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홍련의 무녀 (2)
* * *
[Level Up!! Lv이 118로 상승했습니다!]
많은 여학생이 아카데미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피에르 플랑체의 죄를 덜어내기 위해서, 그의 온갖 선행 사례를 제시하며 선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피에르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성품이 훌륭하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분명 오해가 있는 거라고.
‘이것이 개씹알파메일의 삶인가.’
TV에서 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흉악한 범죄자가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굉장히 잘 생겨서 그를 석방해 달라고 시위하는 사람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고.
피에르가 그런 경우일까.
원망의 화살을 내게로 뻗은 멍청한 후배도 몇 있었으나, 루체의 살기 어린 눈초리를 받은 후로 날 찾아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루체 만큼 든든한 녀석이 또 없었다.
피에르 사건 이후, 공신제는 원활히 진행되었고.
아크볼 레이스에서 우리 팀은 1등을 차지했다.
공신제 마지막 날, 아크볼 레이스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허영심 많은 금발 귀족, 트리스탄 험프레이가 1등 자리에 대표로 나서서 트로피를 양손으로 치켜들자 우리 팀은 일제히 환호했다.
1등 상품은 형형한 마력의 빛깔을 내비치며 허공에 형상만 새겨졌다. 공신제가 끝난 이후 지급될 예정이었다.
나는 리제타에게 ‘패배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하고 조롱했다. 녀석은 ‘이 새끼….’하고 미간을 찌푸리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1등 한 그 순간이 순수하게 즐거웠는지, 나도 꽤 들뜬 모양이었다.
우려와는 달리 아크볼 레이스는 경험치가 되어 주었다. 1등이 되자마자 레벨은 공신제 준비 기간 동안 찍었던 117에서 118로 상승.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쉬운 게 있다면.
‘다른 건 별로 못 즐겼네.’
교정을 거닐면 온갖 즐길 거리가 널려 있었다. 학생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오락과 간식이 많았으나, 막상 나는 아크볼 레이스 말고는 제대로 즐긴 것이 없었다.
도로시가 같이 놀고 싶다며 투정 부려도 애써 참아내야 했다.
단련해야 했으니까.
컨디션이 저조하지도 않았고, 축제 기간이라 훈련장이 텅 비어 있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입에 침 고이는 상황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7성급 마법을 익히고 싶었다.
그래서 축제 분위기를 즐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던 것. 여유 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은 아쉬움이 남더라도, 축제든 뭐든 마음 편히 즐기는 건 악신 네피드를 해치운 뒤로 미뤄둬야겠지.
어느덧 하늘에 짙푸른 어둠이 엄습한 때였다.
평소처럼 비틀거리며 훈련장을 나섰다. 슬슬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잠시간 몸이 안정을 취해야 할 테니 마력기는 일부러 들지 않았다.
호흡을 2분간 가다듬자 정상적인 발걸음은 가능해졌다. 이제 가자.
한산한 교정. 전교생은 화려한 빛을 뽐내는 경기장에 몰려 있으리라. 나는 그곳으로 곧장 나아갔다.
복잡한 연산과 마력 운용을 위주로 단련한 탓인지, 소모된 마력 자체는 적었다. 체력도 조금만 휴식을 취해도 금방 나아질 수준이었다.
힘든 단련 중에도 마력과 체력을 아낀 건 이제 곧 벌어질 일 때문이었다.
‘8막….’
<메르헨의 마법 기사> 「8막 2장, 홍련의 무녀」.
공신제 폐막식이 열리고, 마지막 순서에서 무녀 미야가 무대 위로 오른다.
그녀는 화봉국의 전통인 불의 춤을 선보이며 학생들을 매료시키지만.
춤이 끝난 순간, 돌연 폭주해 여러 사람을 향해 화염을 쏘아낸다.
이안에게는 대련에서의 원한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뒤에서 욕한 게 원망스러워서.
전교생 앞에서 그녀가 화려하게 급발진하자 컷씬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관중석 쪽에는 아카데미에 소속된 전투 병력이 각각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금세 결계를 펼쳐 학생들을 지켜내겠지만, 이내 미야는 도망쳐 버릴 터.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미야가 도망치기 직전, 그녀의 그림자에서 마족을 발견했다고 증언한다.
그렇게, 미야가 마족에게 잠식당했다고 판단해 아카데미엔 비상이 걸린다.
아카데미는 미야를 찾아 나서고.
미야는 아카데미 곳곳에 숨어 다니며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원망스러운 년놈들을 죽이려고 한다.
빛 속성으로서 마족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사명감, 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정의감으로 이안 페어리테일은 친구들을 소집한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이안을 포함한 4인 파티를 구성해 마족에게 지배당한 미야를 쫓아야 하고.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그것이 8막 2장의 내용이었다.
‘시나리오처럼 될지는 몰라.’
이미 ‘나’라는 변수는 기존 시나리오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게임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이었다.
폐막식 때 미야가 폭주할지 안 할지는 모른다. 다만, 주의하고 대기할 필요는 있었다.
그리 걷던 중, “꽤액, 꽤액!”하고 하얀 조류가 날아왔다. 대개 급한 용무가 있을 때 이용하는 편지 배달부, ‘브이’였다.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지 않는 순한 습성을 지닌 마수였다.
나는 멈칫하고 팔을 내밀었다. 브이는 내 팔에 안착하고는 기다란 부리로 몸통에 멘 가방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내게 건넸다.
“고맙다.”
브이가 날아가자마자 나는 편지 봉투를 확인했다.
수신인만 적힌 검은 편지. 인장조차도 찍히지 않은 채였다. 어디를 보나 수상쩍었지만, 수상한 마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이든.”
허공에 바위 마력이 뭉치고 작은 골렘 사역마 이든의 형태가 되었다.
[꾸우!]
“이것 좀 열어 줘.”
편지를 내밀자 이든이 짧은 팔로 냉큼 받아 냈다.
이든은 바위 몸을 지녔기에 독살은 먹히지 않는다. 편지에서 뭔가 튀어나오더라도 역소환하면 그만일 터.
이든은 앙증맞은 바위 손으로 편지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꾸우야!]
이든은 편지지를 내게로 내밀었다. 글씨만 적힌 평범한 편지지였다.
녀석에게서 편지지를 받아 들고 내용을 읽었다.
발신인은 안 적혀 있었지만, 누가 보냈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시나리오랑 다르네….”
[꾸우.]
내 생각처럼 흘러갈 거란 기대조차 안 하긴 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8막 2장은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밤하늘과는 대비되는 광경이 메르헨 아카데미 한 켠을 차지했다. 화려하게 빛나는 경기장이었다.
교복 차림의 전교생이 관중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자아, 지금! 메르헨 아카데미 제블렘의 폐막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 에이미 할로웨이가 소리쳤다.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며 공신제의 폐막식이 시작되었다.
무대에서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고, 학생들이 즐거워하는 가운데.
루체는 오로지 아이작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도로시는 흥분한 얼굴로 공연에 호응했고, 카야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이윽고, 폐막식 공연은 마지막 순서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흑발 소녀가 기품 있게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금빛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아 둔 붉은 드레스.
마력이 바닷물처럼 그녀 주위에 흐르며 무대를 풍족하게 만들었고.
무녀는 무대 한가운데 단독으로 서서 준비 동작을 보였다.
우아한 자태. 그녀의 연약한 육신은 고운 선을 자랑했다. 이내, 악단의 연주 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자 미야가 검은 부채를 착 펼쳤다.
화려한 마력의 조명 속에서 그녀는 기품 있는 춤사위를 선보였다.
신에게 바치는 그녀의 무용은 가히 예술적이었다. 학생들은 말없이 음악에 흠뻑 심취한 채 무녀 미야의 춤에 빠져들었다.
연주가 하이라이트에 접어들자, 타이밍에 맞추어 미야의 화염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붉은 화염은 비단결처럼 곱게 펼쳐졌고, 고상한 자태로 허공을 가르며 미야의 춤 동작과 조화를 이루었다.
화봉국의 전통, 불의 춤.
미야의 춤을 관람하던 학생들은 홀린 듯이 입을 떡 벌리거나, 넋을 잃거나, 웃으며 감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로시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찌푸렸다.
“왜 그래, 도로시?”
“저거…, 가짜네.”
“뭐가?”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응? 어딜? 도로시?!”
도로시는 친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관중석에서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 * *
수십 분 전.
시끄러운 폐막식을 등지고, 메르헨 아카데미는 고요하게 침잠해 있었다.
교정에 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은 모두 폐막식을 관람하는 중이었으니.
청은발의 남학생은 교정을 빠져나가 인근 야외 대련장에 이르렀다. 한창 축제가 벌어지는 때 그 어느 곳보다도 숨을 죽인 곳이었다.
램프 하나 없어 어둠으로 물든 그곳에는 오로지 달빛과 별빛만이 미약한 빛을 하사하고 있었다.
대련장은 아래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아이작은 통로를 지나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고개를 내리고, 대련장 가운데서 화려한 장식을 이리저리 매단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성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폐막식의 주인공 답게 어여쁘게 치장한 얼굴, 앙칼진 눈매, 생기 없는 눈동자가 아이작을 향했다.
“왔네, 선배.”
대련장의 고요가 깨진다.
그녀는 흑발을 갈무리하며 까칠한 어투로 말했다.
무녀, 미야였다.
아이작은 대답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교복 재킷을 벗어 관중석 아무 데나 던져 놓았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미야가 여기까지 부른 연유를 대번에 짐작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미야는 웃음을 흘렸다.
대련장 위. 아이작은 미야와 거리를 두고 발걸음을 멈췄다.
“혼자 와 줬네. 말 잘 듣는 건 좋아.”
“계속 감시하고 있었잖아.”
아이작은 안경을 벗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눈매가 차게 식어 있었다.
카야와 도로시하고는 8막 2장의 시나리오를 상정해서 작전을 짰다. 하지만 미야에게서 편지가 온 직후, 아이작은 모든 작전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짐작했다.
편지에는 유치한 자작극이 적혀 있었다.
화이트를 데리고 있으니 밤에 야외 대련장으로 혼자 오라는 내용이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편지를 읽자마자 [천리안]으로 일대를 살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감시꾼 하수인이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작은 알아챘다.
편지 내용을 따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허튼수작을 부렸으면 필시 미야가 알아차렸을 테니, 아이작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릴 터.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아이작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미야가 난동을 안 피우고 자신 혼자만 불러 주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눈썰미도 예리해. 버러지 주제에.”
“화이트 안 데리고 있지?”
[천리안]으로 화이트가 폐막식을 관람하는 중이라는 건 확인했다.
아이작의 능력을 잘 모르는 미야는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하게 됐네. 근데, 그런 건 이미 알고 찾아온 거 아니야?”
아이작은 어깨를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아이작은 미야를 쏘아 보았다.
“…내가 원망스럽냐?”
“선배는 벌레한테 물리면 그 벌레 안 죽이고 싶어?”
“무슨 취급인진 알겠다.”
더 얘기할 것도 없겠네.
마력 회로의 순환 강도를 증폭시킨다. 아이작은 두 주먹을 쥐고 무덤덤하게 전투 자세를 취하며, 냉기를 그 손에 거머쥐었다.
미야는 씨익 웃었다. 그녀 주위로 불꽃이 휘감기며 세 개의 화염 꼬리가 피어 올랐다.
그녀의 그림자 속, 한 마리의 마족이 두 눈을 번뜩였다.
호시탐탐 노려온 때가 임박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