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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67화 (67/100)

제 67화

미래에 찾아올 연애편지라니

"청혼이라니, 설마 그런 얼간이가 있을까."

없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그래, 이해는 한다. 내 얼굴이 미형에 속한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으니.

헤르셀라의 악명 때문인지 아니면 이 사나운 눈매 때문인지, 다행히 그런 쪽으로 내게 관심을 보여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덕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었는데...

프리데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상황이 좀 꼬일 수도 있다.

그것도 내가 절대 바라지 않는 쪽으로 말이지.

부상으로 골골대는 상태라 눈이 풀려서, 위협적인 느낌이 하나도 없다고?

어쩐지 그 어린 열네 살배기 수습사제가, 조금도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모습이 신기하긴 했지.

그때는 그냥 얘가 어려서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건가, 하고 넘겼었는데...

그게 사실은 압박감이고 뭐고 진작에 싹 사라졌었기 때문일 줄이야.

긴장감이 어깨를 울렸다. 전투의 긴장과는 좀 다른 방향이었지만.

확실히, 생각해보면 내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이대로라면 내게 군침을 흘리는 정신 나간 놈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나만 손에 넣으면...

우욱.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미지에 순간적으로 헛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애벌레가 귓가에 기어들어 가, 귓 속에서 연신 꿈틀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쾌감을 억누르고 생각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래. 나와 정략 관계를 맺기만 하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지위 상승의 기회가 되겠지.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달인급 전력이자, 차후 동부 카`하르와의 교두보가 될지도 모르는 자를 가문에 들이는 것이니까.

카`하르가 야만인이라 멸시받기는 하지만, 일단 제국이 카`하르와의 협정을 인정한 이상 그 왕녀 역시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타국의 왕족으로 대우받는다.

그러니 그 남...편 역시, 타국의 부마 정도의 지위를 인정받겠지.

혹여 아이샨기오르 역시 페일룬처럼 언젠가 제국의 선제후가 될지도 모른다, 따위의 기대를 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만 되면 선제후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셈이니, 자신들도 단숨에 제국 굴지의 대귀족이 될 테니까.

타국의 왕가는 결국 어디까지나 왕족으로서 예우받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선제후들은 제국의 핵심 실권자들이니.

그러니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물론 이해한다고 했지, 납득을 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난 카`하르로 돌아갈 생각 따윈 없으니 교두보고 뭐고 불가능하고, 애초에 평화 협정도 3년을 못 갈 테니 다 헛된 꿈이건만.

청혼이고 약혼이고 구애고, 받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불쾌하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서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나면, 눈매나 기세 역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괜찮겠지.

그렇지?

"글쎄? 모를 일이지."

내 표정이 그렇게도 우스웠는지, 프리데가 쉴 새 없이 얄밉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이 여자도 참 많이 변했네. 처음엔 대놓고 날 혐오하는 티를 팍팍 내던 사람이.

이젠 병실까지 찾아와 날 놀리며 웃고 있다니.

아무리 수인을 죽이는 것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인물이라지만,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지 않나?

그래도 온갖 짜증을 부릴 때보다는 이쪽이 차라리 낫긴 하니까.

그래. 웃어라 웃어.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잡음처럼 흘려보내며, 황실의 초청장을 열어 편지지를 꺼내 보았다.

귀퉁이마다 금박 세공을 입혀놓은 데다가, 상단부에 찍힌 황실의 문양에 보석 가루를 새겨넣어 장식해놓은 화려한 편지지.

일회용 종이치고는 무척이나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하긴 황족이라는 게 다들 이렇지. 사치로 권위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

편지지의 내용은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장황하기 짝이 없었다.

내 활약상에 경의를 표한다는 앞부분을 제외하면, 결국 프리데의 말대로 포상 수여에 관한 내용뿐이었지만.

제도의 복구작업이 일단락되고 나면, 희생자들을 위한 대규모 장례미사를 시행할 예정이라던가.

그곳에서, 수인 전사들을 막아낸 아카데미생들을 대상으로 그 공훈에 대한 포상을 내릴 계획이라 적혀있었다.

포상 내용이나 정확한 일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아마 40일 후쯤에 실시될 것이라고.

"황실에서 내리는 포상 수여식이라니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조금 막막하긴 했다. 그런 자리에서 취해야 할 예법 따위를 내가 알 리 없었으니까.

"딱히 준비할 건 없을걸? 그냥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고서, 무릎 꿇고 대답만 잘하면 돼. 기본적인 절차쯤은 미리 예행연습을 할 테고, 황실도 학생들에게 그 이상의 예법을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아카데미 제복이라. 답답해서 옷장 어딘가에 처박아 뒀던 것 같은데. 나중에 확인해봐야겠다.

딱 하루만 입으면 된다니까 그 정도야 뭐 입어줘야지.

"수여식이 끝나고 나면 몇몇 귀족들이 너에게 인사라도 하러 올지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평소처럼 대하면 그만일 테고."

평소처럼이라니. 참 애매한 말이네.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는 소리겠지?

...믿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긴 뭐, 루드비히 후작에게도 대놓고 으르렁대기도 했었는데, 귀족이라 해 봐야 대부분 그 아래일 테니 상관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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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이만 돌아갈 테니, 푹 쉬도록 해. 날아들 연서들에 답할 말이나 미리 고민해두면서 말이야."

루드비히 후작의 편지를 꺼내 들 때쯤, 프리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날 놀리면서.

꽤 유해진 말투나 태도도 그렇고, 이 정도면 그녀 나름 내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 여겨도 되는 거겠지...?

뭔가, 성격 까칠한 고양이에게 육포라도 먹여 길들인 느낌이었다.

그래. 따지자면 잘된 일이지. 앞으로도 북부 쪽과는 계속 친해져 두어야 하니까.

"그래. 가봐라."

병실을 나서는 프리데에게 대충 답하고 마지막 편지 봉투를 뜯어보았다.

루드비히 후작의 편지라. 그것도 나이젤이 아닌 나에게. 무슨 내용이려나?

꺼내든 편지지는 페일룬 대공과 마찬가지로 투박하고 깔끔했다.

국경지대 귀족들 특유의 담백함이라는 걸까?

단정한 필체의 제국어가 흰 종이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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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샬르 아이샨기오르 공녀.

수인들이 일으킨 비극에 대해 전해 들었네. 실로 경악을 금치 못 할 일이더군.

제도의 방비가 그처럼 해이해졌을 줄이야.

그런 규모의 폭동이 벌어질 때까지, 그 전조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말일세.

평화가 너무 길었던 탓이겠지.

온갖 적들이 제국이 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리고 있건만.

귀녀의 분투에 경의를 표하네.

제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심을 보여주었다고 하던데, 무언가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나?

눈부신 활약에 대한 소문이 이 장벽까지 들려오더군.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상당히 재미있게 왜곡된 소문이었지만 말일세.

제국인들의 비명을 듣고, 여신의 기사가 강림해 제도를 수호했다던가.

혼혈 수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른 수인들을 모조리 죽였다던가.

제국 황실이 비밀리에 육성하던 달인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도 있었지.

재미있지 않나?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네.

괴이하게 생긴 마물이 수인들의 피와 살점을 뜯어먹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이르러서는, 나 역시 실소를 금치 못했네.

소문이라고 믿겠네.

나이젤 경에 대해서도 들었네.

귀녀와 페일룬 공녀 덕분에 간신히 회생했다고 했던가. 감사하는 바이네.

페일룬에도 큰 신세를 졌군.

앞으로도 나이젤 경을 잘 부탁하네.

본론으로 돌아가지.

이번 일로 황실 역시 귀녀에게 큰 흥미를 느낀 모양이더군.

그 때문에, 나 역시 근시일 내로 제도에 방문할 생각일세.

수여식 전에 한번 찾아가겠네.

황실에 대하여, 귀녀가 필히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이 많다네.

그리고, 그것 말고도 귀녀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추신.

나이젤 경의 보고서 역시 잘 읽어보았네.

허가하지. 앞으로 매달 칠십 골드까지는 자유롭게 사용해도 좋네.

귀녀는 충분한 성과를 내게 증명해 보였으니 말일세.

그리고, 내가 할 말은 아니네만. 마력초 좀 줄이게나.

루드비히 빌헬름 폰 란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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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내려놓고 병실 천장을 쳐다보았다.

무늬 하나 없는 심플한 베이지색 천장에 투박한 마력등만이 매달려 있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 전이라 그런지 불은 꺼져 있었지만.

황당한 소문들이었다.

여신의 기사에, 혼혈 수인에, 황실의 비밀병기? 진짜 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구나.

하긴, 소문이란 원래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상하게 변질되기 마련이니까.

그 와중에 허무맹랑하다는 마지막 소문만이,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는 점이 내심 어이가 없었다.

하필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있었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이를 잡아먹는 카`하르 여자로도 모자라, 이젠 수인을 뜯어먹는 마물인가.

...뭐 그래도 뜬소문에 불과하니까, 괴상한 이야기들은 언젠가 잦아들겠지. 신경 쓰지 말자.

다 읽은 편지들을 봉투에 집어넣고,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후작이 이 시점에 날 찾아와서 해야만 하는 이야기라.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황족들의 계승권 분쟁에 관한 이야기? 아니면...

뭐, 마침 잘됐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슬슬 들어두어야겠지. 이 몸의 어머니, 아이멜라 메디안에 대해서.

병상에 다시 드러누웠다.

귀족들에 대해서라던가, 황가의 문제라던가.

여러 가지 고민할 것들은 많았지만 지금은 잠시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프리데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그래. 어차피 일단은 몸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니, 쉴 때는 제대로 쉬어두어야 한다.

일단 몸이 회복되고 나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의 절반쯤은 자동으로 해결될 테니까.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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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돋는 악몽을 꾸었다.

느끼하게 생겨먹은 남자들 수십 명이 내게 찬사를 바치며 선물을 건네는 꿈을.

장미 꽃다발에, 화려한 자수가 놓인 손수건.

심지어 가린 부위보다 드러난 부위가 더 많은 드레스까지.

그 와중에, 연미복을 입은 금발 데인인이 무릎 꿇고 도끼를 선물하는 모습은 진짜...

크누트 네가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데.

불을 질러 다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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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을 땐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무슨 이따위 꿈을...

이게 다 프리데 때문이다.

환자복과 병상마저 축축해, 수습사제에게 갈아달라고 부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슬슬 새 에피소드가 시작되겠네요!

역시 도입부는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져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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