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화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어...?
"내 이름값을 빌려,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한다는 뜻이려나?"
굉장히 역겨운 전개가 될 것 같은데.
그야, 열두 기사의 후예가 자신을 지지한다고 하면 명분 면에서 큰 우위를 차지할 수야 있겠지만...
그 기회라는 것이, 지금 내 머릿속을 스쳐 간 방법인 것 같아서.
"그렇다네. 귀녀가 제도에서 벌인 활약이 인상적이기는 하나...그것만으로는 여태까지 쌓아 온 악명을 덮기란 요원하지. 허나, 열두 기사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 말일세. 그러니 반드시 손에 넣으려 하겠지. 혼인을 해서라도."
"...황족들은 내 정체까지 아는 모양이야. 어머니의 성을 말한 기억은 없는데."
황실이라면 메디안 가가 열두 기사의 가문이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지만...
내 어머니가 메디안 가의 영애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둘밖에 없지 않았냐?
루드비히 후작 당신이랑 셰인 경 말이야.
"내가 말했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이 카하르의 왕녀를 받아주었겠나?"
참으로 당당하게 자백하시네.
"결국 당신이 원흉이라는 소리 아니야?"
"...사과하지. 그때는 일이 이렇게 돌아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일세. 사실 나로서도 곤란해진 상황이라네."
곤란?
졸지에 황자비가 되게 생긴 나만큼 곤란하실까?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홍차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향기를 즐길 틈도 없이, 미지근해진 찻물이 위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원래는 어쩔 수 없이 레오폴트 황자와 약혼이라도 하라고 설득할 계획이었네만...귀녀의 뜻이 굳건하니, 그 계획은 폐기했다네."
"당연히 폐기해야지. 황자가 첫날밤에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는 꼴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충동적으로 목을 날려버리고 도망칠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가면이라도 쓰고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다녀야겠지만.
"흐음, 진실로 그럴 셈인가? 그렇다면 3 황자와의 혼례를 추진하면..."
"황자 하나와 변경백 하나가 제국에서 사라지겠지?"
"농이네.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그런 도박을 하겠나."
루드비히 후작이 쓴웃음을 흘렸다.
...농담 맞겠지 후작? 농담이어야 할 거야. 난 농담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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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황자와 형식상이라도 약혼 관계를 맺는다면, 다른 예비 구혼자들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심리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설령 언젠가 파혼하기로 합의하고, 오직 겉보기에 불과한 약혼 관계를 맺는다고 치자.
그딴 합의가 정말 끝까지 지켜질 리가 없잖아.
나는 앞으로 더욱 강해져야 하고, 그 힘으로 많은 일들을 해내야 하는데.
그럴수록 내 가치는 더욱 치솟게 될 테니까.
그러니, 나중에는 아예 '지지자들의 반대에 막혀 파혼은 어려울 것 같다ㅡ'따위의 소리를 늘어놓겠지.
기각이다.
그건 달콤한 미끼를 걸어두었을 뿐,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야.
하나둘씩 집어먹다 보니, 다과는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다.
루드비히 후작이 비어버린 접시를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마력초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일단 열두 기사의 혈통에 대해 밝히는 것은, 내게 무마시킬 방책이 있다네. 그래도 메디안 남작 작위는 수여되겠지만 말일세."
"방책? 뭔데 그게."
선제후 지위를 이용해 황실을 압박이라도 할 셈인가?
나중을 생각하면 그다지 현명한 방법은 아닐 텐데...
"내 후계자가 되게."
"...뭐?"
하마터면 마시던 홍차를 뱉어낼 뻔했다.
방금 굉장히 정신 나간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다과에 환각제라도 섞여 있었나?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네. 실력만 있을 뿐 실권이 없는 자라면 그저 탐스러운 먹이가 되겠지만, 선제후의 후계자가 된다면 이야기가 다르네. 그건 이미 섣불리 삼키려 했다가는 목에 걸릴 정도로 커다란 음식일 테니 말일세."
루드비히 후작이 느긋하게 웃었다.
"선제후의 후계자가 열두 기사의 후예라는 사실을 공표한다? 열두 기사의 권위, 선제후의 권력. 공표하는 순간 그 둘이 합쳐지게 될 텐데, 황실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겠지."
"...잡음이라는 잡음은 다 튀어나올 것 같은데."
분명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일단 황실에 이야기해두면 뒷배 없이 열두 기사의 후예로 공표되는 최악의 상황은 막힐 테고.
나중에 명성을 쌓은 뒤에는 그대로 후작의 후계자가 되면 감히 손댈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카`하르 출신의 여자에게 동부 국경을 맡긴다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잖아.
내 악명도 문제고 부친의 혈통도 문제가 된다.
단순히 아내로 맞이하는 것과 제국의 국경 방위를 맡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니까.
신뢰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반대부터, 아예 국경을 열고 카`하르의 대부대와 함께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음모론까지 튀어나올 텐데.
"그야 귀녀가 하기 나름이라네. 지금 공표한다면야 당연히 그렇겠지. 허나, 귀녀 역시 그간의 행보를 보면 제국에서 명성을 쌓을 셈 아니던가? 황실에는 미리 이야기만 해 두고, 충분한 신뢰와 명성을 얻은 뒤에 후계자로 결정한 사실을 알린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네. ...어차피, 오르한과는 연을 끊을 셈이잖나?"
오르한과 싸워서 내가 제국의 편임을 증명하라는 얘기인가.
그래. 언젠가 하기는 해야 할 일이지.
"결국 지금은 다른 귀족들에게 여전히 탐스러운 먹이로 보일 거라는 뜻이네. 곤란한데. 내가 그 녀석들 머리통을 반쯤 뭉갤 수도 없고."
"흠...마음 같아선 나 역시 머리를 부수고 싶은 자들이 있네만, 역시 지나치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걸세. 그래도 귀녀가 내 후계자가 되는 것에 동의한다면, 선을 넘는 이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정도는 내가 무마해주겠네. 다만 그 경우에도 가급적 죽이지는 말게나."
어? 안 죽이면 좀 패도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게. 그런데, 당신은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야?"
"어차피 나는 새 아내를 들일 생각은 없네. 베렝게리아 선제후의 계승이 끊어지느니, 같은 열두 기사의 후예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지."
...조금 미묘한 말 아닌가.
내 혈통의 절반은 그 계승을 끊어버린 장본인인데 말이지.
어차피 그들과는 이미 연을 끊은 셈이지만.
게다가, 결국 내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끊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모르겠다. 나이 먹고 나서 양자라도 들일까.
슬슬 돌아가려는지 루드비히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그러면 몸조리 잘하게나."
"그래. 당신도."
가볍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여전히 미심쩍은 면이 많기는 한데, 그래도 꽤 도움이 되는 양반이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지.
모자를 눌러쓰고 방을 나서려던 후작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아아, 그래. 아마 수여식 이전에 한 번쯤, 황실에서 귀녀를 부를지도 모르겠군. 부디 오늘의 대화를 잘 기억해두게."
황실의 부름이라. 조금 긴장되긴 하는데.
가서 내 의사를 확실히 밝혀두기는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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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강의가 재개되었다.
아직 실전훈련에 관한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실내에서 진행하는 이론 강의였지만.
내겐 오히려 이론 강의 쪽이 더 도움이 되니 차라리 다행인가.
특별관을 나서서 나 홀로 본관의 강의실로 향했다.
아샤는 내 갑옷을 만드느라 바쁘다며 불참했다.
그래서 나 역시 짧은 상의에 바지만 입은 채였고.
하루빨리 완성되었으면 좋겠는데.
본관 근처에 들어서자, 수십 쌍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저 여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파견 나갔던 선배인가?'
'생긴 걸 보면 종교학부의 사제 같은데, 사제복도 제복도 아니고...'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소곤거린다.
의문과 감탄, 가끔은 그것보다 불쾌한 눈으로.
'레이시 님 아니야?'
'레이시 님은 하얀 머리시다, 그것도 모르냐 넌?'
'아니 그래도, 저 얼굴을 봐. 성녀님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잖냐.'
뭐라는 거야.
얼굴 붉히지 마라. 기억해둘 거니까.
'저 옷, 저 머리색...그, 카하르 여자 아니야...? 아이샨기오르 왕녀 말이야.'
"뭐? 그럴 리가 있냐. 그 괴물 같던 여자가 어딜 봐서 저런 미인이야.'
'괴물이라니, 그래도 우리를 구해주긴 했잖아. 생긴 건... 말로만 듣던 마물인가 하긴 했지만.'
수인 먹는 마물이라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 너희들은 아니겠지?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살짝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러면 동생이라던가? 자기 언니를 찾아온 것 아니야?'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언니랑 달리 궁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랐다던가?'
'오오 수선화 여신이시다 오오...!'
별소리가 다 나오네. 헤르셀라가 여동생이 있긴 했지만 난 얼굴조차 본 적 없다고.
금화궁에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겠지.
거기에, 수선화 여신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놈은 또 뭐야.
눈동자만 슬쩍 돌려 그놈을 쳐다보았다.
...어?
저 자식, 그때 아샤에게 다리 사이가 날아갔던 놈 아닌가...?
...고자가 되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본관으로 향하는 동안, 끝없는 관심이 계속 이어졌다.
불쾌하다. 한없이 불쾌하다.
얼굴에 고정된 시선이 불편하다.
다리를 흝는 눈길이 기분 나쁘다.
흉부에 집중된...이놈들은 언젠가 패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다리 사이에. 딱, 단검 한 발만.
이 새끼들. 너희도 서른이나 죽었다며.
아무리 한달 가까이 지났다지만 대체 왜 이렇게 분위기가 활발한 건데.
다 죽어가는 것마냥 축 처진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
...슬픔에 묻혀있기 싫어서 억지로 밝게 구는 건지 뭔지.
담배를 꺼내 들어 불을 붙이고, 타버린 성냥을 내던졌다.
연기가 오늘따라 맵고 쓰다. 눈이 아플 정도로.
허공을 향해 맥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흰 구름이 하늘 너머로 퍼져나가며 서서히 녹아내린다.
그냥, 돌아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공지대로 오늘은 그냥 두 편을 연달아 올렸습니다!
루드비히 후작이 말이 너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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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후계자가 돼라!
그도 그럴 것이 황자비가 되어버리면 동부국경에서 전력으로 써먹겠다는 후작의 초기 플랜이 완전히 꼬여버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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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 루드비히의 생각]
후작은 황실이 하샬르의 혈통을 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접근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겠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단기간에 이 정도 명성과 성장세를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나이젤에 살짝 못 미치는 실력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나이젤의 보고에 따르면 신체능력이 뛰어날 뿐 달인의 경지는 아니었기에.
그러니 아무리 하샬르라 할지라도, 업을 깨닫고 달인이 되기까지는 그래도 년 단위 시간은 걸릴 거라 생각했겠죠.
그 조금의 간격을 넘어서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무척 어렵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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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황실 입장에선 악명 높은 야만인 여전사보다는, 권력자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는 쪽이 유리했어요.
설령 열두 기사의 후예라는 사실을 공표한다 할지라도요.
그래서 나중에 동부로 불러 오르한과 싸우게 할 생각이었는데, 제도 대화재가 터져버리며 일이 뒤틀렸습니다.
최연소 달인 등극 + 제도에서 펼친 대활약 때문에 주인공의 메리트가 확 증가했죠.
이 정도라면 악명과 혈통 문제를 감수하더라도 끌어들일 가치가 있을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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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1.
어쩔 수 없이 1 황자에게 하샬르를 바쳐 황제로 만들고, 차라리 그 대가로 황실의 지원을 최대한 얻어낸다.
자신의 바램은 억누르고, 제국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선택이었죠.
= 하샬르 반응 보니 불가능해 보여서 폐기.
플랜 2.
하샬르를 후계자로 삼기로 확정하고, 이를 황실에 전해 일단 황실의 손길을 반쯤 차단한다.
동부의 관리자가 될 하샬르는 언젠가 오르한과 싸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 이 계획으로 결정!
원래는 후계자로 삼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확정했다고 보면 되겠네요.
원래 후작의 독백이나 대화로 설명할 부분이었지만...어찌보면 사족인 데다가 너무 길잖아요?
꼭 필요한 내용인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결국 TMI에 집어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