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화
제국의 황궁, 마그누스 카엘룸
일단 두 황자 모두에게, 그날 찾아가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내가 쓴 것은 아니고 나이젤에게 부탁해 대필한 편지였지만.
격식 있는 어투는 어색해서 아직 제대로 작성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혹시 몰라서 마차는 내 쪽에서 직접 준비하겠다는 내용도 적어넣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날 두 대의 마차가 특별관의 정문으로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둘 중 어느 마차를 타고 오겠냐는 듯이 말이지.
7일 아침, 보관소에 주차해 놓았던 후작가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늦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아직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곧 여름이 다가올 텐데도 기온은 그다지 높지 않아 상쾌했고.
마차의 앞쪽에 새로운 말 한 마리가 마구에 매인 채 연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적갈색 털이 돋보이는 건장한 녀석이었다.
나이젤에게 말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내 말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루드비히 후작이 특별히 선물해준 말이라던가.
음. 그러면 앞으로는 저 말을 타고 다니면 되려나?
커다란 덩치나 잘빠진 근육을 보면 꽤 우수한 품종이 아닐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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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목덜미를 연신 매만진다.
평소와는 달리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숨쉬기가 조금 답답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자를 찾아가는 것이니만큼, 평소처럼 간편한 옷을 걸치는 것은 다소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다.
그렇기에 난생처음으로 아카데미의 제복을 차려입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기사학부의 제복이 남녀 모두 바지라서 다행이지.
측면에 금빛 세로줄이 그어진 검은색 바지.
흰 셔츠에 여섯 개의 단추가 두 줄로 달린 검은색 반코트까지.
언제 봐도 교복과 군복의 중간쯤에 위치한 듯한 옷이었다.
목을 감싸는 타이가 아주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풀어버릴 수도 없어서 그저 살짝 느슨하게 고치기만 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허리춤에 찬 흑철 장검이 덜그럭거렸다.
뒤랑달은 가져오지 않았다.
국보급 물건이니만큼, 혹여 쓸데없는 논란이 생길지도 몰라 내 방에 잘 모셔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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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누스 카엘룸.
칼 로스 제국의 황궁은 제국과 그 역사를 함께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대관식을 치르고 제위에 올랐던 당시에는, 이곳 역시 그저 회칠한 벽돌 성에 불과했다.
황궁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투박한 모습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창기의 제국은 기사들의 힘으로 마침내 결집한 연합체였을 뿐, 아직 제대로 기틀이 잡힌 나라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황궁은 제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로 재탄생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국의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궁 중앙에는 부지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넓은 본궁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십자 형상으로 건축된 이 층 건물의 외벽마다 화려한 조각과 장식들이 돋보인다.
본궁의 양쪽 후방에는 황자와 황녀들을 위한 별궁 두 채가 증축되었다.
대부분의 황족들이 황궁을 떠난 탓에, 실제로 거주하는 자들은 드물었지만.
좌측 전방에는 경계병들을 위한 숙소가 들어섰다.
최정예인 로열 가드는 본궁 또는 별궁에서 생활하며 황족들을 경호하지만, 평범한 병사들과 기사들은 이 숙소에서 숙식하며 교대로 경계근무를 시행한다.
맞은편인 우측 부지에는, 연회를 위한 야외 정원이 조성되어 사시사철 푸르른 녹음을 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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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이젤이 황궁에 도착한 것은 9시쯤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야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마차의 창문 너머로 황궁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사방을 감싸는 벽돌 외벽 바깥을 기사와 병사들이 조를 이루어 순찰한다.
외벽의 모서리마다 작은 망루 형태의 감시탑이 새로 증축되어 있었다.
저번 습격에서 교훈을 얻은 것인지 경계를 한층 강화한 모습이었다.
황궁 정문으로 다가가자, 경계를 서던 기사가 우리를 가로막더니 마차에 그려진 후작가의 문양을 확인하고 곧이어 나이젤에게 다가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신원 및 방문 목적을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현 황궁은 2급 경계 태세를 명 받았기에 란덴부르크의 객이시라도 확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나이젤이 황자들의 초대장을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카하르의 왕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님과 그 호위 기사 나이젤입니다. 황자 전하분들의 초청을 받아 찾아왔습니다."
"아이샨기오르, 거기에 란덴부르크의 검...! 실례했습니다, 나이젤 경. 곧바로 입궁하셔도 됩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각 별궁에 계실 겁니다."
기사가 황급히 경례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입 모양을 보아하니, 수인 포식자니 뭐니 하는 것 같은데.
그거 진짜로 내 공식 별명이 되어버린 건가. 그야 뭐 창녀 운운보다야 낫긴 하지만...
정문을 지나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본궁이 눈에 들어온다.
푸르게 칠한 지붕 아래로, 햇빛을 받은 대리석이 눈부시게 빛났다.
대리석 궁은 겨울에 더럽게 춥다고 들었는데, 마법으로 해결하기라도 하려나.
나이젤이 마차 보관소를 향해 말을 몰았다.
천장만을 가린 야외 구조물 안쪽에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몇 대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황궁에 방문객이 별로 없는 듯했다.
시종이나 경비들을 제외하면 돌아다니는 사람의 모습도 드물었다.
일정이 없는 날인가?
하긴, 그러니까 나를 초대했겠지. 평소에는 정책 논의 등의 업무로 아마 꽤 바쁠 테니까.
"도착했습니다, 하샬르 님."
"그러네."
마차를 멈춘 나이젤이 말고삐를 풀어 보관소의 난간에 묶었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별궁까지는 걸어가야 하는 모양이다.
검 자루를 다시 정돈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뒤 마차에서 내려섰다.
경비병들이나 몇몇 시종들이 내 쪽을 슬쩍 바라보는 모습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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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가 기거하는 별궁은 좌측 건물이었다.
나이젤의 설명에 따르면, 이쪽 별궁이 전 황비 안나의 자식들이 기거하는 곳이고, 맞은편의 별궁이 이자벨라의 자식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화려함은 본궁에 미치지 못하지만 담백한 느낌이 상당히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궁 한켠에 자리한 작은 호수와 호수를 감싸듯 정돈된 정원이 눈에 띄었다.
별궁 입구의 시종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의 이름을 읽고, 퍼뜩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초대장으로 눈을 돌리더라.
이내 그것이 실례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여오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별궁의 응접실로 향했다.
화려한 방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준비한 듯한 다기가 놓여 있었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들은 귀퉁이에 섬세한 세공이 박혀 있었다.
굳이 샹들리에 형식으로 만들어진 마력등이 방 안을 밝게 비추었다.
레오폴트는 현재 집무실에 있다고 한다.
접견 허가를 받을 때까지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면 된다기에, 응접실의 소파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얼마 안 가, 다른 시종이 접견 허가가 내려왔다고 알려주었다.
응접실을 놔두고, 굳이 집무실에서 만나자는 건가. 딱히 따라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서도.
찻잔을 내려놓고 집무실로 향했다.
접견 허가를 받은 것은 나뿐이기에, 나이젤은 응접실에 놓아두고.
장검 역시 그녀에게 잠시 건네주었다. 황족을 만나러 가는 손님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면 안 되는 모양이라.
집무실 앞 복도에, 전신 갑주를 입은 기사 한 명이 문을 지키며 서 있었다.
방패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서코트. 황실 친위기사, 로열 가드의 일원이었다.
로열 가드에는 여덟 명의 달인이 있다고 했던가.
그중 넷이 황제를 호위하고, 둘은 황비를 지킨다.
나머지 둘은 황제의 자식들을 호위할 텐데...이 남자는 아무리 봐도 달인급은 아니었다.
황궁에 남아 있는 자식이 세 명이니, 달인 둘을 전부 이자벨라의 자식들에게 보낸 건가.
레오폴트 황자를 호위하는 대신 레오노르 황녀에게.
루드비히 후작의 말로는 페르디난트 2세가 총기를 잃었다더니 아무래도 사실인가 보네.
아니지.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차별하는 쪽이 오히려 분쟁은 적었으려나.
두 황자를 동등하게 대우했다가는, 균등한 세력을 가지게 될 황자간의 갈등이 극대화될 테니까.
제국 귀족들이 완전히 두 패로 갈라져 서로 온갖 암투를 벌여대겠지.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한 쪽을 차별해가며 세력을 몰아주는 방식이, 보다 안정적인 권력 승계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분노한 레오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라도 하면 일이 꼬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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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안내해준 시종이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것처럼 내게 목례하며 돌아갔다.
친위기사가 몸을 돌리더니 집무실의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황자 전하. 아이샨기오르 왕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라하게."
흘러내리는 듯이 유려한 목소리였다.
기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듯 옆으로 몸을 비켰다.
집무실 안쪽에 사람 한 명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자는 여러 장의 종이 뭉치들을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정체 모를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등 뒤쪽의 커다란 창문이 마치 후광처럼 빛나며 밝은 햇빛을 드리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오폴트 전하. 하샬르 아이샨기오르입니다."
1 황자라면 일단 신분 자체는 제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사람쯤일 테니까, 존댓말을 하는 게 맞는 거겠지?
루드비히 후작에게도 안 했던 존댓말을 하려니 영 어색하기는 하지만.
"레오폴트 비텔스바흐요. 마그누스 카엘룸에 입궁한 것을 환영하오, 아이샨기오르 왕녀."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폴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그 앞모습엔 짙은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건장한 키에 마른 듯한 몸매.
보석과 금으로 장식한 예복 차림에 허리춤에는 화려한 검을 차고 있었다.
무관보다는 문관 쪽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가볍게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황실 예법에 어긋나는 인사일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해도 곤란하다.
레오폴트 역시 별말 없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감탄하듯 눈을 빛내면서.
뭔데.
감탄하지 마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님 안녕하세요! 주말이 이제 24%쯤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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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황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오나라식 이궁의 변인가, 아니면 이방원식 왕자의 난인가...!
그것도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