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화
프리데와의 재회는 나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프리데가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삼백 마리에 가까운 짐승 놈들을 아주 고깃조각으로 만들었다던데. 심지어 대전사까지 쓰러트렸고."
"삼백? 내가 그렇게 많이 베었던가...?"
솔직히 몇이나 죽였는지는 잘 몰랐는데.
초반엔 정신줄을 놓은 상태였고, 나중엔 거의 무아지경으로 싸웠던 탓에.
나 혼자서 수인 삼백이라. 대부분이 열성 잡종들이긴 했지만, 여전히 현실감 없는 전과였다.
밀리아가 말하길, 수인들의 삼 할가량을 내가 해치웠다고 했던가.
그럼 폭동을 일으킨 놈들이 거의 천 명에 달했었다는 얘기네.
프리데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래. 놀라운 전공이지. 단신으로 수인 삼백을 참살해, 제도를 구한 여기사. 전설은 무리더라도 노랫거리 정도는 되지 않을까?"
"......제발, 그러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내 노래라니.
생각만 해도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뭐 하러 온 거야?"
설마 진짜 병문안을 하겠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우리가 그럴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분명 뭔가 목적이 있으니 찾아왔겠지.
그러면...황실의 초대장이나 자기 아버지가 보낸 편지 때문에 온 건가? 생각나는 건 그 정도인데.
"아, 그게 말이지..."
놀랍게도, 갑자기 프리데가 말문을 흐렸다.
머뭇거리듯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만을 이리저리 움직여댄다.
"어, 그...뭐냐,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길래 이리도 망설이는 거지...?
어울리지도 않게.
"뭔데?"
"그...고생 많았다고. 훌륭했어. 이 정도로 끝난 건 다 네 덕분이네."
프리데가 어색하게 웃었다.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칭찬 한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더냐.
내 덕분이라.
"...그런가."
"음? 표정이 영 별로인데. 기껏 칭찬해줬더니."
"결국 이만 명이나 죽었으니까. 다들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수인 탓으로 책임을 돌리기로 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변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여전히 죄책감은 남아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칭찬할 때마다, 그것이 가시처럼 심장을 찔러왔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너답지 않은 소리네. 뇌 손상이라도 온 거야? 하긴, 수인에게 머리를 얻어맞았었지."
프리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이.
나답지 않은 소리라. 확실히 그럴지도.
"그렇잖냐. 놈들은 나를 최우선목표라고 불렀어. 보리스는 카`하르가 제국의 아래에 합류했기에 그런 일을 일으켰다고 했었고. 그러니 내 탓이지. 그건 내가 내린 결정이었으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원작대로 기껏해야 오십에서 백수십 명으로 끝날 일이었겠지.
결과물은 이만 명이었고.
"아하,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처절히 싸웠다 싶더라니, 설마 책임감이라도 느꼈던 거야? 네가? 웃기는 일이네."
"그야...! 그래. 데인인들을 잔뜩 죽여왔던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게 웃기긴 하지. 그래도-"
내가 죽인 건 아니지만, 이 몸의 주인이 죽인 건 맞으니까.
그런 살인마가 이제와서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고 우울해하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꽤 이상해 보이긴 하겠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튼 내 말은, 이번 일의 최고 공로자가 정작 본인은 죄책감에 질식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서."
"...공로자가 아니라 원흉이겠지."
프리데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아아아...내가 왜 이렇게까지 말해줘야 하는지. 하여간, 잘 들어."
손아귀에 들어간 힘 때문에 어깨가 아파왔다.
"2만 명이 죽은 것? 네 덕분이야. 너 아니었다면 최소한 일만은 더 죽었겠지. 학생들은 거의 다 죽었을 테고."
"그건-"
"계속 들어. 아샤를 통해 은을 준비해두지 않았으면? 더 죽었겠지. 어쩌면 나이젤 경이나 너, 나조차도. 아샤를 쫒느라 적이 분산된 덕분에 겨우 이겼으니까. 그렇게 우리가 죽어버리면, 수습하러 나온 기사들은 자칫했으면 순혈 여섯에 대전사 둘을 더 상대해야 했을 테고."
최소한 그 부분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사들과 보리스, 나탈리아마저 쓰러트린 덕분에 그나마 폭동이 빠르게 수습된 것이니까.
그들 모두가 제도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추가되었겠지.
"그리고 뭐, 네가 없었으면 그놈들이 제도에서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었을까? 천이나 되는 병력을 모아놓고? 네가 없어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그래도 최소한, 사흘만 먼저 지하수로를 조사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너무 안이했어."
원작만 믿고 시간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들이 귀 자른 열등종 노예들을 이용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지.
전사들의 숫자도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조금 많았고.
그래도, 적어도 미리 증거를 잡아내 대비시켰다면 그렇게 우왕좌왕하면서 기사전력을 낭비하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폭동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진압해 피해를 최소화했을지도 모르고.
"멍청한 소리. 그랬으면 오히려 거기서 다 죽었지. 저렇게 준비하고 있던 놈들이, 수로를 돌아다니는 수상한 자들을 내버려 둘 리 있겠어? 스물이 넘는 전사에 대전사 셋까지 동시에 튀어나왔을 텐데. 나이젤이 세 명이어도 졌을걸.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프리데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건 그렇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확실히 놈들의 전력은 우리만으로는 맞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원래는 내 감각을 이용해 최대한 접촉을 피하며 증거만 수집할 계획이었다.
최선의 결과는 따로 떨어져 있는 놈이라도 하나 찾아내 그 시체를 가져가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냄새나 기척이 많아지면 바로 도주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감지 능력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수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그러니 영문 모를 죄책감 같은 건 집어치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치고, 오래 사는 사람을 못 봤으니까."
그런 걸까. 모르겠다.
확실히 그동안 입은 부상을 생각하면 오래 살지 못할 뻔하긴 했는데.
일단 업을 깨우친 이상, 몸이 회복되고 나면 이제 한동안 중상을 입을 일은 없겠지만.
다시 고민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이들을 지키면 된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도 되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명제였다.
아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결론은 나와 있었다. 고민해도 의미가 없으니, 흘려보내야 한다는 결론이.
이미 일은 벌어졌고, 어차피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하니까.
내가 없어진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없다고 이미 바뀐 이야기가 원작대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으니.
결국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그러니 묻어두자.
후회나 죄책감은 검을 느리게 만들 뿐이니까.
...그래도.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거친 말투였지만 그래도 그녀 나름의 위로는, 지친 가슴 속에 스며들어서. 메말라버린 땅을 적시는 비처럼.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했으니까.
----
결국,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프리데가 슬쩍 웃었다.
"그래. 기껏 쓸 만한 달인을 얻었는데. 픽하고 죽어버리면 이쪽도 손해가 막심하거든."
"얻어...?"
"아버지께 들었어. 너,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북부로 올 거라던데. 편지 받지 않았어?"
아, 페일룬에서 온 편지가 그 내용이었나. 이제 막 읽어볼 참이었는데.
입학을 신청할 때 북부 전선에서 오 년간 종군하라는 협상안에 동의하긴 했었지.
정작 그때가 온다면 루드비히 후작에게 부탁해 베렝게리아로 빠질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둘 중 더 급한 곳으로 가야겠지.
"편지라면 몸이 이래서, 이제 막 읽어볼 참이었는데."
"그래? 뭐, 별 내용은 없을 거야. 아버지는 편지를 길게 쓰시는 분이 아니시니."
마침 적절한 때이다 싶어서, 페일룬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꺼내 들었다.
새하얀 편지지 위에, 굵고 힘찬 필체로 단 세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제도에서 벌인 활약, 참으로 인상 깊더군. 페일룬은 귀녀를 환영하네. 3년 후, 북부에서 만날 날을 기대하지.'
...동부 쪽으로 빠졌다가는 붙잡으러 올 것 같은 느낌인데.
"정말 별 내용 없긴 하네."
"그렇지?"
페일룬의 편지를 내려놓고, 다음으로 황실에서 온 초정장을 집어 들었다.
"아 그 초청장. 역시 너한테도 갔구나. 하긴 당연하겠지."
"뭔지 알아?"
"포상 수여식이지 뭐. 이번 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작위나 훈장 같은 걸 내리려는. 이런 큰일이 벌어진 이상, 영웅담이라도 퍼트려서 뒤숭숭한 분위기를 진정시켜야 하니까. 너는 꽤 바빠지겠네, 아마도."
레이시와 같은 말을 하네.
내가 바빠질 거라고.
"바빠지다니, 수여식 같은 건 하루 이틀이면 끝날 일 아니야?"
"수여식이야 그렇지. 문제는 너야. 제도의 참사를 몸 바쳐 막아낸 여기사, 최연소 달인, 타국의 왕녀 신분에...어쩌면 제국의 작위까지 받을 여자."
"작위라고?"
"그래. 기존의 악명이 좀...아니, 꽤 많이 문제가 되겠지만, 황실도 뭔가 대책이 있을 테니 너를 초청하는 거겠지? 그 대책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결과적으로, 수많은 귀족들이 네게 관심을 가지겠지."
귀족들의 관심인가...일단 나쁜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제국 내에서 내 입지를 쌓아야 하기도 하고, 오필리아 문제와 황족 관련 문제도 해결해야 하니까.
그런 문제들은 일개 유학생이 간섭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거기에 외모도 꽤 아름다운, 적령기의 여성이기도 하고."
"......뭐?"
지금 뭔가 흘려듣기 어려운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평소에야 기세랑 눈매 때문에 그냥 살벌하기만 한 얼굴인데, 부상으로 눈에 힘이 풀린 지금은...느낌이 좀 다르거든. 아마, 나중에는 무도회 초청이니, 약혼 신청. 심지어 결혼 신청 같은 것까지 엄청나게 날아오지 않을까? 네 실력과 신분, 외모까지 노리고 말이야. 그야말로 특급 신붓감이네?"
듣던 중 가장 끔찍한 말이었다.
질색하는 내 표정을 보고, 프리데가 쿡쿡대며 웃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날씨가 참 좋네요!!
====================
프리데의 위로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고 하네요!
====================
[TMI]
프리데의 호감도는 수인 하나를 죽일 때마다 증가한다.
호칭이 야만인에서 너로 변경되었다!
=====================
VCFlo님 소중한 후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