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
프리데는 한동안 페르네를 욕하며 계속 툴툴댔고, 칼릭스가 그런 프리데를 달래며 애써 페르네를 변호했다.
변호라기보다는...요정은 원래 그런 종족이라며, 화내봤자 본인 손해이니 그냥 흘려넘기라는 내용이었지만.
그들과 적당히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건물 정문 앞에서 계속 서 있기도 좀 그랬으니까.
헤어지기 전에, 아샤에게 새로 입을 흑철 갑옷을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숄이랑 스커트, 팔다리에 흉갑까지.
기존 갑옷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으니 말이야.
...생돈 들여가며 고친 지 얼마 안 된 물건이었는데.
흉갑은 상체 전체를 덮는 대형 갑옷이 아니라, 가슴팍 정도만을 가릴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복부까지 덮어버리면 움직임에 제약이 너무 커져서, 내 전투방식에 꽤 방해되니까.
그 정도라면 80골드에 해 주겠다길래, 두 달에 걸쳐 나누어 지불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나 역시 생활비는 좀 남겨두어야 하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친해진 덕분인지 아샤는 2개월 무이자 할부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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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이젤 너도 갑옷이 꽤 부서지지 않았어? 그것도 수리해야 할 텐데."
"아, 제 것은 이미 주문했습니다. 란덴부르크의 기사는 군수품을 구매할 시, 서류만 제출하면 공금으로 처리가 가능하니까요."
"그건 좀 부러운데."
나이젤과 함께 잡담하며 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동안 고용인들이 관리를 계속해준 것인지, 방 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퇴원하며 챙겨 온 무기들을 구석에 내려놓고, 곧바로 책상 쪽으로 향했다.
이때만을 기다렸다.
거의 한 달만의 담배를 꺼내 들어,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빨아들인다.
폐 속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쳐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머릿속이 맑아지며 박하 타는 향기가 방을 가득 채운다.
청량감과 비슷한 싸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전해졌다.
그래, 이거야.
이 느낌이 정말이지 그리웠다.
방 안이 삽시간에 희뿌연 연기로 가득찬다.
창문을 열어 연기를 흘려보내며, 계속 줄담배를 피웠다.
재떨이가 가득 찰 때까지.
한 갑을 넘어 두 갑째에 이를 때쯤, 나이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길거리에서 볼일을 보는 남자를 마주친 여성과 비슷한 표정으로.
...그래도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내지는 않는 것이, 그녀 나름의 이해심이겠지.
이곳의 담배가 몸에 해로운 성분은 없어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제지당해도 변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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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적당히 씻고 자려고 욕실로 들어왔다.
여태껏 구호소에 있었던 탓에 제대로 씻지를 못했다.
나 말고도 환자가 제법 많았던 탓에, 목욕에 쓸 물까지는 확보하기 어렵다고 했던가.
팔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아보니, 확실히 그, 진한 체취가 나고 있었다.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훈제 요리라도 만들 정도로 피워댄 마력초의 박하향이, 그나마 체취를 조금 가려주고 있었다.
욕조에 물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지긋지긋한 환자복을 벗어 던졌다.
마차를 타고 돌아올 때도, 특별관의 정문 앞에서도 계속 이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 옷은 피와 땀과 재를 포함한 온갖 오물들에 찌든 데다가, 갈기갈기 찢어져 걸레로도 못 쓸 누더기가 되어버린지라.
그나마 저번에 옷을 넉넉히 사 두었던지라, 이젠 그것들을 입으면 되긴 하지만.
어째 싸울 때마다 매번 옷을 폐기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게 전사의 숙명일까. 의복조차 소모품이 될 줄이야.
환자복을 바구니에 던져넣고, 욕조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 속의 내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보니 거울을 보는 것도 한 달 만이었던가.
뭐라고 해야 할지.
처음 보는 여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탓인지.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
처연하게 풀린 눈동자에, 피로감에 찌든 듯 조금 어두워진 눈매.
살짝 파여 들어가 해쓱해 보이는 볼.
축 가라앉아 애처롭게 들러붙은 머리카락까지.
...누구냐 너.
날카로운 눈매의 여전사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
거울 속에선, 병약하고 지쳐 보이는 인상의 미녀만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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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꿈에는 데미안이 나왔다.
용사가 된 데미안이 마침내 세계를 구하고, 자신을 기다리던 연인과 교회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수많은 하객들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는데...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칼릭스와 에드가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샤와 프리데, 라나가 웃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분한 눈물을 흘렸고.
주례를 선 것은 사제복을 입은 루드비히 후작이었다.
데미안이 신부에게 다가가자, 면사포를 살포시 걷은 신부가 수줍게 볼을 붉혔다.
베일 너머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빌어먹게도, 녹색 머리가 아니었다.
검은색. 그래, 검은색이었다. 미친 꿈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영원토록 사랑할 것임을, 주님 앞에서 맹세하시겠습니까?"
"맹세합니다!"
데미안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던 여자가 이에 화답하듯, 수줍게 입을 벌렸다.
이건, 악몽이야. 어서 깨어나야 해.
- 콰아아앙!
그 순간, 예식장의 문이 폭발과 함께 터져나갔다.
"나는, 이 결혼에 찬성할 수 없다!!"
...또 크누트였다.
진짜, 뭔데. 이게.
"나도 찬성 못 한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음과 함께, 예식장의 천장을 박살 내며,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바지만 입은 오르한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 뒤엉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광경에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꿈속인데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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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
일어나자마자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우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차라리, 망자들이 나오는 꿈 쪽이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일단 확실하게 대처법을 생각해 두어야겠어.
이러다가 나중엔 아예 아이를 키우는 꿈까지 꾸게 될 것 같아서 오싹하니까.
책상에 앉아 연기를 뻑뻑 내뿜으며 고민한다.
강의는 아직 재개되지 않았기에, 오늘은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고.
그래.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일단 내게 구애...그래, 구애해오는 정신 나간 귀족 놈이 있다고 가정하자.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마음 같아서는 아샤처럼 하고 싶은데, 대련하는 것도 아닌데 합당한 이유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가는 뒷수습이 아주 곤란해질 테고.
머리칼을 거칠게 긁어내리며, 생각을 계속 이어간다.
일단 적을 좀 나누어보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항상 이길 수 있는 법이니까.
우선, 말로 해서 들어먹을 놈들.
이 경우엔 적당히 거절하면 되겠지. 불쾌감만 참으면 그나마 가장 나은 놈들이다.
무슨 말로 거절해야 할지, 그 부분만 고민해두면 될 거야.
둘째, 말로 해서는 못 알아먹고 음습한 뒷수작을 부려올 놈들. 그 중에서, 건드려도 별 탈 없을 녀석들.
대놓고 건드리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암습한다던가 하면 되는 놈들 말이지.
명백한 적들.
제국 귀족들 중에서는 인간 언저리의 악인들도 꽤 있다.
나중을 생각하면 오히려 없애두어야 할 놈들이.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애초에 그런 놈들까지 지키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셋째, 뒷수작을 부려오긴 하지만 건드리면 뒷감당이 안 되는 인물들. 고위 귀족이라던가, 황족같이.
설마 그 정도 되는 인물들이 나에게 집착하겠냐만은...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 경우가 가장 골치 아프다. 내 쪽에서 손을 쓸 방법이 없으니 말이야.
루드비히 후작에게 부탁해보던가 해야 하려나...
아니면 아예, 내게 접근할 메리트를 없애 버릴까?
이 방법도 효과는 꽤 있을 것 같은데, 지나치면 문제가 될 지도 모르겠네.
제국이 나를 통제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곤란하니까.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겠지.
일단 외모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넘어가자. 회복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그러면...
고민하며 계획을 세워간다.
어차피 실제로 겪어보기 전까지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지만, 대응책 정도는 미리 고민해두어야 나중에 편할 테니까.
그리고 사흘 뒤, 마침내 루드비히 후작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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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만에 본 루드비히 후작의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감색 제복에 코트 차림. 입에 문 마력초까지. 그때 그대로였다.
내 얼굴을 본 후작이 놀란 듯이 입을 벌리고, 나직한 감탄을 내뱉었다.
감탄하지 마라. 짜증 나니까.
나이젤은 후작을 향해 정중하게 경례한 뒤, 식당에서 받아온 다과를 내려놓고 자리를 피했다.
"오랜만이네. 귀녀는 신수가, 뭐라고 해야 할까...훤해진 것은 아니고...그래, 가련해졌군."
처음부터 재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가련이라니, 그 단어가 나를 칭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만나자마자 기분 나쁜 말이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사내새끼들이 달라붙을까 봐 고민 중인데."
"음? 그런 종류의 관심은 싫어하나? 귀녀 역시 언젠가는 배우자를 찾아야 할 텐데 말일세."
접대용 소파에 걸터앉은 후작이, 재떨이에 마력초의 재를 털어내었다.
살짝 틀어진 미간이 뭐랄까, 조금 곤혹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그럴 일 없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마찬가지이고. 배우자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소리지.
남자는 정신적으로 무리고, 이 꼴이 되고 나서는 여자를 봐도 마음이 동하지를 않으니 애초에 불가능하다.
난 평생 독신으로 살 거야. 이미 그렇게 정했다.
"흐음...그 상대가 드높은 지위의 인물이라도 그러한가? 가령 황족이라거나 말일세."
집요하네. 게다가 묘하게 구체적이고.
...날 대상으로 그딴 뒷수작이라도 벌여 놓았다는 뜻은 아니겠지?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황족과 후작이 한패라면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까.
"황족이 아니라 황제여도 마찬가지니까,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귀녀의 의사가 그리도 굳건하다면야...그래, 어쩔 수 없겠군. 알겠네."
후작이 다시 연기를 빨아들였다.
납득한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적당히 넘어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세나."
"그래, 황실에 대해서 해줄 말이 있다고 했었지. 그것 말고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고. 마침 잘됐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거든."
"물어보고 싶은 것이라...그래, 객의 입장인 이상, 주인의 의문에 답해주는 것이 먼저겠지. 말해보게나. 내가 아는 것이라면 대답해주겠네."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부터 말해보라 이거네.
끝까지, 의뭉스러운 태도였다.
내 질문이 무엇이냐에 따라, 본래 내게 전하려던 내용조차 은근슬쩍 바꾸려는 듯이 말이지.
어떠려나, 내 의심이 과한 걸까.
뭐, 상관없다. 그러든 말든 내가 물어볼 질문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면 어디...대답을 들어보도록 할까.
"내 어머니, 아이멜라 메디안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
그래, 대답해 봐.
루드비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린이날이네요!
즐거운 휴일에 맞추어 글 분위기도 잠시 가볍게...!
오늘 표지는 어린 시절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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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애해오는 남자=적이라고 이미 결론지은 하샬르...!
몸 상태가 아직 약해져있기 때문인지, 쉽게 당황하고 자주 악몽을 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