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대련 (1)
“지금부터 대련 평가를 시작하겠다.”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마법학부 1학년 전용 경기장, ‘듀크관’. 널따란 건물 내부는 4등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한 공간마다 경기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법학부 1학년생은 4개 조로 나뉜 채 각각 다른 경기장으로 이동해 있었다.
나는 A조였다. 많은 학생 중 루체나 이안, 마테오, 트리스탄이 눈에 띄었다. 카야나 에이미는 다른 조로 갔을 것이다.
경기장 옆에는 심사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자리엔 중년의 마법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전부 심사관들이었다.
“룰은 간단하다.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항복을 받아 내면 승리. 그러나 대련 시작 후 1분 동안 항복은 불가능하니 참고하도록. 수행평가 특성상 돌발 행동은 금물이다. 시험감독관들에게 제지 당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라.”
페르난도 교수는 경기장 위에서 좀비 같은 조교인 마르코, 부교수와 함께 학생들에게 수행평가 내용을 알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때는 대련 도중뿐이다. 최고의 의료진과 성직자들이 대기 중이니 너희들의 온전한 실력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길 바란다. 이상.”
페르난도 교수는 짧게 설명을 마치고 경기장에서 내려갔다.
이어서 부교수가 첫 번째 순서로 대련할 학생들을 호명했다.
마테오 조르다나와 처음 보는 학생이 경기장에 오르고, 심판이 ‘대련 시작’이라고 외치자 대련이 시작되었다.
[ 마테오 조르다나 ]
Lv : 80
종족 : 인간
속성 : 바위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의 실력을 따라잡고 싶어 합니다. ]
마테오는 안 본 사이에 많은 성장을 이룩한 상태였다.
훗, 나를 목표로 삼고 분발해온 건가,
···나 곧 있으면 털릴 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트리스탄 어떡하냐.’
트리스탄이 꼴 받게 했을 땐 기어코 이기겠다고 다짐했지만.
역시 전력에서 놈한테 뒤처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갈고 닦았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이안 페어리테일과 트리스탄 험프레이가 갈등을 일으키는 파트는 사역마 소환 때다. 그때 이안은 나대는 트리스탄을 가볍게 쓰러뜨리며 사이다를 날려주게 된다. 그 후로 트리스탄은 방어 마법도 익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반 배정 평가 때 놈을 자극해 버렸다. 녀석이 지금쯤 방어 마법을 제대로 익혀 놨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트리스탄은 허영심이 많은 놈이래도, 공격 마법 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그런 녀석이 공격에다 방어까지 잘해낸다면, 나로선 손 쓸 도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단 한 번의 승부수로 놈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안 그러면 무조건 패배할 것이다.
“······?”
뭐지?
페르난도 교수가 조교수에게 귓속말로 뭐라 하더니 잰걸음으로 복도로 나섰다.
평소의 포커페이스가 흔들린 것처럼 보였는데···.
‘뭐, 별일 아니겠지.’
잠시 떠오른 불안감을 잠재웠다.
이번 대련 파트에서 위기 상황이라고 할 만한 심각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뭘 잘못 먹었는지 화장실이 급하다, 이런 거겠지.
“마테오 조르다나, 승!”
마테오는 바위 마법으로 가볍게 상대를 제압했다.
대련을 마친 뒤엔 심사관들의 피드백이 이루어졌다.
대부분 마테오의 기지에 칭찬할 점, 개선할 점 등을 언급하는데 유독 한 명만이 혹평을 날렸다.
“형편없군. 바위 마법의 숙련도가 아주 뒤떨어져. 바위는 단번에 형태가 정해지는 원소 속성이네. 뒷일을 계산한 바위 형태 조각 및 정교한 전투 능력이 필수란 걸세. 헌데, 자네는 그런 난폭한 전투밖에 할 줄 모르는 건가? 왜 B 클래스 학생인지 모를 실력이었네. 역시 평민이라 이건가….”
아, 저거저거. 누군지 알고 있다.
새빨간 머리칼의 중년 남자. 대놓고 신분차별주의자인 교수.
A 클래스 담당 필립 교수였다.
[ 필립 멜트런 ]
Lv : 108
종족 : 인간
속성 : 불, 바위
위험도 : X
심리 : [ 평민이 귀족을 이겨서 불쾌해 하고 있습니다. ]
악명은 높으나 실력은 확실한 교수다. 게다가 귀족에겐 잘 대해주기 때문에, 만일 귀족 된 입장이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는 교수였다.
마테오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차분해졌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얌전히 필립 교수의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마테오. 오히려 그의 고분고분한 태도가 필립 교수의 화를 돋운 듯 보였다.
마테오는 실력으로 당당히 자기 가치를 증명해가기로 다짐한 상태다. 필립 교수가 자극하는 정도로는 바위처럼 끄떡없을 것이다.
“다음! D 클래스 아이작, B 클래스 트리스탄 험프레이, 앞으로!”
내 차례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깊이 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내 차례가 되니 경기장이 더없이 커 보였다. 긴장한 탓인지 심장이 거칠게 달음박질했다.
천천히 계단을 통해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반대편에선 허영심 많은 금발 귀족, 트리스탄 험프레이가 씨익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심판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둔 채 마주 보았고.
“······?”
시스템 창이 눈앞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근처에 있는 마족을 감지했습니다.]
휘이이이이─.
돌연 머릿속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며, 심지가 위쪽으로 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드높은 천장. 저 너머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마도 옥상에 있을 마족의 정보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 허상의 리파 ]
Lv : 130
종족 : 마족
속성 : 어둠, 불
위험도 : 최상
심리 : [ 당신을 포함한 모든 학생을 죽이고 싶어 합니다. ]
지금은 <메르헨의 마법 기사> 「3막 1장, 대련」 파트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메르헨의 마법 기사> 「6막 3장, 허구지옥」 파트의 최종 보스, 허상의 리파.
아직 나오려면 한참 먼 놈이… 왜 벌써 나와…?
* * *
청명한 하늘 아래, 듀크관 옥상에선 바람이 휘휘 불고 있었다.
회갈색 머리칼을 가진 왜소한 체격의 마족, ‘허상의 리파’는 난간에 기댄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옥상 바닥에는 은은한 보랏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으나.
리파의 관심사는 그 너머였다.
가까이 있는 장소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고유 스킬 [투시]. 그는 [투시]의 힘으로 옥상 바닥 너머, 건물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네 곳으로 나뉘어 있는 경기장. 각 학생들이 대련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아직 눈에 띄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방해꾼은 아직인가~.]
리파는 지루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개구쟁이 같은 목소리였다.
마족을 해치우고 다니는 방해꾼. 그로 추정될 만한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을 찾아내면, 그 녀석과 이안 페어리테일을 중심으로 한 데스 게임을 벌일 셈이었다.
게임 참가자는 듀크관에 있는 마법학부 1학년 학생 전원. 시시한 심사관들은 덤이다.
[이제 곧, 곧인데 말이야.]
전부 제 마법에 가두고, 이안 페어리테일과 방해꾼이 사람들을 지키게 만드는 것이다. 아아, 분명 재밌겠지.
리파는 낄낄 웃었다. 기대감이 한층 차올라 그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끼익─.
옥상 출입문이 열리고, 냉철한 인상의 한 사내가 나타났다. 은발과 푸른빛 눈동자.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였다.
리파의 눈이 페르난도 쪽으로 돌아갔다.
“마족이냐···?”
페르난도는 두 눈을 좁힌 채 냉소적으로 리파를 쏘아 보았다.
리파는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었다. 설마 여기서 교수가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무슨 일이십니까, 교수님~? 아하, 지금은 마법학부 1학년 대련 평가 중이었죠?]
“······.”
[듀크관 출입은 엄금사항이었는데! 아아, 깜박했네요, 깜박했어! 죄송합니다아~.]
어린 아이처럼 촐싹대듯 대답하는 리파. 죄송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말을···?”
페르난도가 놀란 부분은 리파가 몹시도 평범한 인간처럼 말한다는 점이었다.
마족은 본래 지능이 떨어지는 존재고, 평범한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로 알려져 있으니까.
[근데 웬일이래? 건물 안쪽에만 그물망친 거 아니었어? 아하, 이번엔 건물 밖에까지 쳤나 보구나? 무리했네~.]
“···그건 어디서 주워들은 거냐?”
평소 페르난도는 시험이나 수행평가가 건물 안에서 이루어질 시, 건물 전체에 염동력을 이용한 그물망을 쳐둔다. 일종의 결계다. 따라서 이변이 생겼을 경우, 페르난도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학사 내 주요 집단들뿐. 교수진, 4성좌(星座), 학생회 따위다.
“내통자가 있는 거냐?”
[클클클….]
리파는 독특한 웃음소리로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
그 의미는 명확했다.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텐데’.
“무슨 속셈이냐?”
페르난도는 리파를 향해 오른쪽 검지를 내밀었다. 그 손가락 앞에 물 마나와 얼음 마나가 흘러나와 작고 동그랗게 압축되어 탄환의 형태가 되었다.
「물 생성 (물 속성, ★1)」 + 「얼음 생성 (얼음 속성, ★1)」 + 「압축 (중립 속성, ★4)」
= 「원소 마탄 (물+얼음 속성)」
[아이구야, 진정하세요, 진정~. 평화적으로 얘기하자고, 우리.]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군.”
옥상 바닥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은 꾸물꾸물한 획이 이리저리 엉켜 있는 형태였다.
웬만한 마법진은 전부 외워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불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은 더없이 위험하다고 페르난도는 진득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력은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발동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 일반적으로 마법진이 발동되기 직전이라면 어느 정도의 마력이 느껴져야 하는데…?
[하아, 방해받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너라면 에피타이저쯤은 될 수 있겠네!]
“······!”
마족의 촐랑대는 목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뿜어내던 보랏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이어, 거무스름하면서도 기이한 마나가 삽시간에 퍼져 나와 리파와 페르난도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즐기게 해주라, 페르난도 프로스트.]
옥상에 생성된 보랏빛 원형 공간, [허구지옥].
공기 중에 떠다니던 자연 마나가 빨려 들어가며, 이 세계의 진리나 섭리와는 단절된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다.
페르난도는 그 세상에 강제로 초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