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98화 (98/100)

제 98화

무도회를 마치고 (1)

용건을 마친 뒤, 아델라이드가 기다리던 소파로 다시 되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아델라이드 양."

"저는 괜찮답니다 레오폴트 전하. 이야기는 잘 마치셨나요?"

"그렇소. 아주...중요한 내용이었지. 나중에 그대에게도 이야기해 주겠소."

소파에 앉은 레오폴트는 목이 타는 것인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잔을 집어 들었다.

반쯤 채워진 검붉은 와인이 찰랑였다.

...나도 한 잔만 마실까. 솔직히 목이 좀 마른 데.

괜스레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솔직히, 딱 한 잔쯤은 괜찮지 않나...?

클레어가 건네주는 술도 아니고, 레오폴트가 마시고 있을 정도면 위험하진 않아 보이는데.

독 같은게 들었으면 미리 알아챘겠지.

그래, 딱 한잔만.

나도 모르게 옆에 놓여있던 크리스털 잔을 집어 들었다.

베일을 살짝 들치며 와인을 입가로 가져간다.

체리와 블랙베리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살짝 머금고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상큼한 맛. 거기에 약간의 떫은맛과 단맛이 잘 섞여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좋은 술이네.

거의 반년 만에 마시는 알코올을, 기꺼운 마음으로 식도 너머로 흘려보냈다.

기억이 남아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 ■■■]=====

마침내.

눈을 뜬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세상의 공기를 만끽했다.

기억 속 초원의 향기와는 전혀 다른 냄새였으나, 그럼에도 기꺼운 삶의 증거를.

해방된 충족감이 혈관을 따라 내달리며 그리웠던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조금씩 꿈틀거려 보았다.

익숙한 감각을 되새기듯이.

"하샬르 왕녀? 괜찮소?"

흐릿했던 의식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하샬르.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그래,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 가짜가 아닌, 진짜 내 이름.'

마침내 되돌아온 주인을 환영하며 터져 나오려는 살업의 기세를 강제로 가라앉힌다.

순한 양처럼 복종한 기운이 조용히 숨을 죽였다.

"...문제없습니다."

'그래, 아무 문제도 없지.'

하샬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그녀를 제국의 황자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아마 레오폴트였던가.'

전부 보고 있었다.

전부 듣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차지한 무언가가, 그녀의 계획을 모조리 일그러트리며 괴상한 짓을 일삼는 광경을.

그 정체가 무엇인지, 무슨 속셈인지까지는 거의 알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누구의 수작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소행을 벌일 수 있는 놈들이라면 아마 주술사 따위일 테니, 언젠가 모조리 찢어죽이겠다고.

어머니의 묘, 자한과 동생.

그녀가 일군 모든 것들을 내버리고 서부로 도망치는 꼴을 보았을 때는 격노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자가 알기나 할까?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저질러버린 것인지.

기껏 수천 데인인을 사냥해가며 서부인과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아이샨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도록 묶어놓고 있었건만.

정복 전쟁을 원하는 전사들이 점점 오르한에게 불만을 품고, 이윽고 위명을 떨치는 새 주인을 지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 성과를 일거에 날려버리고 결국 오르한을 대평원에 풀어버리다니.

뒷수습할 방법을 생각해보기나 했을까?

'그럴 리가.'

다음으로 품은 감정은 의문이었다.

이 몸을 차지한 자가 하는 행동들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마치 미래를 아는 것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대비하지 않나.

본능에 휘둘리며 잡배처럼 굴다가도, 어머니의 검만 쥐면 갑자기 돌변해 기사 노릇을 해대질 않나.

보고 있으면 한심스러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전사조차 아니었는지 힘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육체만 믿고 날뛰는 한심한 전투로 매번 남의 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지 않나.

우습게도 갓 달인에 오른 듯한 여자에게 사실상 패배하더니, 데인 성전사 따위에게는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끝에 가서는 한낱 기물의 힘 따위에 휘둘리기도 했었지.

그 후로도 대전사조차 아닌 수인 몇 마리에게 밀리더니...결국 힘을 다 토해내고 죽어버릴 뻔하기까지.

'수인들과 싸운 이후로는, 그래. 그나마 나아지긴 했지.'

대전사와 싸운 덕분인지 달인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는 있게 되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그녀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던 감정.

그 모든 몰골을 보아오며 목이 터져라 욕설을 퍼부어봐도 조금도 닿지 못했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나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지금 이렇게 되돌아온 것조차 기적이었다.

아마도 오래가지 못할, 한밤의 꿈과 같은 잠시 동안의 기적.

직감이 하샬르에게 속삭였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원인은...이것 때문인가.'

그녀의 뱃 속에서, 작게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한 마기를 뿜어내며 몸속으로 파고들어 가려 하는 자그마한 벌레.

이 정도로 나약하고 작은 생물이라면 어지간해선 감지할 수조차 없을 터.

흐려진 정신과, 체내에 파고든 이물에 맹렬한 위기감을 느낀 육신이 합쳐져 본래 주인을 불러왔으리라.

하샬르는 살업을 체내에 집중해 두려움에 떠는 벌레를 먼지처럼 으스러트렸다.

나약한 벌레였다.

사람 몸에 기생하지 못하면 얼마 못 가 자연스럽게 죽어버릴 정도로.

"술에, 무언가를 섞어놓았군요. 어지간해선 눈치채지 못할 아주 작은 것을. 사제의 축복 정도면 스러질 듯하니 레오폴트 전...하의 휘하 귀족들에게 나중에 치료받으라 명하십시오."

하샬르는 술잔을 내려놓고 황자에게 경고를 전했다.

본래라면 제국의 인간 따위가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었지만...그녀의 의식은 얼마 못 가 다시 뒤로 밀려날 테고, 그 뒤의 일들은 다시 이 빌어먹을 강탈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 일단은 맞춰주어야겠지.'

몸을 빼앗은 놈이 허무하게 죽어 나자빠지면, 그녀 자신 역시 허망하게 스러질 테니.

"지금, 뭐라고..."

"말한 대로입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까딱인 하샬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더 할 말은 없었다.

레오폴트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확인하려 반문하는 것이었으니.

'경고는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본성을 억누르며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뇌리에 치밀어오르는 짜증 때문에 피곤할 지경이었으니까.

홀로 발코니 쪽으로 향하며, 하샬르는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놈이 누구일지 다시금 고민했다.

주술적인 무언가가 얽혀 있음은 틀림없었다.

서릿발을 검사했던 여자가 그것에도 저주가 걸려 있다고 했었으니.

'박멸했다고 여겨지던 놈들이...감히 아이샨에 숨어들었다는 뜻이겠지. 오르한의 애새끼들 중 하나가 벌인 짓거리 같은데.'

하샬르는 자신의 배다른 오라비들이 범인이라 확신했다. 심증이긴 했으나, 근거는 있었다.

그 버러지들이 그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으니, 뒷수작을 부려왔던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게다가, 칸의 자식들이라면 주술사 놈들에게도 접근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일 테니까.

'...자한은 괜찮으려나.'

이제와서 동부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하샬르가 뒷목을 매만졌다.

다시 한번 솟구친 노기에 뒷골이 당겨왔기에.

"거기, 멈춰."

하샬르는 접시를 들고 지나가던 시종을 멈춰 세우며, 손을 뻗어 술병 하나를 빼앗았다.

벌레가 들어있다고 해도 꽤 맛 좋은 술이었으니. 벌레 따위야 뱃 속에서 없애버리면 그만이었다.

밖으로 나온 하샬르는 술병의 목을 손끝으로 뜯어버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고향의 술에 비하면 연하고 달기까지 한 맛이었으나, 이 역시 나쁘지는 않았는지 목울대가 쉴 새 없이 꿈틀대었다.

"하아아..."

반쯤 비워버린 술병을 난간 위에 올려놓은 채, 주머니를 뒤져보던 하샬르가 마력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서부인들이 이것을 연신 피워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 역시 내심 한 번쯤 맛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었기에.

'...나쁘진 않네.'

하샬르는 눈을 감고 연기를 음미했다. 조금 매캐한 박하향이 폐 안에 스며드는 느낌을 즐기면서.

확실히 생각보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제 몸을 빼앗은 놈이 입에 달고 사는 것이 그녀에게도 이해가 갈 정도로.

머릿속이 차분해지며 분노가 조금 누그러졌고, 예민해진 감각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천것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한껏 날카로워진 그녀의 감각은 눈을 감고 있음에도 주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수풀 속에서 다리를 벌린 채 뒤엉켜 들썩이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품위니, 예절이니 하더니...정작 본성은 별다를 것 없는걸.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처럼.'

하샬르는 눈을 감은 채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뱉으며 그녀의 어머니, 아이멜라를 떠올렸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서부의 귀족 출신임에도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불쾌감을 드러내곤 했었다.

옛 긍지는 간데없이 대부분 부패한 쓰레기가 되었다면서, 노골적인 경멸을 입에 담았었지.

목이 말라오면 신음소리를 안주 삼아 술을 들이키고, 다시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기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감각에 누군가가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비틀대는 발걸음. 거친 숨소리. 격한 심장박동.

공기의 떨림으로 보아 살집이 많은 체구의 남성.

풍겨오는 냄새에는 독한 주향이 섞여 있었다.

'...누구지?'

명백하게 그녀 쪽을 향해오는 모습에, 하샬르는 허공을 향했던 시선을 내려 발코니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창문이 활짝 열리며 중년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콰하게 취해 붉어진 얼굴.

화려한 예복이 우스꽝스러울 지경으로 부풀어오른 체구

.

어울리지 않게 윤기 흐르는 금발이 오히려 실소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흐으, 역시나 여기 계셨군. 카하르 왕녀..."

흔들리는 목소리에는 짙은 적의가 서려 있었다.

"날 아나?"

하샬르가 차갑게 되물었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강탈자의 기억을 되새겨봐도 이런 인물과 만난 적은 없었으니.

"길버트 번스타인. 번스타인 자작가의...가주요. 당신이 망가트린, 케네스 번스타인의 아비지."

'케네스?'

"그게 누구지?"

하샬르의 목소리에 담긴 의문에, 길버트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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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설마했던 원본이 깜짝출현했습니다!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아직 덜 빡쳐서 판단력 자체는 남아있기 때문이겠네요!

헤르셀라는 주인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수인 잡고 제 힘으로 달인이 된 것 하나는 괜찮게 여기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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