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86화 (86/100)

제 86화

데미안은 굴려야 한다

검은 땅.

지평선 너머까지 모조리 칠흑으로 물든 황야에, 짙은 안개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벌레들은 마기에 질식해 목숨을 잃었고, 식물이라는 식물은 모조리 말라비틀어져 부스러지고 있었으니.

잡초 한 포기조차 남김없이.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대검을 쥔 금발의 소년 하나뿐이었다.

...오염 지대인가. 꽤나 가혹한 배경인걸.

마물의 전조이자 흔적, 마기는 세상을 침식한다.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불모지가 될 때까지.

그렇기에 마물의 토벌에는 항상 정화의 기적을 펼칠 사제가 동반되는 것이 관례였다.

벌레나 식물 따위와 달리 사람이라면 오염지대 속에서도 한동안은 버틸 수는 있겠지만...길게 머무르면 결국 마기에 침식당해 목숨을 잃는다.

따라서 대 마물전을 위해서는 항상 충분한 사제를 대동하거나 단기 결전으로 끝낼 실력을 보유해야 했다.

데미안의 안색 역시 평소에 비해 약간 질려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호흡할 때마다 매캐한 마기가 폐에 스며드는 느낌일 테니까.

그리고, 안개가 한 곳으로 몰려든다.

땅 밑으로 통하는 배수구를 열어젖힌 것처럼, 검은 나선이 소용돌이치며 하강한다.

마침내 지면과 충돌한 마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검은 폭풍이 몰아쳤다.

데미안이 왼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윽고.

- 그어어어어...!

그것이 몸을 일으킨다.

크기는 2m 정도일까. 사람을 닮은 형상이나 사람이 아닌 것이었다.

유골의 몸에, 썩은 내장을 힘줄로, 들러붙은 마기를 근육으로 삼아 움직이는 괴물.

두 다리는 말의 다리뼈인지 기묘하게 구부러져 있다.

골반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사람의 두개골이 놓여 있다.

두개골에 연결된 척추와 늑골이 그 뒤에 꼬리처럼 이어졌다.

앞으로 구부러진 등뼈는 마디마다 작은 뿔이 돋아 있고, 갈비뼈 대신 손가락이 달린 사람의 팔뼈 여섯 쌍이 연신 꿈틀댔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반쯤 썩은 말의 해골이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달그락거린다.

두 어깨 쪽에는 팔 대신 촉수처럼 얽힌 내장이 늘어졌다.

내장의 촉수 끝에는 녹슨 검이 얽혀 있었고.

사령종인가, 더럽게 징그럽네.

화면을 보던 밀리아가 침을 삼켰다.

"다들 주목하도록. 저것이 바로 마물이다. 사령종, '뒤섞인 유해'. 옛 전쟁터에서 주로 출몰하는 소형 마물이지."

칼라인이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소형종이니만큼 기사 대여섯을 투입하면 토벌할 수 있는 놈이지만...사령종의 특성상, 사제의 조력이나 적절한 대응 수단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데미안에겐 그런 수단이 없고 말이야.

...못 이길 것 같은데. 하필 사령종이라니. 차라리 혼종 계통이었으면 할만했을 텐데.

아니면, 의도적으로 저걸 고른 건가? 마물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뭐가 됐든, 그래. 보는 맛은 있겠네.

나는 마침내 완성된 마물의 형상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아아아아아아아!"

유해가 포효한다.

갈비뼈를 이루는 사람의 손들이 기도하듯 하늘을 향했다.

대검을 움켜쥔 소년이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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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곡이라는 기법은 알 것이다.

같은 선율을 조금씩 변형하며 끝없이 이어 반복하는 악곡.

그것이 연주되고 있었다.

뼛조각과 내장, 유혈과 괴성을 음표로 삼아서.

- 콰앙!

데미안이 채찍처럼 내려치는 검을 피해냈다.

바닥을 후려친 녹슨 검이 탄력적으로 튕기며 그를 뒤쫓았다.

"큭...!"

검면으로 막아내며 파고든 데미안이 다시 대검을 휘두른다.

내장의 팔이 단숨에 잘려 나가며 검은 액체를 흩뿌렸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다.

절단부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잘려 나간 팔을 되돌린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으으으..."

녹슨 채찍이 다시 휘둘러진다.

채찍의 끝은 사람이 휘둘러도 음속을 넘는다고 하던가.

서너 차례 막아내던 데미안이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벌떡 일어난 데미안이 다시 돌진한다.

올바른 선택이다. 일단은 항상 지근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저 마물의 공격방식이 채찍을 휘두르듯 팔을 내젓는 것이라면, 그 안쪽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머리를 노리는 촉수를 상체를 숙여 흘려보내고, 그대로 바닥을 짚어 제비 돌듯 파고든다.

대검 끝에 걸린 촉수가 토막 나며 잠시나마 틈이 생겨났다.

"하아아아앗!"

데미안이 대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마물의 머리, 반쯤 썩은 말의 두개골을 노리고.

그리고 가로막힌다.

- 콰드드득!

자갈밭에 삽을 찔러넣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겹쳐 울리는 분쇄음과 함께 대검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갈비뼈처럼 늘어서 있던 열두 개의 팔이 데미안의 검을 붙든 것이다.

열 개의 팔이 과자처럼 부서져 나갔으나, 끝끝내 마지막 두 팔에 이르러 검격이 먼저 힘을 다했다.

그리고 재생한다.

열두 개의 팔이 검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떨어...져!"

데미안이 손잡이를 놓아버리고 체중을 실어 대검을 걷어찼다.

반동에 치솟은 검신이 얽혀든 뼈들을 부수며 구속에서 풀려났다.

다시 대검을 붙잡아 목을 베어낸다. 말 대가리가 허공을 날았다.

아, 저건 오판인데.

트롤이랑은 다르니까.

다음 순간, 목이 잘린 마물이 그대로 데미안을 들이받았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데미안이 나가떨어졌다.

그래. 트롤은 일단 생명체에 속하니, 목을 떼어버리면 스스로 재생하지 못하고 이내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사령종은 애초에 죽어 있는 존재들. 그들에게 목은 딱히 약점이 아니었다.

수복을 막을 수단이 없는 이상, 사령종을 죽일 방법은 재생하지 못할 때까지 박살 내고 또 박살 내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유령 계통이 아니라 다행이지.

그건 아예 공격이 통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야.

전투가 계속 이어진다.

데미안의 대검이 마물의 다리뼈를 부수고, 마물이 휘두른 꼬리가 데미안을 후려친다.

마물은 이내 재생하고 데미안은 다시 일어선다.

그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녹슨 검에 베여, 아니 뜯겨나간 절상.

후려치는 뼈다귀에 맞아 생긴 타박상. 바닥을 구르며 생긴 열상까지.

행색 역시 검은 진액과 마기에 물들어 얼룩덜룩했다.

"데미안..."

밀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저 지경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되긴 하겠지.

다른 학생들 목이 뽑혀 나갈 때는 별 반응 없더만.

"보는 바와 같이, 사령종을 상대로 적합한 수단 없이 전투에 임할 경우...충분한 실력을 갖추고도 낭패에 몰리기 쉽다."

칼라인 교수가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학생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데미안의 분투를 지켜보았다.

잘 지켜보렴. 저게 너희 미래니까.

졸지에 교보재가 된 데미안이 화면 속에서 애처롭게 굴러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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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분.

전투는 무려 팔십 분을 이어갔다.

"그으어어어어..."

마물의 몸이 무너져내린다.

더는 수복할 수 없게 된 뼛조각들이 부스러져 쏟아지고 내장들이 썩어 흘러내린다.

바닥을 구르는 말의 해골이, 두 조각난 채 마지막 신음을 내뱉었다.

눈구멍에 어린 푸른 불꽃이 서서히 스러졌다.

한 시간이 넘는 격전 끝에, 마침내 승리한 쪽은 놀랍게도 데미안이었다.

행색은 승리자의 몰골이 아니었지만.

부러진 대검. 잘려 나간 왼팔. 박살 난 다리뼈.

전신이 마기에 물들어 검게 변해 있었고, 눈 한쪽도 찢겨나가 피눈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상태였다.

"저 정도 상처를 입으면 보통 공포와 통증 때문에 진작 깨어날 텐데...언제 봐도 의지가 아주 대단한 생도로군. 실력도 예상 이상이고."

칼라인 교관 역시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미래의 용사라면 역시 저 정도 근성은 보여줘야지.

나 역시 내심 기분이 좋았다.

벌써부터 사령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다니, 꽤나 고무적인 성과였으니까.

역시 프리데에게 두들겨달라 한 보람이 있네.

나중엔 나이젤에게도 부탁해 볼까.

마물이 소멸함과 동시에, 오염지대가 사라져간다. 귀퉁이부터 서서히.

원래라면 자동으로 없어지는 오염이 아니니, 아마도 다음 배경으로 바뀌려는 거겠지.

아니다 다를까,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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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전투의 배경은 평범한 초원이었다.

얕은 잔디와 잡초들이 쭉 펼쳐진 한낮의 대지.

무릎 꿇은 채 헐떡이던 데미안이 다시 일어났다.

꿈은 꿈이라는 것인지, 부러진 검도 전신의 상처도 어느새 멀쩡하게 회복된 상태였다.

소모된 정신력까지 돌아오지는 않았겠지만.

"그러고 보니 교수님, 다음 상대는 뭔가요? 마물은 이미 처치했을 텐데요. 다른 마물이 또 나오는 건가요?"

학생 한 명이 칼라인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마물은 그것 하나만 준비했다. '뒤섞인 유해'만으로도 이번 강의에 쓰기 충분하리라 여겼으니까. 저건 말하자면 상정 외 사태지."

칼라인 교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사령종이 지쳐 죽을 때까지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1학년에 있을 거라곤 예상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러면, 나올 만한 적은 아마...아, 그래. 그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를 보여주겠군. 악몽의 원래 본질대로."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

뭐가 나올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 나탈리아인가?

만일 내가 참가했었다면 최종 보스라도 튀어나왔으려나...

안 하길 잘했네. 어차피 할 수도 없었지만.

그리고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엇...!"

강의실이 크게 술렁였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칼라인 교수와 밀리아조차.

그리고 나 역시.

나타난 적은 마물도, 몬스터도, 하다못해 수인조차도 아니었으니.

붉은 살기를 전신에 휘감고, 두 눈에서 푸른 귀화를 뿜어내는 인간.

청은빛 장검을 오른손에 움켜쥐고 미늘 갑옷을 걸친 전사.

광풍처럼 뿜어내는 격렬한 기세에, 거칠게 묶은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아 휘날린다.

걸음걸이마다 공기가 일그러진다.

주변의 잡초들이 비틀리며 찢겨나갔다.

그것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악마와도 같이 웃었다.

나였다.

......아니, 내가 왜 거기서 나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야 네가 맨날 두들겨 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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