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63화 (63/100)

제 63화

뒷수습

호흡이 이어지지 않는다.

완전히 탈진한 육체가 통제를 잃고 휘청인다.

나는 한 발 뒤에서 지켜보듯, 서서히 무릎 꿇는 내 몸을 멍하니 관조했다.

머릿속으로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되새기며.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배워온 것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 내가 얻어낸 것들이.

검술. 육신. 업.

휘두른 일격은 믿어지지 않는 힘으로 적을 베어 갈랐다.

이것이 달인의 영역.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막연했던 살업의 힘조차, 발휘하는 방법 자체는 알 것 같았다.

그 흉폭한 힘을 제어하기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걸로, 앞으로를 헤쳐 나갈 힘을 마침내 손에 넣은 것이다.

기쁨은 없었다.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그저 아주 약간, 안도했다.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마침내, 이 지옥이 끝나간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낸 것일까?

눈앞에 둘로 갈라진 대답이 있었다.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 속의 업화를 꺼트리듯, 생명을 토해내듯.

끊어지지 않을 깊은 한숨을.

여기까지였다.

내 싸움은 끝났다. 드디어.

너무나도 길어, 실로 영원과도 같은 밤이었다.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타는 냄새도, 피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끝에서부터 전신의 감각이 사라져간다.

지친 의식이, 힘이 다한 육체로부터 멀어진다.

마치 뒤섞인 물과 기름이 서로 분리되는 것처럼. 명확하게.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을 굴렀다.

검게 물들어가는 시야 너머로, 검을 내려다본다.

금빛 광채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잠들 시간이었다.

......

...문득, 한 줄기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너무 당연해 단 한 번의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 의문이. 이제서야.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해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했던 거지?

분명히,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을 텐데.

불쌍하다고는 생각했다. 할 수 있으면 구해주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었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내 몸을 갈아버릴 정도로?

무언가가 달라졌다.

...언제부터?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갔다.

아, 그래.

잔해만 남은 정신으로 떠올린다.

저 검을, 쥐었을...때...그때부터....난.....!

무언가를 떠올리려던 정신이, 그대로 가라앉는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

- 알아버렸네?

누군가가 속삭인다.

- 역시 조금 빨랐던 걸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새하얀 손이 이마를 쓰다듬는다. 자애롭게.

따스한 온기가 가득 담긴 손짓으로.

- 잊어버리고, 지금은 편히 쉬렴.

그리고. 또다시.

----

아침 해가 떠오른다.

기나긴 밤이 끝나고, 마침내 제도에 새벽이 찾아온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멍하니 주저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재와 먼지로 뒤덮인 회색빛 하늘을.

제도 대화재.

제도에 숨어든 수인 조직, 이른바 밀리치야가 제도 내부의 혼혈 노예들과 접촉해 일으킨 대규모 테러행위.

정예 기사들이 북부로 향한 틈을 타 벌어진 양동작전에, 수많은 이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하룻밤 만에 도시의 3할이 불타 사라졌으며 민간인 사망자는 추정 2만 명.

부상자 역시 팔천에 달하는 유례없는 대참사.

아카데미의 빠른 대처 덕분에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서른 명 이상의 학생들이 수인의 손에 살해당했다.

온 세상이 충격에 빠졌다.

제국을 할퀴고 사라진 발톱의 흔적은, 너무나도 선명한 화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공포와 충격, 그리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사람 아닌 자들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수백 년간 이어진 제국의 질서. 그 흔들림 없는 신화에 명백한 금이 새겨진 모습을.

조용히, 아주 고요하게.

그러나 눈을 떼지 않고.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과거를 향해.

----

내가 깨어난 곳은 처음 보는 병실이었다.

네 개의 병상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새하얀 벽에는 십자 성표가 걸려 있었다.

공기에선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났다.

놓인 병상마다 붕대를 감은 학생들이 누워있다.

힘겹게 고개를 틀었다. 고작 그 움직임에, 1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병상에 익숙한 금발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데미안이였다.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난 것인지, 그 안색은 평온했다.

그리고 데미안과 내 침상 사이에, 녹색 머리의 여자가 의자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밀...리아......?"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목소리를 들은 밀리아가 서서히 깨어났다.

반쯤 감긴 눈을 비비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대로 다시 한번 눈동자를 깜빡이더니, 내 쪽으로 확 몸을 틀었다.

"하샬르! 깨어난 거야?! 다행이야! 정말...!"

밀리아가 울먹이며 손을 뻗어오다가, 머뭇거리며 거두었다.

만져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내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한 모양이네.

감각이 없어서 잘 알 수 없었다.

"그래...밀리아 너는, 다친 데는 괜찮아..?"

"나보다는 네 몸이나 걱정해! 레이시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진짜 죽을 뻔했다고!"

"레이시라니. 성녀 후보...?"

그녀가 근처에 있었나? 아. 그렇다면 그때 도시를 덮었던 흰 섬광은 레이시가 시전한 거였나.

운 좋게도 나 역시 축복의 범위 안에 있던 덕분에, 그럭저럭 싸울 수 있었지.

"그래. 기운을 차린 데미안이, 만신창이가 된 널 찾아내 들쳐업고 레이시 선배님께 데려갔었어. 선배님의 치료가 없었다면 죽었을 거야..."

데미안이 다시 돌아왔었나...? 친해져 두길 잘했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업을 깨달아 그 힘으로 나탈리아를 죽였지만, 나도 체력이 다해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니까.

곧바로 쓰러졌...었지?

.....그랬던가?

뭔가 조금, 미묘한데.

묘한 이질감이 드는데. 모르겠다.

뭘 잊어버린 듯한 기분인데.

아,

그래.

"내 검은...?"

그래, 그거구나. 기절했으니 검을 놓쳐버렸을 테니까.

설마 그대로 잃어버리거나 하진 않았겠지?

내 검. 검을 찾아야 했다.

그 정도의 명검이라면 그대로 누가 훔쳐 갔을지도 모르니.

"아 그거라면 이쪽에ㅡ"

밀리아가 침상 구석을 가리켰다.

아이멜라의 검이 검집에 감싸인 채 기대어져 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다행이다. 데미안이 이것도 챙겨주었구나.

나중에 전부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제야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그래서,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고?"

"일 주일. 하샬르 넌 일주일 만에 겨우 눈을 뜬 거야. 매일 치유술을 걸었는데도...기력을 너무 많이 써버렸다고 들었어."

그래서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나.

일주일인가. 그 정도 시간이면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긴 했겠네.

......수습이라.

"사람들에 대해선...나중에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일단 지금은 좀 쉬는 편이..."

"듣고 싶어."

들어두어야 했다. 나는.

머뭇거리던 밀리아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조심스레 들려주었다.

내가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동은 진압되었다고 한다.

이미 폭도들의 삼 할가량이 내 검에 베여나간 상황에, 맞은편에서 진군해온 성기사들이 수인들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렸다고.

그즈음, 황궁에서 벌어졌던 소란도 진압되어 기사들이 다시 제도로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폭동에 참가했던 수인들은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황궁을 습격했던 주모자들 중, 포로로 제압한 세 마리만 제외하고.

회색곰 하나, 사자 암컷 하나. 여우 암컷 하나.

그 셋에게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이 가해졌다.

그 뒤, 팔다리를 잘린 채 광장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수인의 생명력 덕분에 닷새나 숨이 붙어 있었다던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딱히 동정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망설이며 이어진 대답은 참혹했다.

이만 명에, 서른 명인가.

원작에선 오십 명이 죽었으니까. 그래. 스무 명이 더 살았네.

학생 한 명당 민간인 천 명씩 희생해서.

미쳐버린 방정식이었다.

정신이 다시 아득해져간다.

안 돼, 정신 차리자.

여기서 무너질 순 없으니까.

이제와서 멈춰서는 안 되니까. 이만 명을 죽여놓고.

그러니 견뎌내야 한다.

의무감이 정신을 다그친다.

"......제도는, 지금 어떤 상황이야?"

"죽은 사람들은 나흘에 걸쳐 한데 모아 화장했어. 내버려 두면 전염병이 돌 테니까...그 뒤로는, 타버린 건물들을 재건하는 중이고."

나흘이라. 그건 빠른 걸까, 느린 걸까. 나로서는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슬픔이 잦아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겠지.

"사람들의 분위기를 물어보는 거라면...좋지 않아. 다들 슬퍼하고, 다들 화가 나 있어. 북부 설원으로 진격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건 어려울 텐데."

"응, 그렇지."

북부 설원으로 군대를 진격시키는 건 미친 짓이다.

하늘 산맥을 넘으며 절반을 잃고, 설원의 추위에 나머지 절반을 잃겠지.

그곳은 아직 사람이 정복할 수 없는 땅이었다.

오직 털가죽을 지닌 짐승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혹한의 대지였으니.

그래서, 갈 곳 없이 쌓인 분노는 결국 남은 수인들에게 향했다고 한다.

밀리치야의 선동에도 따르지 않고, 제 주인의 편에 남았던 수인 노예들.

충성심일지, 자기 안위를 챙기려던 의도였을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모조리 끌려나와 도살당했다고 한다.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방식으로. 사흘에 걸쳐.

귀와 꼬리를 빼면 사람과 다름없는 외형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끔찍하게 죽었다고.

그 광경을 떠올렸던 것인지, 밀리아가 조금 진저리쳤다.

살려고 동족을 배신한 결말이, 오히려 동족들보다도 끔찍한 최후인가.

참 얄궂은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이건 세이프인가 아웃인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_676님 또다시...후원을......!

감사..! 압도적 감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

[ㅁㅁ의 검]

카롤루스 대제가 ㅁㅁ과 함께 ㅁㅁㅁㅁ에서 ㅁㅁ한 ㅁㅁㅁ의 검.

그 검을 쥔 자는 모두 영웅의 길을 걸었다.

영웅에게 검이 주어지는 것일까, 검이 영웅을 만드는 것일까.

답은 ㅁㅁ만이 알고 있으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