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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93화 (93/100)

제 93화

HRS에 빠진 연회장

"애초에 에스코트라고 해도, 난 제국의 예법 같은 건 모르는데."

무도회 장면 정도야 예전에 영화 등에서 적당히 본 적은 있지만, 그쪽 예법과 이쪽 예법이 동일한지야 알 수 없으니.

거기에 사교춤은 춰본 적도 없고.

"딱히 큰 걸 기대하지는 않아. 기본만 하면 돼 기본만."

무슨 중대장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어차피 황궁까지는 아직 멀었으니까, 이몸께서 특별히 기본적인 예절 정도는 가르쳐줄게. 문명을 접할 시간이네, 야만인?"

"원숭-"

"그놈의 원숭이 소리는 작작 좀 하고!"

프리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림도 없지. 너는 예순다섯의 친구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 별명에서 벗어날 수 없단다.

다시 말해 평생 함께할 별명이라는 뜻이지!

조금 후, 진정한 프리데가 연회장에서 지켜야 할 예법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차에서 내릴 때, 먼저 내려선 뒤 손을 뻗어 자신을 받아주어라.

그러고 나서, 그대로 그 손을 잡고 입장해라.

누군가 소개해주기 전까지 모르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걸지 마라.

레이디에게 인사할 때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내민 손등에 입을 맞춰라. 반대쪽 손은 뒷짐 지듯 등허리에 놓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기사의 예법대로 가볍게 목례하면 된다.

사내놈이 인사해오면 악수 정도는 받아주되, 레이디 취급해오는 자에게 굳이 손등을 내밀어줄 필요는 없다.

제복을 입고 온 이상 레이디가 아닌 기사로서 찾아왔다는 의미이니까.

연회장의 음식을 과하게 집어 먹지 마라.

어지간해선 존대어를 써라. 난동 피우지 말고.

듣고 있자니 정말 기본적인 것들이긴 했다.

몇몇 개는 아주 어린애에게나 할 법한 충고들이었고.

"춤은 어쩌지? 무도회라면 그 뭐냐, 손잡고 빙빙 도는 춤을 춰야 하는 거 아니야?"

영화를 보면 항상 그러던데. 왈츠였던가.

"왈츠? 글쎄, 황제 폐하께서 주최하시는 무도회니까 아마 미뉴에트를 출 것 같은데. 이자벨라 황후가 주도한다면 왈츠를 출지도 모르지만..."

미뉴에트는 또 뭐야?

말하는 걸 보면 좀 더 예의를 차리는 춤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한 곡 정도는 나와 춰야겠지. 리드는 해줄 테니, 다른 사람들 동작을 살펴보며 적당히 따라 하면 될 거야. 눈썰미는 좋은 편이잖아?"

프리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발을 밟지만 마. 네 힘으로 밟으면 발등이 으스러질 테니까."

"...노력해 볼게."

결국 춤을 추기는 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일단 한 곡 추고 나면, 그 뒤의 춤 신청은 전부 거절해도 될거야. 나 역시 그럴 생각이거든. 그래서 너랑 같이 가는 거고. 네 옆에 있으면 귀찮은 놈들이 집적거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은 너랑 계속 붙어 다녀야 한다는 뜻이야? 그건 좀 곤란한데."

레오폴트 황자랑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페일룬의 영애를 데려갈 순 없잖아.

페일룬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입장이니까.

"누구랑 만날 약속이라도 있어?"

"레오폴트 황자와 이야기를 좀 하려 했거든."

프리데가 눈썹을 달싹거렸다.

"흐음? 뭐,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그때는 나이젤 경과 함께 근처에서 쉬면 되겠지. 괜찮겠지?"

"예. 오히려 영광입니다."

마차를 몰던 나이젤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그러고보면 슬슬 새 마부를 고용하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달인급 기사에게 마부 일을 시키는 것도 솔직히 좀 미안하니까.

황궁에 도착한 것은 어느덧 온 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갈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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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샨기오르 왕녀 전하. 페일룬 공녀님. 나이젤 경. 확인했습니다. 마그누스 카엘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문에서 검문을 서던 기사가 우리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절도있게 경례했다.

가볍게 목례한 나이젤이 마차를 끌고 정문을 통과했다.

황궁 내부는 이미 초대받은 방문객으로 가득해 상당히 북적거렸다.

말들의 울음소리, 마차 바퀴들이 덜그럭대는 소리. 거기에 수많은 이들의 대화 소리가 뒤섞여 번잡스러웠다.

보관소에 마차를 세워놓고 마차에서 내려 프리데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뿐히 손을 얹은 프리데가 우아하게 내려왔다.

우아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야.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기사 제복을 입은 여기사 하나. 아카데미 제복 차림의 카`하르 여전사.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레이디까지.

옆에서 보면 참으로 기묘한 조합일 테니까.

뭐라고 속닥거리는 건지 들어나 볼까.

청각 쪽에 의식을 집중해보았다.

속닥이는 소리들이 귓가를 파고든다.

"저분들은 누구죠? 레이디 쪽은 어디서 뵌 기억이..."

"아카데미 제복의 카하르라면, 그 왕녀 아닙니까? 이번에 메디안 남작이 되었다던."

"수인 포식자...!"

흥미롭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던 귀족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장례 미사때 먼발치에서 보긴 했지만...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로군. 뒷모습만 보아도 무서울 정도야. 소문이 허명은 아니었나."

그래그래. 내가 바로 수인 포식자다.

이거 뒤돌아 쳐다보면 기절이라도 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아아...! 바인 경, 저를 좀 잡아주시겠어요? 부끄럽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영광입니다, 레이디 엘레오노르. 기꺼이."

나를 빌미로 연애질을 하는 놈들은 또 뭐야. 가관이구만.

"눈에 힘 풀어. 억지로라도 웃고."

프리데가 나지막하게 조언했다.

몸을 돌리며, 최대한 그 말을 따르려 노력해보았다.

"히이이익...! 마, 마물...!"

"허어억...!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저 눈! 저 끔찍한 눈이!! "

"엘피넬이시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은데.

암살자를 목도한 일반인들처럼, 충격과 공포에 빠져버린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난장판이 따로 없네.

"...아니, 그럴 정도는 아니지 않소...? 오히려 저 정도면..."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아마 작위 수여식 때 내 얼굴을 봤던 사람들이겠지.

발작하는 것들은 그날 불참했던 제도 밖 귀족들일 테고.

"...와아, 춤출 필요는 없겠다. 중앙 홀로 나갔다가는 주변 귀족들이 전부 실려 나갈 테니까. 잘됐네?"

"입 다물어..."

들이대는 놈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난장판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학생들조차 이제 아무렇지 않아 하던데 이놈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하긴 하네.

걔들이야 이미 험한 꼴은 다 본 예비 기사들이지만, 이 귀족들은 평생 무기 한 번 만져보지 않은 놈들도 여럿 있을 테니까.

학생들보다 오히려 더욱 공포에 예민할 수밖에.

"일단 이거라도 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디서 준비한 건지, 나이젤이 검은 베일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마에 고정해 얼굴 앞면을 가리는 흑색 천 자락.

내 수준으로 감각이 뛰어난 자가 아니라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두껍고 짙은 베일이었다.

이걸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일단 베일을 건네받아 얼굴을 덮었다.

주위가 삽시간에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실루엣이 약한 흐릿하게 보였다.

제복 차림에 베일이라니.

어울리는 장신구는 아니겠지만 별수 없지.

그래도 얼굴을 가린 덕분인지 주변의 패닉이 조금씩 잦아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좋기는 한데, 어차피 궁 안에 들어가면 벗어야 하는 것 아니야?"

"음...그래도 본궁에 들어설 때까지 벌어질 혼란은 막을 수 있겠지요."

"걱정 마. 연회장 앞에서 신원을 확인할 때, 잠시 동안만 걷어내면 될 거야. 연회장 안에선 내가 알아서 변명해줄 테니까."

프리데가 안심하라는 듯 실실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애초에 내 얼굴을 보고 기절한다고 해서, 그게 딱히 내 잘못은 아니잖아?

베일의 효과는 탁월했다.

연회장에 들어설 때까지, 희생자를 단 두명까지 줄여주었으니까.

본궁 입구를 경비하던 기사 하나와 문 앞에서 신원을 확인하던 시종 하나로.

프리데가 고생하긴 했다.

경악해 검을 뽑아 들려던 기사를 말리고, 거품을 물고 쓰러지려던 시종을 다독여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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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돈도 많구만..."

연회장 안에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휘황찬란한 빛이 베일을 파고든다.

사치스러움의 정점에 달한 듯한 공간이었다.

벽을 장식하는 거대한 유리창들이 창틀을 감싼 백금 장식과 보석들을 자랑한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들은 다이아몬드로 장식해 오색 광채를 발했고, 대리석 기둥들은 금빛 세공을 휘감고 번쩍였다.

기둥 아래마다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그 자태를 뽐냈다.

기사. 여신. 새. 사자.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석상들이.

간단한 먹거리와 음료가 놓인 테이블들이 중앙 홀의 좌우에 쭉 늘어섰고, 몇몇 귀족들이 거기서 가벼운 반주를 즐기고 있었다.

홀의 귀퉁이에는 벨벳 커튼이 늘어선 단상이 놓여 있었다.

십수 명의 오케스트라가 본격적인 연회를 준비하며, 몸풀기 삼아 간단한 멜로디를 연주한다.

뭔가 익숙한 멜로디인데.

이런 장소의 음악들이란 어디나 다 비슷비슷한 건가?

2층은 가운데와 한쪽 벽면이 텅 비어있는 모습이, 옆으로 눕힌 ㄷ자와 같은 모양새였다.

휴식을 위한 장소인지 카드놀이를 위한 낮은 테이블과 푹신한 소파들이 놓여있었고.

실내는 조금 따뜻한 편이었고, 향수와 분 냄새가 어지러이 풍겨왔다.

우리를 쳐다본 귀족들이 이내 자기들끼리 소리죽인 대화를 나누었다.

실로 다양한 면면이었다.

베일을 쓰고 나타난 왕녀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자.

프리데의 자태에 감탄하는 사내놈들.

있는 대로 기세를 줄였음에도, 두려움을 느끼는지 손끝을 떠는 귀부인들까지.

남성 귀족들은 대부분 연미복을 입고 있었고, 몇몇은 기사 출신인지 기사단의 제복 차림이었다.

여자들이야 뭐, 누구 드레스가 더 화려한지 내기 중인 듯한 모습이었고.

나처럼 제복을 입은 여자는...기껏해야 두셋 정도네.

제복 가슴에 달린 장미 휘장을 보니, 레오노르의 장미십자기사단 소속이겠고.

"야, 이제 뭘 하면 되냐? 무도회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기?"

목소리를 확 죽인 채 프리데에게 질문했다.

"음...일단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란덴부르크 변경백께 가보자. 네 후원자잖아?"

후원 수준을 넘어서 후계자가 되게 생겼지만 말이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하샬르 리얼리티 쇼크...!

그 면포를 벗기면, 공포 내성이 낮은 이들은 빨간마스크를 본 아이처럼 충격에 빠져 울부짖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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