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화
행복해 보이는 표정
음속을 넘어선 충격파에, 황녀의 몸이 산산조각나―
―는 비극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참 다행스럽게도.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일부러 그녀의 검만을 노렸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하마터면 진짜 황족 시해자가 될 뻔했네.
널브러진 황녀는 멀쩡히 숨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딱히 큰 출혈도 없었고.
"으에으윽..."
일어나지는 못하겠는지 엎어진 채 괴상한 신음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 괜찮은 거 맞지?"
"갸아으아......"
어...괜찮은 게 아닌가?
레오노르에게 다가가 낯빛을 살펴보았다.
반쯤 기절한 상태인지 눈동자가 위로 돌아가 있었다.
힘없이 벌린 입에서 투명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묘하게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긴 한데, 아무튼 정상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나이젤, 이리 좀 와봐!"
"아, 알겠습니다."
멍하니 있던 나이젤이 퍼뜩 놀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내가 보여준 공격에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레오노르 황녀의 상태가 많이 이상한데, 이거 어디 잘못된 거 아니지? 잘못되었다면 대참사인데."
"음...단순한 기절입니다. 충격파에 뇌와 장기가 좀 뒤흔들린 것 같군요. 손만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손?
그제서야 레오노르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목검은 온데간데없이, 새하얀 손가락이 전부 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손바닥 피부는 홀랑 벗겨져 피가 배어 나왔고.
"꼴을 보니 포션이라도 들이부어야겠는데. 일단 내가 들고 가도 되겠지?"
"황녀 전하의 품성이시라면 개의치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등과 허벅지 안쪽을 받치며, 조심스럽게 레오노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팔이 덜렁거린다.
음...여러모로 말랑말랑하네. 힘이 풀려서 그런가.
"펠이라던 남자나 다른 시녀들에게 치료를 부탁하면 되겠지? 설마 기사단 훈련소에 회복제가 없지는 않을 테고."
"아마 그렇겠지요."
이 정도 부상이야...포션이랑 사제들만 있으면 금방 나을 테니까.
황녀를 든 채 지하 단련장의 계단을 올라갔다.
나이젤이 내 무구를 챙겨 들고 뒤따라왔다.
단련실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 서있던 펠과 마주쳤다.
펠은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 레오노르의 모습을 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우리를 별실로 안내했다.
황녀님의 윤허 없이 그분의 방에 객을 들일 수는 없으니, 일단 여기서 기다리면 회복제를 가져오겠다면서.
별실의 침대에 조심스럽게 레오노르를 눕혀놓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유리병 몇 개를 들고 온 펠이 병 안의 액체를 천천히 황녀의 입에 떨어트렸다.
남은 액체는 망가진 손에 들이부었고.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퍽 익숙해 보이는 태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노르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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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대단하더라! 뭐 해보기도 전에 검이 그냥 사라져 버리던데!"
깨어난 레오노르가 상쾌하게 웃었다. 베개를 세워 등을 기댄 채로.
일어나자마자 들이킨 회복제들 덕분에 지금은 꽤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 보이네? 일어나지 못하길래 조금 당황했었는데."
"뭐, 다 나으려면 내일까지는 쉬어야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멀쩡한 거지! 덕분에 재미있었어."
레오노르의 눈에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즐거웠나. 실질적으론 거의 얻어맞기만 했으면서.
"그렇다니 다행이네. 나도 꽤 즐거웠어. 검을 휘두르는 건 오랜만이라."
나 역시 그동안 좀이 쑤시긴 했었다.
기력 회복에 신경 쓰느라 뭘 해볼 수가 없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나중에 한 번 더 부탁하고 싶은데...아무래도 그건 무리겠지? 유감스럽지만 말이야."
"...그러게."
계승권 분쟁이 끝나고 나면 승패에 따라 둘 중 하나는 사형대로 갈 테니까.
...그보다 못한 꼴이 될 수도 있고.
그녀만 어떻게 처형을 피하게 만들 방법이 없으려나.
레오폴트에게 이야기해볼까.
한동안 레오노르와 대련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허점이나 대응법, 업에 대한 것 따위를.
"그래서, 업의 사용법을 깨달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는 영 감이 안 오던데."
"음, 글쎄...극한 상황의 전투를 자주 경험한다던가?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나보다는 제국의 기사들이 더 잘 알겠지."
"다들 애매한 소리만 하던데. 스스로의 생을 돌이키라느니, 신념을 불태우라느니. 영혼을 검에 녹여내라느니. 뭐 그런 말들."
진짜 애매한 소리긴 하네. 저게 정답이 맞기는 하지만.
하긴, 말 한마디로 전해지는 이치라면 그걸 깨달음이라 부르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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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슬슬 돌아가 볼게. 다친 사람은 일단 푹 쉬어야지."
적당히 이야기하다 일어섰다.
아쉬워 보이는 눈치긴 한데, 그래도 레오노르는 당분간 휴식을 취해야 할 테니까.
붕대를 맨 상태로 연회에 참석할 수는 없잖아?
"쯧, 그 말이 맞긴 하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페르젠에게 말하면 아카데미로 데려다줄 거야."
페르젠? 펠이라 부르던 남자를 말하는 건가.
"배려 고맙네. 잘 지내, 레오노르 황녀."
"그래. 나는 여기서 좀 쉬다가 내일쯤 들어가 봐야겠네. 그러면 연회 때 보자고."
연회인가...
"그땐 아마 사이좋게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하긴 그렇겠지."
레오노르가 쓴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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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하더군요."
"응?"
돌아오는 마차 안, 나이젤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의 그 5연격 말입니다. 저조차 간신히 눈으로만 따라갈 뿐, 대응하기는 벅차겠더군요."
"내가 쓰면서도 신기하긴 했어. 세상이 느려진 듯한 감각이었으니까."
시간은 느려지고, 몸은 둔해지고. 소리조차 먹먹하게 늘어졌다.
나 혼자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처럼.
나이젤의 눈빛에 경탄이 서렸다.
"달인 중에서도 이름 높은 강자들이 그런 현상을 경험한다고는 들었지만...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아직 미숙하지만 말이야. 다섯 번 휘두르고 나니 확 지쳐버리던걸."
어찌 보면 힘 조절에 실패한 기술이었다.
장기전을 아예 포기하고 한 합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셈이었으니까.
만약 상대가 막거나 피해낸다면, 그 직후 돌아올 반격에 저항할 수 없겠지.
뭐 그것도 더욱 깊은 업을 쌓아가면 문제 될 것 없겠지만.
"본래 업의 힘은 전투 내내 유지해가며 싸우는 것이 정석이니까요. 써볼수록 능숙하게 다루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어차피 앞으로는 지겹도록 써볼 테니까, 금방 익숙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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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한 것은 두시쯤이었다.
식사를 하기에도 강의에 나가기에도 애매한 시간대.
별수 없이 다과로 배를 채운 뒤 단련실로 향했다.
몸 상태도 회복되었으니 적당히 단련하며 업의 사용에 익숙해져 볼 생각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나이젤이 아예 감격을 하더라.
...솔직히 내가 육체단련에 좀 소홀하긴 했었지. 기술이야 열심히 익히긴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가까이 쉬어도 근손실조차 일어나지 않는 몸이다 보니.
"음? 하샬르 공 아니오! 쾌차한 모습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소."
"그래. 오늘도 열심이네, 칼릭스."
역기를 들어올리던 칼릭스가 나를 반겨주었다.
비늘 달린 이두박근이 연신 꿈틀댔다.
"건강한 근육에 올바른 정신이 깃드는 법이라오."
나이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칼릭스의 말에 격한 동의를 표했다.
"그런가?"
그럼 헤르셀라의 근육은 병든 근육이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의 정신이 올바른 정신은 아니니까.
적당히 인사하며 나 역시 운동을 시작했다.
업의 발동을 조금씩 조절해가며, 내가 전투 내내 발휘할 수 있는 근력의 수준을 체크하면서.
결과는 놀라웠다.
중량을 늘려도 늘려도 한계가 오지 않는다.
내 몸의 한계보다 운동기구가 먼저 제 무게를 못 이겨 부서질 지경이었다.
"사람 맞소?"
칼릭스조차 그렇게 물어볼 지경이었다.
근육 덩어리 용인의 눈에도 비정상적인 힘이라 이거지.
지지대가 휘어져 버린 역기를 내려놓고, 휴식중인 칼릭스와 잡담을 나누었다.
나이젤이 신이나 단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면서.
내게 자극이라도 받은 것인지 평소보다 배는 기합이 들어가 있더라.
"소승은 내일부터 다시 파견이라오."
잡담 도중에 칼릭스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이 양반 저번에도 파견 나가 있지 않았었나. 그때 있었다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은근히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란 말이지.
어차피 이번 일은 제국 내 권력다툼인 만큼 용인이 관여할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 꽤 열심이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적은 누군데?"
"이번에도 마물이라 하오. 반년 전만 해도 마물의 출현 빈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거늘, 요즈음은 마물의 출현이 꽤 잦아진 것 같소."
그야 잦아질 만하지.
그것은 일종의 전조다. 앞으로 이 세상이 크게 변하리라는 징조.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아무튼 슬슬 변화가 시작될 순간이 다가온다는 뜻이겠지.
본래 마물이야말로 이 세상의 주된 적들이니까.
어찌 보면 성장을 위한 먹잇감이기도 하고.
"흠...고생 많겠네."
인간과 달리 딱히 업이 쌓이는 것도 아닐 텐데.
전투 경험 정도는 늘겠지만.
"이런 것이 다 공덕을 쌓는 일이라오."
칼릭스가 합장하며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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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연회가 열리는 날이 찾아들었다.
아카데미의 제복을 차려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딱히 다른 치장을 하지는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내 옆을 지키는 기사가 나이젤이라 다행이었다.
평범한 시녀였다면 보통 이럴 때 치장 좀 하라고 난리를 치는 법이잖아?
그러다 보면 머리 정리에 화장에 드레스까지 들이밀어졌겠지.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여자처럼.
"응? 내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프리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단정히 빗어 내린 은발 머리카락은 절반만 틀어 올려 보석 달린 장신구로 고정한 상태였고, 눈가와 뺨에는 옅은 화장기가 맴돌아 평소보다 화사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입고 다니던 제복은 어디에 뒀는지, 지금은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새하얀 어깨와 부푼 윗가슴을 드러내는 붉은 드레스. 목에는 반짝이는 보석 목걸이까지.
"모양새가...참...화려해서 말이지."
우리 프리데를 어디에 숨긴 거냐.
친구 하나 없는 고독한 프리데씨는 어디 가고, 구혼자만 수백은 될 법한 미인 아가씨가.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 같이 좀 가자며 말을 걸어왔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야, 당연히 이 정도는 차려입어야지. 잊어버렸나 본데, 난 페일룬 대공가의 일원이거든? 황궁에서 벌어지는 연회에 평소 모습대로 갔다가는 온갖 놈들의 구설수에 오를걸. 그건 페일룬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불명예스러운 행동이야."
프리데가 도도하게 웃었다.
차림새가 저렇다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하긴, 따지고 보면 진짜 대귀족의 영애이긴 했지.
하는 짓이고 성격이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었지만 말이야.
"그렇게 되었으니, 에스코트는 잘 부탁해 기사님?"
"우욱."
"무례하기는."
프리데가 히죽 웃었다.
정말이지, 적응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어느덧 다시 월요일이 찾아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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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에 자주 나오는 무도회의 모습은 중세가 아니라지만...!
이쪽이 더 멋지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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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에 참석하러 가는 시간을 수정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침 일찍부터 출발할 이유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