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하마터면
그렇게 한동안 밀리와와 대화를 나눴다.
데미안의 치료는 거의 끝났다고 한다. 워낙 출혈이 심했기에 아직까지 병석에 있었을 뿐이지.
아마 내일쯤이면 병석에서 일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나와는 달리 말이지.
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인데.
분명 치유의 기적을 퍼부었을 텐데도.
하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겠지. 나탈리아를 베고 쓰러졌을 땐, 정말 이대로 죽는 것 아닐까 싶었으니.
"...그래서...지금은.."
밀리아의 말들이 점점 뚝뚝 끊겨 들렸다.
지친 몸으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침상에 누워 있기 때문일까.
또다시 짙은 피로감이 의식을 내리누르며 스며들어온다.
"......"
"제도엔, 이런 소문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밀리아가 말을 멈췄다.
"피곤해? 하긴, 그렇겠지. 지금은 일단 푹 쉬자."
아직 물어볼 이야기가 정말로 많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잘 자, 하샬르."
의식이, 다시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꿈?}=======
꿈을 꾼다.
언제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이미지가 연이어 나를 스쳐 지나간다.
두 마리 새를 거느린 채, 옥좌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외눈의 노인.
끝없이 펼쳐진 대지에 푸르른 녹음을 꽃피우는 여성.
그 여성에게 무언가를 건네받는 새하얀 소녀.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세 개의 유성.
세상이 점점 어두워진다.
꿈의 모습이 점차 변해간다.
악몽으로.
검게 변한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만이 남아있었다.
수없이 많은 회색 쇠사슬에 묶여 으르렁대는 짐승이.
끝이 보이지 않는 거체가 하늘을 가리고, 대지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건 차라리 털가죽을 지닌 산맥에 가까웠다.
짐승의 발아래엔 붉은 호수가 고여 있었다.
사슬 끄트머리에 달린 날카로운 못들이, 짐승의 몸을 파고들어 고정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그야말로 강철의 구속복이자 거대한 목줄이었다.
짐승이 허공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수천 개의 벼락이 동시에 떨어진다면, 이 굉음에 비견할 수 있을까.
세상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이 떨어져 내렸다.
눈부신 광채가 세상을 밝히며 내려앉아, 피 흘리는 짐승의 몸을 베일처럼 감싸 안는다.
빛에 닿은 못들이 조금씩 뽑혀 나간다.
회색 쇠사슬을 뽑아내며, 백색 성광이 점차 그 형상을 바꾸어간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또한 사슬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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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땐, 밀리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처음 보는 여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처음은 아닌가.
겨울 호수를 닮은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수면 위에 내려앉은, 눈 덮인 빙판처럼.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머리카락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도자기 인형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사슬 모양의 티아라. 먼지 하나 없는 순백의 성복.
수십 번은 넘게 보아온 차림새였다.
엘피넬 교단의 성녀 후보, 레이시 엘메인 스타돌프.
"깨어났나요. 아이샨기오르 왕녀."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정을 알기 힘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에 난 그저 당혹스러웠다.
언젠가 만나러 갈 생각은 있었지만, 저쪽에서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한창 구호작업에 바쁠 사람이 어째서?
"마침 다행이네요. 눈뜰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누군데, 너...?"
조심스럽게 말을 흐린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반쯤 잠긴 목소리였지만.
"그 하얀 머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일단 잘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기로 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을 곧바로 알아보는 것은 이상하니까.
아무리 특색 강한 외모라고 해도.
"엘피넬 교단의, 레이시 스타돌프에요. 당신 선배죠."
"성녀 후보...?"
"아시는군요. 네, 맞아요."
레이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나를 왜..."
"그야 당연히, 중환자의 상태를 보러 온 거죠.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으니까요. 깨어났다면 전할 말도 있고요."
스윽, 하고 레이시가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목에 걸린 성표가 흔들린다.
그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상할 정도로.
원작에서는 분명 좀 더 자애로운 성격 아니었나...?
싸울 때야 전투사제답게 망설임 없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평소에는 '이종족들 역시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답니다.' 같은 대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문득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원작이라니, 그딴 것은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으면서.
믿은 결과가 이 꼴인데.
...그건 그렇고 전할 말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의자에 앉은 걸 보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모양이다.
살짝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제대로 대화할 수 있도록.
"중환자라. 내 몸 상태가 그렇게 심각했었나 봐?"
"시체였어요."
어...?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고 황망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9할쯤 시체였지요. 전신에 가득한 절단상과 관통상. 얼굴과 폐는 타버렸고, 비장과 췌장은 아예 터져나갔더군요. 근육이란 근육은 거의 다 찢어졌고 출혈은 말할 것도 없었죠. 그 몸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확실히, 그 말대로라면 전투는커녕 살아있으면 안 되는 부상이다.
싸울 때는 홀린 듯이 몸이 움직였지만, 원래라면 중간에 나자빠져 절명하는 것이 당연한 수준의.
내가 생각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제들이 쓰는 기술이 아닌, 문자 그대로 신이 내린 기적.
"그래도 저를 포함한 수십 명의 사제들이 온갖 치유술을 쏟아부은 덕분인지, 외상 자체는 어떻게든 치유되었어요."
"그런 부상이, 치유가 되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
"글쎄요. 원래라면 틀림없이 죽었어야 했으니까요. 아마 엘피넬님의 보살핌이겠죠. 그 이유는...잘 모르겠지만."
레이시가 성표를 쓰다듬었다. 금빛 십자가가 천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엘피넬의 보살핌이라.
날 치료해주었던 라나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샤울리테의 은총이라 했던가.
엘피넬의 보살핌, 샤울리테의 은총.
그리고...뵐베르크의 인도.
어째서인지 계속 신들의 이름과 엮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몸은 왜 안 움직이는데...? 감각도 없고. 치유되었다며?"
안간힘을 써도 목밖에 움직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그 아래로는 감각도 거의 없었고.
"그야 겉의 상처만이 간신히 치료된 상태이니까요. 바닥까지 소모된 기력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당연하겠죠."
"기력?"
"생명력이라고 할까요, 사람이 살아있게 만드는 형체 없는 힘이지요. 몸의 상처와는 별개로, 당신은 그걸 전부 써 버린 상태였답니다."
그러고 보니 밀리아도 그렇게 말했었지.
기력을 너무 많이 썼다고.
단순히 너무 고생해서 몸이 지쳤다는 의미가 아니었나?
"원래였다면 설령 치료했다고 한들 얼마 못 가 결국 죽었을 테지요. 수명이 다한 노인처럼."
어...예전에 책에서 비슷한 단어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래. 진원진기였나.
여긴 내공도 없는 세계인데, 그런 개념은 있었던 건가.
"그 때문에 확인하러 찾아왔었는데, 다행히 기력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긴 하네요. 이 얼마나 강인한 목숨인지, 마치..."
레이시가 말끝을 흐리더니, 헛기침을 내뱉었다.
꺼내서는 안 될 말을 무심코 내뱉으려 했던 것처럼.
"아무튼, 당분간은 계속 그런 상태일 거예요. 감각이야 서서히 돌아오겠지만 제대로 움직이려면 한 달쯤은 걸리겠네요."
"한 달인가...너무 긴데."
"오히려 짧은 거죠. 평생 관 속에 누워있을 뻔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또 틀린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괜히 무리하다가 악화시키지 말고, 안정을 취하길 추천해 드려요. 아마 한 달 후부터는 무척 바빠질 테니까요."
"바빠진다고?"
"네. 아까 전할 말이 있다고 했죠? 그 이야기에요. 당신 앞으로 서신이 세 장 왔거든요."
레이시가 밀랍이 찍힌 편지 봉투 세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것이 하나.
나머지 둘은 투박한 종이에 인장만이 단출하게 찍혀 있었다.
"서신이라니, 누구한테서 온 건데?"
"란덴부르크에서 하나, 페일룬에서 하나. 그리고 이건 황실의 초청장이에요."
"황실이라니, 세상에."
"이번 일에 대해, 당신 소문이 여기저기 퍼졌으니까요. 황실에서도 관심을 갖고 부를 만하겠죠?"
소문이라. 그러고 보니 밀리아도 소문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일까. 제발 구원자라느니 영웅이라느니 그런 내용만 아니라면 좋겠는데.
그런 찬사를 들을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소문인데. 말해줄 수 있어?"
"음..."
레이시가 고민에 빠졌다.
아니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저런 반응이지.
"세 가지 정도겠네요. 좋은 소문, 나쁜 소문, 괴상한 소문까지."
"...세 개씩이나 된다고?"
"네. 우선, 좋은 소문은 당신 활약상에 대한 내용이에요. 푸른 검을 든 젊은 여기사가 수인 대부분을 쓰러트리며 아카데미 학생들 수십을 구했다는 소문이요. 제국에 새로운 달인이 나타난 것이 틀림없다 하더군요."
수십을 구하긴...했지. 대신 이만 명이 죽었고. 나 때문에.
아니, 수인 때문에.그래 수인들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애초에 수인들이 이 세상에 없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화합과 평화 대신 살육을 택한 수인들이 문제인 거야.
그놈들만 없었다면, 나도...
다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래야 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향하려는 생각을 멈췄다.
시간이 흐른 탓일까, 병실의 평온한 공기 덕분일까.
적어도 그때 느꼈던 마음의 동요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되겠지. 어떤 악몽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흐려지듯이.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해야 할 일이던가?
나만 할 수 있는 일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절박했었나?
의문이 의혹으로 이어진다.
나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단지...그 이유가 조금 흐릿했다.
무엇 때문이었더라.
내 명령으로 학살당한 사람들의 비명 때문이었나?
노예가 된 여자의 눈동자 때문이었나?
꿈을 꿀 때마다, 악몽 속에서 그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닌데.
그 이유도 있겠지만. 분명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난이도 때문인가. 사람이 많이 죽어갈수록, 원작의 난이도가 올라갔으니까?
그러다가 세상이 진짜 망해버릴까 봐?
이것도 조금 이상한데.
합리적인 이유이지만, 정말 이것 때문이라고?
기묘한 일이었다.
마치 중간이 잘려 나간 것처럼, 결과는 있는데 과정이 없는 마음가짐.
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샨기오르 왕녀?"
레이시가 의아한 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소문을 들려달라던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으니. 그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머릿속의 상념을 지워낸다.
그래, 이유가 무슨 상관일까. 나는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데.
어차피 하지 않으면 다 죽을 텐데.
"아, 그래.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계속 얘기해 봐. 나쁜 소문은 뭔데?"
이야기를 계속하자.
"나쁜 소문은, 그 활약을 벌인 사람이 카하르의 창, 아니. 카하르의 악녀라는 내용이네요. 그냥 짐승끼리의 영역 다툼 아니냐,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뭐 그런 소문들이요."
뭐, 그 정도 반응이야 예상하고 있었다.
나 같아도 의심했을 테니까. 오히려 저 정도면 생각보다 온건한 소문이었다.
차라리 좋은 소식 쪽이,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괴상한 소문은?"
"피와 내장으로 이루어진 마물이 제도에 나타나, 수인들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요. 이것도 당신 이야기 같던데요?"
"......"
할 말이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본!선! 입니다!!
상상도 못한 결과!! 다 여러분들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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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정말 부득이하지만, 이 한 편만 올라갈 것 같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요..!
연재시간 안정화와 앞내용 점검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이..!
단 6시간이라도..!
원래는 플러스 신청을 하면서 하루를 들여서 할 계획이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오늘 안에 끝내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하루 2화씩 연재가 계속될거예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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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Y0님 후원 감사합니다!! 오늘은 참 기쁜 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