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화
1 황자 레오폴트
"그리고 헥터 경. 괜찮다면 자네는 잠시 자리를 피해주게나. 아이샨기오르 왕녀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말일세."
저 로열 가드의 이름이 헥터였구나.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닫은 기사가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울려 퍼졌다.
역시 나와 독대를 하자는 건가.
나이젤을 떼어놓고 오게 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아직 피로할 것임에도, 이렇게 내 초대에 응해준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아닙니다.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염치없이 황자 전하의 초청을 거절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생각해주는 척할 필요는 없단다. 너나 에른스트나, 내가 아픈 걸 뻔히 알면서도 불렀으면서.
현시점의 내가 황가의 초청장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알았을 테고.
어차피 나로서도 입장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편이 편했을 테니, 딱히 큰 불만도 없으니 말이야.
"으음...그리 부담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었소만. 자, 이쪽에 편히 앉으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레오폴트가 집무실 앞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응접실에 있던 것과 비슷한 가구였다.
내가 소파에 걸터앉자 레오폴트 역시 맞은편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제야 그 외모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레몬을 연상시키는 밝은 금발. 청려한 눈동자.
깔끔하게 면도한 듯 잔털 하나 없는 날카로운 턱선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유순해 보이는 눈매는 묘한 기품이 서려 있어, 눈빛만으로도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레오폴트가 올해로 스물여덟이던가.
실제로 보면 이런 얼굴이었구나. 나이보다 한 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동안인걸.
자리에 앉은 레오폴트가 나를 쳐다보더니 가볍게 미소 지었다.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매에 짙은 흥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확실히, 저잣거리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모양이오. 오히려 아카데미 쪽이 정확하군."
"...무슨 말씀이신지?"
소문?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 별명이 황궁까지 흘러 들어가진 않았겠지.
그렇지만 아카데미의 소문이라고 하면 그것밖에 없긴 한데...
단어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할 거야, 레오폴트.
"수선화 왕녀라...아무래도, 만개할 시기가 찾아온 것 같소만."
좋아, 에른스트에게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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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진심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의 눈앞에서 대놓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건 적대행위나 다름없으니까.
"차라리 수인 포식자라 불러주시죠. 외형에 대한 찬사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흠...? 아아, 그렇군! 역시, 진정한 기사라면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는 법. 아이샨기오르 왕녀 역시 그러하시겠지."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고 그냥 거부감이 들어서 그런 건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저렇게 잘도 해석해주니, 나는 그냥 동의하면 되겠지.
"내가 큰 실례를 범했소.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그...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황자 전하께서 일개 왕녀를 상대로 고개를 숙이시다니, 황송함에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렇게 애쓸 필요 없이 편히 말해도 된다오.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왕녀의 진정한 신분에 대해서는 변경백에게 들어 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말이오."
편하게 말하라고?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혹시 모르니 일단 한번은 거절해 보자.
"과한 말씀이십니다."
"진심이오. 원한다면 경어조차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오. 어차피 사적인 자리 아니오."
그래?
분명히 네가 그렇게 말한 거다?
나는 배려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거든.
"그렇다면야, 나야 편하지. 입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는데."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끌어모아서 예의를 차리고 있었으니까.
급변한 내 말투에 황자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제 와서 '이 무례한 여자를 당장 끌어내라!'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크흠, 그...전사다운 호방함이 잘 드러나는 위풍당당한 기개, 참으로 인상적이구려. 일단은, 이것으로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봐도 되겠소?"
"글쎄, 아마도 그렇지 않겠어?"
막상 반말을 들어보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신데.
어차피 네 말대로 신분 자체는 비슷하잖아.
끈 떨어진 황자나, 열두 기사의 후손에 선제후의 후계자까지 합쳐진 여자나.
"...왕녀는 여러모로 나를 놀라게 하는 것 같소."
"그게 내 장점이지."
황자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그저 웃었다.
"그래서, 오늘 나를 초대한 이유를 들어볼까 하는데. 설마 진짜로 전투 이야기나 들어볼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도 나중에 들어보고 싶기는 하다오...다만 확실히, 금일 왕녀에게 독대를 청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오. 이번 수여식과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초대장을 보냈지."
"그 이후?"
이제야 본론인가.
"우선 왕녀에겐 제국의 기사 직위와 일급 명예훈장, 달인의 칭호가 내려질 것이오. 거기에, 메디안 남작위 역시 하사되겠지."
이 세계의 제국에서, 기사는 작위가 아닌 직위에 속했다.
충분한 실력을 갖추어 제국과 인류에게 헌신할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
"메디안 남작위라. 듣기로는 완전히 몰락했다고 하던데."
"그렇다오. 재산도 영지도 무엇 하나 남지 않았지. 그렇기에 아마 당분간 기존의 메디안령을 봉토로 수여받지는 못할 것이오."
"영지 하나 없는 귀족 작위인가...큰 의미는 없어 보이는데?"
메디안 가문이 열두 기사라는 사실이야 황실을 포함한 몇몇 사람만이 아는 정보니까.
결과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작위 하나인데, 포상치고는 좀 미묘한걸.
"틀린 말은 아니오. 그저 왕녀의 혈통 절반이, 제국의 피임을 증명하는 계기 이상은 될 수 없겠지. 아직까지는 말이오."
"흐음..."
"본래라면 왕녀가 열두 기사의 후예임을 공표하며 정략혼을 제안하려 했소. 그리만 되면 왕녀 역시 언젠가 제국의 황후가 되는 셈이니, 서로에게 충분한 이득이 되리라 생각했었지."
그 말은 지금은 그 생각이 변했다 이거네. 참 다행이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말이지.
그건 그렇고.
"황후? 마치 당연히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 같은데. 내가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걸?"
"원래라면 어려웠겠지. 허나 이번 일로 내 입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오."
레오폴트가 한숨을 내쉬며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본래 1 황자와 3 황자의 세력 차이는 2:8 정도에 달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이라면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격차.
허나, 이번 수인 습격으로 그 구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자벨라 측이 황궁 수비를 강하게 주장했던 반면, 레오폴트는 제도 전체에 기사를 파견해 폭동을 멈추는 것이 우선이라고 항변했다.
레오폴트의 영향력이 워낙 미미했던 만큼, 이자벨라의 요청에 밀려 무시당했지만.
결과적으로 황궁 강습이 양동작전에 불과했다는 결말 덕분에, 레오폴트의 말이 옳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거기에 폭동에 휘말려 피해를 입은 자들 역시 자신들을 구하려 했던 레오폴트를 지지하게 되었고.
지금은 세력 차가 많이 줄어들어 4:6 정도라고 한다.
나를 영웅으로 만들고 자기편으로 확실히 끌어들이면 판세를 뒤집을 수 있을법한 상태라던가.
"제도를 덮친 크나큰 비극이 오히려 나를 구했다는 사실은 참 얄궃은 일이나...결국은 그리되었소."
"미리 말해두는데, 결혼 같은 건 안 할 거야. 그 누구와도."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언짢은 기분과 확고한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듯이.
조금 무례한 행동이지만 말투조차 이미 예의를 집어치운 지 오래이니 상관없겠지.
"나도 안다오. 루드비히 후작에게 듣기로는 성혼을 극력 거부한다 들었소. 그러니 그 제안은 그만두기로 했지. 제국의 선제후를 계승받기로 한 이상, 열두 기사에 대한 이야기 역시 공표하지 않을 것이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가의 일원이 되지 않는 이상, 열두 기사의 위명은 황실의 권위에 위협만 될 뿐이니까.
설령 그자가 황실에 충성과 지지를 표명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일지, 아니면 가식일 뿐 다른 속셈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다만, 왕녀가 큰 반발 없이 선제후의 후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언덕이 많을 것이오. 이번 일도 큰 공훈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왕녀의 민족 문제와...그, 데인에서 보인 위명이 있으니 말이오."
"...그거야 그렇겠지."
"그러니 이제부터가 본론이라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 부분을 도와줄 테니, 날 지지해줄 수 있겠소? 그래준다면 나중에 그대가 선제후의 후계자로 공표될 때, 이쪽 역시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해주겠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세력 전체가."
나쁜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어차피 싸워나가다 보면 명성이야 계속 쌓일 테니 딱히 엄청 큰 메리트는 아니네.
"지지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데?"
"아예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하는 것이 가장 좋긴 하겠소만..."
"그건 어려울걸. 일단은 타국의 왕녀인 입장인데, 제국의 계승권 문제에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그건 어찌 보면 내정간섭이잖아?
왕녀 신분으로 그런 공식적인 발언을 해 버리면 그것 자체가 외교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져버릴 테니까.
자칫하면 카`하르가 제국의 권력에 간섭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실상 카`하르들은 외교 따위를 신경쓰는 놈들이 아니지만 말이야.
어찌 됐든 날 선 비판이 쏟아질 테고, 그 소식이 카`하르까지 전해지면 오르한도 이에 반응하겠지.
3년 후에 돌아온다던 딸이 제국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듣게 된다면, 어쩌면 돌아올 생각 따윈 없다는 진의까지도 알아챌지 모르니.
"어차피 망명해온 것 아니오? 알려지고 나면 왕녀 신분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있소만."
"지금 밝힐 내용은 아니니까. 내가 카`하르와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오르한 귀에 들어가면, 그 남자가 당장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거든."
내가 카`하르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동부 원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겠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오르한은 단 한 번 만났던 것이 전부라 반응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노해 제국을 공격하든 제국의 공격을 대비해 방어태세를 굳히든, 그 어느 쪽이라도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이니까.
"오르한이라...루드비히 후작이 그를 주의하라 말하기는 했지. 흐음...그렇다면 선후를 바꾸어서, 선제후의 후계가 된 뒤는 어떻소. 어차피 제위 선출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터이니, 그 사이에 왕녀가 선제후의 후계자가 된다면 모국과의 연은 자동으로 끊어지는 것 아니오. 그 뒤에는 상관없지 않소?"
선제후의 후계라. 내 예상으로는 넉넉잡아 2년은 걸릴 것 같은데.
제국도 안정화해야 하고, 내 명성도 늘려야 하고. 갈 길이 머니까.
그 정도라면 괜찮겠네.
"틀린 말은 아니네. 그때는...아마 상관없겠지. 그러면 그쪽께서 내가 선제후의 후계자가 되는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후계자가 된 나 역시 그쪽을 지지해달라, 뭐 이런 얘기가 되겠네."
완전 야합 그 자체네.
뭐 이 정도가 적당하려나. 어차피 레오폴트를 지지하긴 할 생각이었으니.
내가 살짝 밑지는 거래이긴 한데, 황자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 정도라면 해줄 수는 있는데, 대신 조건 하나를 덧붙여도 될까?"
"얼마든지 말해보시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화답하겠소."
"나중에, 나한테 감히 기분 나쁜 수작을 걸어오는 귀족 놈이 나오면...도발해서 결투라도 걸어 볼 생각이거든. 그런데 그게 그쪽 휘하의 귀족 세력이면 곤란하잖아? 그러니 아랫것들에게 미리 이야기 좀 해 뒀으면 해서. 나한테 수작질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러면 최소한 그런 놈들이 절반쯤 줄어들겠지."
"그 정도야 간단하다오. 얼마든지 그리하겠소."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는지, 레오폴트 황자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경우 귀족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왕녀가 우리 측이라는 증거가 필요할 테니...공식 석상에서 몇 번쯤은 나와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데, 괜찮겠소? 노골적인 지지나 남녀 간의 사교 관계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호적인 태도 정도는 드러내야겠지."
"드레스 따위라도 입고 춤추자는 소리만 아니라면야."
"춤도 출 줄 아시오?"
이 자식이 갑자기 뭐라는 거야.
...출 줄 모르긴 하지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주말이...주말이 사라져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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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해도 된다고 하면 거리낌없이 말을 놓아 버리는 하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