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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78화 (78/100)

제 78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아, 기사가 아니라 전사라고 불러야 하려나?"

"기사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어차피 얼마 후면 기사직위를 내려줄 모양이던데. 그러면 기사가 맞지 뭐."

"시원시원해서 좋네. 기대 이상이야."

그녀의 눈에 서린 호의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인걸. 취향을 보면 프리데와도 잘 맞을 것 같은데, 어떠려나.

"그건 그렇고, 달인의 경지라는 이야기가 돌던데. 그건 사실이야? 만일 그렇다면 한 수 배워보고 싶은데."

레오노르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호승심은 아니었다. 어차피 못 이길 것은 본인도 잘 알 테니까.

그저, 자신보다 강한 자와 대련하여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만이 가득했다.

아, 큰일이다.

나 역시 그녀가 마음에 들 것 같아.

나중에 적대하고 싶지 않아질 정도로.

솔직히 나도 이런 호방한 성격 쪽을 좋아하는지라.

불건전한 의미는 아니고,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이지만.

"지금은 무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직 요양 중인 몸이라 곤란하거든."

괜히 격한 운동을 벌였다가 회복이 늦어지면 곤란하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수인과 싸우느라 크게 다쳤다고 했었지. 묘하게 맥없어 보이는 얼굴은 그것 때문이었나 보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꼭 한 번 부탁해?"

"그러지. 다 낫고 나면."

"마음 같아선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는 한데...오라버니의 손님을 오래 붙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여기까지네. 또 보자."

"그래. 다음에."

레오노르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에른스트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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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의 집무실은 의외로 담백했다.

원목으로 만든 책장과 테이블, 가죽을 씌운 목재 의자와 책상만이 놓인 단출한 공간.

그나마 벽 한쪽에 전시된 장검과 할버드, 흑철 갑옷만이 장식이라면 장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창문에는 커튼을 씌워 놓았기에 방 안을 밝혀주는 것은 천장의 마력등뿐이었다.

담백한 궁에 화려한 집무실을 만든 레오폴트.

화려한 궁에 담백한 집무실을 만든 에른스트.

대조적인 성향이 두드러져 퍽 흥미로웠다.

그리고, 대비가 되는 것은 집무실의 풍경만이 아니었다.

"에른스트 비텔스바흐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군."

담담한 첫마디였다.

에른스트는 황자라기보단 전쟁 중인 무관을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짧게 자른 탁한 금발에, 장식 하나 없는 남보랏빛 제복. 허리춤에는 투박한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표정은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저녁노을에 비친 절벽과도 같이 강인하면서도 우울해 보였다.

거기에 수염까지 기른 탓인지, 스물셋이 아니라 서른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얘는 1 황자랑 나이를 거꾸로 먹었네. 세월이 오면 좀 피하던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야, 늦은 것은 사과하지. 레오노르 황녀와 이야기를 좀 나누느라."

"거기에 오만무례하기까지. 여긴 카하르의 왕궁이 아니다만."

은근히 깐깐한 양반이었다.

너도 첫마디부터 나한테 한 소리 했잖아.

황제도 아니고 황태자도 아니고, 아직은 너 역시 일개 황자에 불과하면서 말이지.

"아, 정말 죄송합니다. 레오폴트 황자님과 레오노르 황녀님이 정말 자비로우시게도, 미천한 제가 감히 말을 놓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주제넘게도 제가 그만 큰 실수를 했나 보네요. 제국의 '3' 황자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알겠으니 그런 비아냥은 집어치우게."

"3 황자 전하의 하해와 같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역시 제국의 존칭어들은 영, 입에 붙질 않아서."

에른스트가 고개를 내저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 역시 맞은편 의자에 앉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그럼 일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서로 호위 기사들은 내보내도록 하지. 상관없겠지?"

"그야 뭐, 원하시는 대로."

어깨를 으쓱인 뒤, 나이젤 쪽을 바라보았다.

"나이젤, 에른스트 황자 말대로 응접실에서 기다려줬으면 하는데."

"네. 그리하겠습니다."

황자 옆에 서 있던 로열 가드와 나이젤이 우리에게 정중히 목례한 뒤 나란히 자리를 피했다.

저 녀석은 전해지는 기세가 꽤 위협적인 걸 보아하니...아마도 달인급인 것 같은데.

"형님께 먼저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네."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역시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는 건가.

"그야 당연한 것 아니야? 연장자부터 찾아가 보는 것이 예의잖아."

"당연할지 모르지만 현명하다고는 하기 어렵겠군. 뭐 좋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핵심적인 용건만 빠르게 이야기하자는 건가.

역시 황자가 아닌 군인을 했으면 잘 어울렸겠는데.

"란덴부르크 변경백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라던데, 차라리 제국의 황비가 되지 않겠나?"

"거절이야.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잖아?"

이 자식도 결혼 운운이네.

"겉모양만큼은 어울릴지도 모르지. 내면은 전혀 아니지만...내면이 썩어 문드러졌어도 황후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쯤은 이미 증명된 지 오래이니까."

어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야?

황후다운 외면에 썩어 문드러진 내면이면 네 어미 이야기잖아.

"문드러진 내면이라니, 말이 좀 심하신데."

"왕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네.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 그래서, 거절하는 이유는 뭐지? 형님 쪽이 더 마음에 드나?"

"그건 아니고, 나는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 애초에 별 메리트도 없잖아? 선제후나, 황후나 그게 그거지. 오히려 선제후 쪽이 나을 수도 있고."

황실의 힘이 선제후들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하다면 모르겠지만...그런 것도 아니니까.

지위야 높지만 정작 실권은 그다지 없는 황후 직위보다야, 차라리 변경령에서 왕처럼 지내는 쪽이 낫기도 하고.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면 그건 그만두고 두 번째 제안을 하지."

에른스트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예리한 눈빛 때문인지 마치 적의를 담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편이 되게. 최연소 달인, 수인 포식자여."

가라앉은 목소리. 날카로운 눈.

담담한 말투에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설득을 하는 건지 명령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지위는 루드비히가 주었고, 힘과 명예는 스스로 거머쥘 테지. 무엇을 원하나. 막대한 재산? 황실의 호의? 가능한 한 맞추어주지."

"글쎄? 딱히 원하는 건 없는데. 그것보다 그 말의 의미는 알고 있어? 대놓고 자기 형을 제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말을 돌리려 하는군. 애초에 어머니도 다른 형제에, 레오폴트 역시 나를 원수 취급하는데 별수 있겠나? 맥없이 제거당할 마음은 없으니, 결국 내가 제위에 오를 수밖에.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레오폴트가 그렇게 독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하긴 모를 일이지. 레오폴트는 원래 황태자가 되지 못하는 인물이니까.

에른스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레오폴트 말로는 지금은 큰 차이가 없다던데."

"잠시 동안의 반등이지.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나? 그쪽은 결국 가라앉을 배나 다름없네. 그러니 현명하게 생각하게나."

"글쎄, 그건 두고 볼 일이 아닐까?"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지. 나조차도.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군."

"그것까지는 아니고. 둘 다 내게 매력적인 제안을 건네지 못했으니까, 말하자면 중립이랄까."

사실 마음을 정한 게 맞지만 말이야.

그래도 여지 정도는 남아 있다는 인상을 줘야 쓸데없는 수작을 부려오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몸을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두어야겠지.

"하, 중립이라. 그래, 우선은 그런 걸로 해 두지."

역시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네.

일단은 넘어가 주겠다는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명심하게. 제국의 귀족으로 자리매김한 이상, 황좌를 노리는 싸움에 중립은 없네. 결국 우리 모두에게,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오겠지. 그때,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라지."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인가?"

고개를 끄덕인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원래라면 어머니께서도 왕녀를 만나보려 하셨지만...추천할 일은 아니로군. 두 사람이 만나면 마찰만 벌어질 테니까. 내가 무마해줄 테니 그냥 돌아가게. 이것이 내 마지막 호의이니."

그 말만은 다행이었다.

이자벨라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건 고맙네. 그럼 이만, 나는 돌아가 보겠어."

"배웅하진 않겠네."

나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레오노르를 잘 부탁하지. 철없는 녀석이니."

집무실을 나가는 나를 향해, 에른스트가 나직한 한마디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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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별일 없었다.

에비앙이라는 놈이 특별관으로 되돌아온 일을 제외하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금발 태닝 양아치였다.

단추를 전부 풀어 헤친 반팔 셔츠에 금으로 만든 사슬 목걸이. 허리 아래로 짧은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귀에는 몇 개인가의 귀고리를 끼우고 있었다.

불량해 보이는 인상에 경박한 말투까지. 파남의 왕자라는 신분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남자였다.

듣자 하니 평소에 지내던 사창가가 불타버려서 돌아왔다던가.

프리데가 경멸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해주었다.

"오입질이나 하다가 그대로 타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을 것 같은데."

이젠 여기서까지 추근대는 놈이 생길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의외로 우리에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

건드렸다가 뒤탈이 생길 것 같은 여자들에겐 아예 접근하지 않는다던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밀리아와는 절대 마주치지 못하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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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이 순조롭게 회복되어, 맥없이 풀려 있던 눈매도 슬슬 원래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수선화 따위의 별명은 사라지겠거니 싶었는데...그러지는 않더라.

프리데의 말로는 나른하고 지친 인상에서, 건강하고 당차 보이는 외모로 바뀐 정도라던가.

거울로 볼 때는 예전과 별 차이 없는 모습으로 보였었는데...기세의 차이라는 것이 인상에 그 정도로 영향을 끼치는 건가.

스스로는 느끼기 힘든 부분이라 모르겠네.

아, 그리고 주문했던 흑철 갑옷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아샤의 방으로 가 새 갑옷을 구경했다.

외형은 기존 갑옷과 별 차이 없었지만, 재질 때문인지 다소 묵직해진 느낌이었다.

움직임에 영향이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털가죽 위에 줄지어 엮인 미늘 하나하나가 묵빛 광택을 흘렸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털가죽 역시 무척이나 질기고 튼튼해 보였다.

가죽만으로도 어지간한 검격은 막아낼 수 있을 것처럼.

"이거 괜찮은데. 무슨 동물 가죽이야?"

"보리스요."

"......뭐?"

그런 동물이 있었나?

그래,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니까 내가 모르는 이름의 동물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

"보리스요, 보리스. 제가 얻을 수 있었던 가죽 중에 가장 좋은 물건이었거든요."

아샤가 태연스럽게 웃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구나.

이거 괜찮은 건가? 그, 윤리적인 문제라던가 말이야.

수인이 쓰레기들이긴 해도 일단 아인종이긴 하잖아?

그걸로 옷을 지어 입는 것이, 정말 일반적인 발상이 맞는 건가?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헛웃음만을 흘렸다.

결국 반박을 포기하고 갑옷을 건네받았다.

이제 와서 새로 만들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찝찝함만 빼면 방어 성능 자체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갑옷이었으니까.

그래...성능만 좋으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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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수여식 날이 찾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드디어 말 많은 놈들과의 회담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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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이제 영원히 함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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