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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70화 (70/100)

제 70화

너의 이름은

방 안은 고요한 정적 속으로 잠겨 들었다.

후작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에 문 마력초만이 하염없이 타들어 간다.

채 빨아들이지 못한 연기가 불씨와 함께 피어오르며 허공을 유영했다.

천장에 닿은 박하 향이 부서져 내리며, 방 안에 형체 없는 꽃을 피워냈다.

나는 나이젤이 가져다준 홍차 한 모금으로 입 안을 적시며,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입 안 가득히 퍼지는 베르가못 향을 즐기면서.

후작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일전에, 성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건 거짓이었나?"

"거짓말은 아니야. 어머니께 들은 것이 아니라, 이걸 보고 짐작한 거니까."

아이멜라의 검을 꺼내 들어, 검신을 절반쯤 뽑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물어볼 생각이었으니까.

청은빛으로 빛나는 검신과 선명한 각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후작이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는 검신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 검은...역시, 귀녀가 가지고 있었나......"

"이것도 무엇인지 아나 보네? 인간을 지키는 열두 검이라니. 이게 대체 뭐야?"

성능은 어마어마한데, 서릿발과는 다른 방향으로 좀 찜찜한 물건이었다.

재질은 대공녀조차 귀한 물건이라며 놀랄 정도에, 푸른빛이니 금빛이니 자기 멋대로 빛나기도 하고.

거기에 이 검을 쥐고 싸울 때는 뭔가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기도 하니까.

"...보이는가? 검신에 새겨진 각인이?"

후작의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훨씬 낮아졌다.

"뭐...?그거야 당연히 보이지, 장님도 아니고."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각인이 보이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반문을 들은 후작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흐음......그렇다면, 말해주어도 되겠지."

후작이 다시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긴 연기를 내뱉으면서. 반쯤 감은 눈으로.

"좋아. 설명해주겠네. 그 검, 맹세의 열두 검에 대해서도, 귀녀의 모친에 대해서도 말일세."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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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에 대해서는 들어보았겠지? 그 정도는 안다고 믿네."

"그래. 800년 전이었나? 12기사와 함께 인류를 구하고 제국을 세운 영웅이라던데. 책에서 읽어보았어."

"12기사... 그렇다네. 그들 한 분 한 분이 모두 인류의 영웅이었지."

루드비히 후작이 옛이야기를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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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전, 여전히 인류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업이라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한창 번성하던 다른 종족들에 비하면 여전히 미약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반인들은 인간을 광산의 노예로 부려 먹었고, 수인들은 사람을 가축 기르듯이 키워 잡아먹었다.

대부분의 종족과 혼혈이 가능하다는 특징은 저주 그 자체였고.

요정에게 붙잡혀 간 인간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알려지지조차 않았다.

그저 두 번 다시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

그러던 중, 한 사내가 나타났다.

금빛으로 빛나는 검을 높이 치켜든 영웅이.

이 세상을 바꾸고 말겠다며, 결의에 찬 포효를 울리며.

처음에는 모두가 비웃었다. 그저 화려한 장식품을 든 인간 하나에 불과하다고.

검사 한 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사람들조차 그를 믿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 세상은 인간 하나가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희망찬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가 검을 휘둘러 용 하나를 추락시킨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온 세상이 그를 주목했다.

그는 핍박받던 인간들의 구원이자 희망이 되었다.

인류를 이끌고 저항을 계속했던 열두 명의 기사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검을 바치며 무릎 꿇었다.

그것이 카롤루스 대제와 열두 기사가 써 내려간, 경이로운 전설의 시작이었다.

다섯 마리의 용이 추락했다.

요정 수호자들의 절반이 불타 죽었다.

서른에 달했던 반인의 가문들은 열 개의 가문만을 남긴 채 모조리 매장당했다.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던 일곱 야수왕들이, 가죽이 벗겨진 박제가 되어 전시되었다.

마침내, 세상은 인류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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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기사들을 맞이한 카롤루스 대제는, 그들을 자신이 성검을 얻었던 장소로 이끌었다고 전해지네. 그곳에서, 열두 기사들은 하나의 서약을 나누었지."

"서약?"

"그렇네. 어떠한 사리사욕 없이, 오직 인류를 위해 영혼마저 불사르며 끝없이 투쟁하겠다는 맹세를 말일세. 그리고...그곳에 있던 신이, 그 맹세에 답하여 그들에게 새 검을 내려주었다고 하지. 그것이."

후작이 검을 내려다보았다. 아련한 그리움을 담아.

어쩌면 동경과도 비슷한 눈으로.

"인간을 수호하는 맹세의 열두 검. 귀녀의 검일세."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이멜라의 검을 쳐다보았다.

혹시 12기사랑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정말 그들의 검일 줄이야.

그런데, 그 말대로라면 이 검, 그냥 귀한 것도 아니고 국보급 물건 아닌가?

내가 거의 성 한 채를 들고 휘두르고 있었구나.

"황실만이 제조법을 알고 있는 진은. 올바른 주인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축복의 각인. 각인을 본 자는 예외 없이 영웅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전설 속의 검. 제국의 비사 중 하나일세."

주인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각인이라.

그래서 내 검을 본 사람들도 귀한 검이라는 소리만 할 뿐, 그 정체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던 건가?

적어도 나는 이 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는 말이네.

영웅의 길이라. 꽤나 모호한 말인데.

"그런 검이, 어째서 내 손에 들어온 거지?"

"제국을 설립한 후, 열두 기사들은 모습을 감추었네. 언젠가 자신들의 후손들이 맹세를 잊고 권력투쟁에 몸을 담을까 우려한 것이겠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고."

그야 뭐, 당연하겠지. 개국공신 가문이 권력에 집착하다 숙청당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

말을 들어보면 대제나 12기사는 그럴 의도가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지만, 그 후손들의 생각은 달랐겠지.

"그렇기에 그들의 성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네. 황실은 알고 있겠지만...기록으로는 오직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지."

그래서 도서관에서 찾아본 책에는 이름만 적혀 있던 거였나.

그나마도 몇 명밖에 없었지. 어쩐지 인류의 영웅이라면서 기록이 이상할 정도로 적다 했더니.

그 말대로라면 황실 역시 내 가문이 12기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은...알고 있겠고.

좋지 않아.

"이야기가 꽤 길어지는데. 그래서, 메디안 가가 그중 하나라는 거야?"

"열두 기사들의 가문은 대부분 몰락했네.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이기도 했고...황제 중에서는 그들을 불안 요소라 여긴 자들도 있었으니까."

후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에 닿아 흩어진 연기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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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기사들의 가문은 그 영광조차 부질없이, 대부분 멸문당했다.

다른 가문의 손에, 적의 손에.

때로는 황실의 손에 의하여.

살아남은 가문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어떻게든 황실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권력을 손에 넣거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거나.

권력조차 없이 자신이 열두 기사의 후손이라 주장하던 무모한 이들은, 모조리 암살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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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을 멈춘 루드비히 후작이 다 타버린 마력초를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전자를 선택한 이들은 확보한 권력을 활용해 황실과 협상했네. 가문의 진실을 밝히지 않는 대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었지."

"그건 꽤 현명한 생각이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그런 비사를 알고 있는 거지? ...내 예상이 맞으려나?"

황실의 손에 의해 제국에서 지워진 비사라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둘 중 하나겠지.

황가의 인물이거나...아니면 그 당사자.

그리고 란덴부르크 변경백은 황족이 아니다.

"그래. 그 생각이 맞네. 내 가문 역시 그러한 이들 중 하나였지."

루드비히 후작이 새 마력초를 꺼내 들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열두 기사의 하나, 베렝게르의 후손은 그렇게 베렝게리아의 선제후가 되었네. 성은 바뀌었지만."

선제후라. 제국에는 다섯 선제후가 있었지 아마.

교단에서 둘, 북부의 페일룬, 동부의 란덴부르크.

그리고 중앙의 비엔 공작가.

교단 측의 대주교들이야 종교인이니 그렇다 치고, 그러면 페일룬이나 비엔 역시 열두 기사의 후손인 걸까?

"반면 메디안 가는 잠적을 택했네. 조용히, 지방의 일개 남작 가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결국은 멸문했지만..."

아이멜라 메디안은 공식적으로는 남작 영애였다 이 말이네.

그런 인물이 어쩌다가 카`하르에 잡혀가 오르한의 아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멸문은 아닌가. 여기 그 후계자가 살아있으니 말일세."

후작이 슬쩍 웃으며 마력초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열두 기사의 후손이라니..."

아비는 카`하르의 정복 군주에 어머니는 열두 기사의 후예라.

이 정도면 상징성 하나는 제국 황가에 맞먹는 혈통이지 않나?

원래라면 그냥 신기해하고 말았을 일인데, 지금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게 알려지면 단순한 일급 신붓감이 아니라, 특급 수준이 되는 거 아닌가...?

그나마 황실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긴 한데.

내 질린 표정이 그저 출생의 비밀 때문인 것으로 보였는지, 후작은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맹세의 검 역시 그 와중에 대부분 소실되었네. 아마 황실 보고에 다섯 자루쯤은 남아있겠지만 말일세. 내 가문이 선제후 직위를 얻어내며 바쳤던 검이나, 황실이 다른 후손들을 암살한 뒤 수집해간 검들이 있을 테니."

연기때문에 갈증을 느낀 루드비히 후작이 찻잔을 들고 홍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잔을 내려놓고 잠시 향을 즐기더니, 다시 검을 가리킨다.

"그리고, 맹세의 검에겐 각각의 이름이 있지. 그 검 역시 마찬가지네."

"이름?"

검의 이름이라.

"그렇다네. 귀녀는 알아두어야겠지. 그 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았으니 말일세."

마력초를 내려놓은 후작이 나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 검에 붙여진 이름은 <인내>.

고난을 견디며 나아가는 자를 위해 벼려진, 수호자의 검."

인내의 검.

뒤랑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다들 저녁은 맛있게 드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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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검 떡밥이 반쯤 풀렸네요!

검의 효과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지만, 검의 역사에 관한 내용은 나왔으니까요!

설마했던 뒤랑달...!

롤랑의 성이 메디안일 리는 없겠지만...그건 작품적 허용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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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후작의 저 대사들, 와칸다식 화법이네요!

"우리 어머니 알고 있었지?"

"그 검은 800년 전 전설로부터 시작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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