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대검과 도끼가 맹렬하게 충돌했다.
======[오필리아]======
같은 시간, 오필리아 역시 그것과 조우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적당히 돌아다니던 와중이었다.
한스라고 했던가. 그녀와 한 조가 된 남자를 끌고 다니면서.
덤벼드는 부랑자는 공기의 칼날로 목을 가르고, 불붙은 집들은 산소를 차단해 꺼트렸다.
딱히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던 중, 목소리가 울렸다.
"마법사 계집...! 이거, 운이 좋은걸."
갑작스레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두 발로 걷는 황소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웃고 있었기에.
그녀의 몸을 불쾌하게 흝어보며 군침을 흘리면서.
천박한 성욕이 아닌, 역겨운 식욕이 가득찬 눈빛으로.
"하아...어쩐지 누린내가 심하다 했더니. 수인이라니."
오필리아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순혈 수인이라니, 대체 제도에 왜 그딴 것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정말이지. 기사들이고 경비병들이고, 하나같이 무능하기는.'
손에 쥐고 있던 마력초가, 그대로 반으로 꺾인다.
속으로 경멸을 내뱉으며 오필리아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진심으로.
별 수 없었다.
순혈 수인을 상대하려면 평소처럼 적당히 장난치는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었으니.
보는 눈이 하나뿐인 것이 다행이었다.
"거기, 한스라고 했었지."
"...그렇다만."
한창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리던 한스가, 갑작스러운 부름에 오필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순혈 수인을 보았을 때 이미 죽음을 직감한 상태였다.
그야 도망친다고 해도 저쪽이 더 빠르니까.
"지금 보는 거.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면, 그 뒤로 아침 해를 세 번 이상 보지 못할 거야. 명심해."
"그게 무슨...?"
눈 앞의 광경에, 한스의 말문이 막혔다.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거센 바람에 휘말린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불꽃처럼 일렁인다.
적어도 마법학부 수석의 다섯 배는 되어 보이는, 압도적인 마력량.
칠 년 만에.
전력을 다해 시전한 칼날의 폭풍이 황소 수인을 향해 짓쳐 들었다.
=======[???]=======
도시의 서쪽, 교단 구호소의 벽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간다.
빛의 창이 전신에 틀어박힌 수인들이, 그대로 튕겨 나와 골목의 담벼락에 처박혔다.
재생의 여지없이 절명한 상태였다.
뒤이어 열 명의 성기사와 젊은 여성 하나가 잔해 너머로 걸어 나왔다.
성기사들의 갑주에는 십자 표식이 새겨져 있었고, 갑옷 위로 은빛 성광이 맴돌았다.
구호소를 담당하고 있던, 엘피넬 교단원들이었다.
"엘피넬이시여..."
여자가 중얼거리며 목에 걸린 성표를 움켜쥐었다.
순백 그 자체인 여자였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렀고, 가느다란 금빛 사슬이 그 이마 위를 왕관처럼 둘러싸며 얹혀있다.
등 뒤로 백색 성광이 깃털처럼 일렁였다.
몸에 걸친 흰 사제복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여, 오히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성녀 후보.
레이시 엘메인 스타돌프.
그녀가 성표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이단을, 악인을. 사람 아닌 자들을 멸하리라."
나직한 기도문과 함께, 찬란한 성광이 도시 한 구획을 통째로 뒤덮었다.
빛이 닿은 곳마다 불길이 꺼져나가며,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엘피넬의 축복이 내려앉았다.
"사람 아닌 자들을, 멸하리라!"
검을 뽑아 든 성기사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은총의 신. 엘피넬의 분노를 노래하며, 동쪽을 향해 나아간다.
보이는 모든 적도들을 멸하기 위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새벽 감성의 위험성...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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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이번화는 다른 인물들 이야기 뿐이네요.
분산된 채로 각자 적이랑 만나긴 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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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이름, 미들네임은 세례명 같은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