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변화 (7)
* * *
메르헨 아카데미 게시판에 앨리스 캐럴에 관한 새로운 공지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마력으로 굳어진 그 공지문엔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의 입장이라는 뜻. 황실이 서슬 퍼런 이빨을 드러냈다는 증표. 이 내용에 반대하면 황실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강압적인 의미였다.
학생들은 떼로 모여 공지사항을 읽었다. 사건 조사 결과 앨리스 캐럴은 내통자가 맞으나 마족에게 강제로 이용 당했다느니,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느니, 앨리스 캐럴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걸로 결론 났다느니, 모두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적혀 있었다.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황실 기사단 앞에선 사려야 했지만.
앨리스 캐럴. 그녀는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명실상부 가장 큰 명망을 떨친 학생이었다.
준수한 업무 수행 능력으로 여태껏 학생회장 직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마치 때 묻지 않은 듯한 선한 성품까지도 겸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녀를 동경하는 학생이 아주 많았다.
그렇기에 여론은 앨리스 캐럴에게 이로운 쪽으로 흘러갔다.
“…….”
“…….”
수업 시간. 오르핀관, 2학년 B 클래스 강의실에 예고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교수 데이지가 칠판에 수업 내용을 적으며 설명하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린 까닭이었다. 그녀는 칠판을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이건 아니야….”
뭐가?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교수님?”
“마침 잘 불렀다. 마테오 조르다나, 나와봐라.”
재빨리 마테오를 쳐다보며 지시하는 교수 데이지.
짧은 갈색 머리칼의 남학생, 마테오 조르다나가 교탁 앞으로 나섰다.
교수 데이지는 마테오의 어깨에 벼락처럼 양손을 올렸다. 넓은 어깨를 가진 마테오는 순간 흠칫했다.
“설명해라!”
“예?”
“어째서! 내가 원왕을 가르치고 있느냔 말이다…!”
교수 데이지는 나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패닉 증상이 엿보였다.
마테오는 물론이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모두 당황했다.
“내 교수 생활 12년, 이때 만큼 회의감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내가 배워도 모자랄 판에, 왜 원왕이 여기서 내 수업을 듣고 있는 거지? 이 부담감을 어쩌란 말이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부들부들 떠는 교수 데이지. 그녀의 고뇌가 피부에 와 닿았다.
“설명해다오, 마테오! 제발!”
“그, 그걸 제가 어떻게 설명합니까?!”
데이지는 교수 답게 마법 이론에 능통하며 무척 재밌게 가르친다는 강점을 가졌다. 이에 맞게 성격도 독특했다.
매일 ‘교수 데이지, 강림’, ‘교수 데이지, 바람 같은 등장’ 따위의 비장한 인사말을 내뱉으며 강의실에 들어오는 사람이니까.
또한, 자기만의 유용한 마법 노하우도 빈번히 알려주는 편이라 수업을 들을 때마다 만족스러웠다.
학생들 앞에선 고지식한 예법에 구애받지 않기도 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아마 신림동에서 강사 일을 했으면 1타 강사로 소문났을 것이었다. 즉, 내게는 마음에 드는 교수였다.
나는 안경을 들치고 순한 미소를 지었다.
“전 교수님 수업이 좋아요.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끼야아악!”
교수 데이지는 발작했다.
……
요새 강의 시간에 교수들이 날 신경 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해했다. 실제론 아니지만, 그들이 보기에 난 희대의 대마법사니까. 천재 수학자 폰 노이만 앞에서 중고등학교 수학을,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앞에서 중고등학교 지구과학을 가르치는 느낌일 터였다.
그렇다고 배우겠다는 학생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진실을 알려줄 수도 없고.’
믿을지 의문이었고 애초에 리스크밖에 없는 장사였다. 내 비밀은 끝까지 믿음직한 동료에게만 공유해야 할 터.
일단… 내가 여전히 아카데미 수업을 듣는 명목으론 ‘그래도 배워갈 게 많다’라고 퉁쳤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오오’하고 환호하고 내 뜻을 제멋대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마치 무예의 고수가 궁극의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 기본 동작으로 돌아가 완벽을 기하는 모습처럼 보였나 보다. 방향성은 몹시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으니 상관없었다.
‘확실히, 사람들 인식이 많이 바뀌었어.’
나를 대하는 태도, 나를 보며 느끼는 감상, 나를 향한 인식.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느끼는 공기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며칠 전, B 클래스와 C 클래스 특별 합동 수업 때. 로제 레드리베라가 나를 보자마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피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 ‘죄송합니다. 제제, 제가 잘못했어요….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같은 조가 되었기에 쉬는 시간에 인사했다가, 로제는 대뜸 울먹이며 죄송하다면서 존댓말로 연신 사과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와 눈도 못 마주쳤던 그녀에게서 강한 두려움이 읽혔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작년에 주도적으로 날 괴롭히려 했으니까.
빙제 깔보기, 빙제 괴롭히기, 친오빠를 통해 빙제에게 손찌검하기 등. 내 객관적인 위치를 고려하면 철 없이 저지른 악행이 가져올 업보가 심히 두려울 것이었다.
나야 그런 이유로 기세등등하게 로제에게 복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다시는 서로 아는 척하지 말자. 그런 의도로 가볍게 어깨만 툭툭 두들겼을 뿐.
이를 안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로제의 얼굴은 더욱 심각한 공포감으로 물들었다.
수업 시간에 로제는 조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과제에 임하며 가능한 한 내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이튿날에 로제는 셔틀을 자처했다.
─ ‘제가 신발을 닦아드려도 될까요…?’ ─ ‘말씀만 해주시면 제가 요깃거리를 사 올게요…!’
부담스러웠기에 더는 말 섞지 말자고 했다. 로제의 얼굴에 짙은 좌절감이 번진 때였다.
사람들의 태도와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가장 크게 실감했던 게 뜻밖에도 로제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극적이어서 그런 걸까.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었다.
한 손으로 작은 마력기를 쥐고 마력 운용력을 단련하며 오르핀관 복도를 걸었다. 무인 상점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러 가는 길이었다.
마력 고갈 상태가 회복되어 이제는 마력 운용이 자유로워졌다. 「앨리스 토벌전」을 거치고 무저갱까지 해치운 덕분에 꽤 강해졌다는 실감이 났다.
마력이 다시 돌아왔으니 하트 여왕-앨리스를 소환하는 데 들이는 소모 마력량을 검토했다. 높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꽤 놀라웠다.
‘역시 소환 비용 미쳤네.’
하트 여왕-앨리스를 소환하는 데 들여야 할 소모 마력량은 무려 17만 5천. 지금의 나조차 온전한 상태의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수인은 한번 소환하면 될 뿐이지만, 소환에 들이는 마력의 소모량은 사역마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다. 심지어 하트 여왕은 강력한 사역마들과 하수인 군세까지 거느리므로 그만큼 비용이 큰 것도 당연했다.
내가 앨리스를 곁에 두려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소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 앨리스는 인간 하수인이라는 이례적인 케이스라서 함께 나다녀도 문제될 건 없었다.
“아이작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무인 상점에서 음료수를 구매하자 후배들이 인사를 걸었다. 친근하게 받아주었다.
마침 그들 너머, 야외 복도를 지나던 담녹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보였다. 카야 아스트레앙이었다.
양갈래 머리…이긴 한데, 낮게 묶었다. 차분한 스타일로 바꾼 건가. 무슨 심경 변화를 겪었는지는 몰라도 게임에선 못 봤던 모습이라 신선했다.
반가워서 후배들을 제치고 카야를 향해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카야!”
“……!”
카야는 “아, 아이작 님…!”하고 경악하더니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사실 이럴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카야는 지레 겁을 먹더니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었다.
“으아아아….”
“머리 잘 어울린다. 느낌 한번 바꿔본…?”
“죄, 죄송합니다아악!!”
카야는 등을 돌리더니 엄청난 속도로 도망쳤다. 그 여파로 일어난 바람에 내 머리카락과 교복 자락이 잠시간 나부꼈다.
“……?”
내게 인사를 걸었던 후배들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나와 카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또 저러네….’
언제쯤 대화해줄까. 음료수를 마시면서 조용히 한탄했다.
이미 작년에도 이런 시기가 있었기에 당황스럽진 않았다.
카야는 밤마다 이불을 찰 만한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생기면 한동안 나를 피해 다니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쪽으론 뒤끝이 오래가는 성격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무저갱을 쓰러뜨리고 돌아온 날.
나흘간 안 씻은 쌩얼로 날 맞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리 된 듯했다. 비무장 상태의 제 얼굴을 보여 준 기억에 자괴감이 드는 것이었다. 거기다 울먹이며,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안기기까지 했으니….
간혹 인적이 드문 구석 복도에서 벽에 이마를 힘없이 툭툭 박아 대는 연유가 그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저번에 몰래 지켜봤다.
‘그냥도 예쁜데.’
내 애정캐 미모가 어디 가겠는가.
방학식 직전까지 저러면 난감해질 테니, 기회 봐서 붙잡고 얘기를 나누는 편이 좋겠다.
“…….”
문득 생각이 깊어졌다.
성녀 비앙카에게 받았던 낡은 책 내용이 내 머릿속을 뭉게뭉게 메워갔다.
[ 8 ]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당신의 동료에게 공유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오로지 당신만이 알아주세요. 카야 아스트레앙은 악신의 그릇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이것이 가장 최악의 경우라는 사실 만큼은 압니다. 생명과 파멸의 악신이 탄생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할 거예요.
‘악신의 그릇….’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내가 1회차 때 악신과 싸웠던 기억에서도.
카야가 악신의 그릇이 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애당초 1회차 때 카야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잖아.
괜한 불화만 일으킬까 봐 도로시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 글쓴이도 그런 점을 우려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만약 혈법사 악식의 카야를 저지하지 못했다면 배드 엔딩 「식탐」으로 이어졌으리라. 그 엔딩에서 카야는 마족이 되고, 나중엔 마왕이 된다. 커뮤니티에선 마왕 엔딩이라고 불렸다.
사실상 식물 마력이 끌어들인 악식의 힘이 마족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 지금의 카야는 명백한 사람이고 <메르헨의 마법 기사> 해피 엔딩에서도 그녀는 쭉 사람이었지만.
아직 내가 모르는 요소 탓에 카야가 마족이 될 위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다 마신 음료수 병을 찌그러뜨리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최종장, 「악신 토벌전」 때 카야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면 내가 막아 낼 거니까.
마족이 사람으로 장난치는 건 이제 구경할 생각이 없었다.
……
“고생했다, 이안. 이거 마셔라.”
“아, 고마워.”
방과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안 페어리테일은 야외 대련장에서 모르칸을 상대하고 뻗어 버렸다.
모르칸은 이안을 상대하기 위한 적절한 수준을 가늠해 교육용 대련을 반복했다. 덕분에 이안이 기절하는 빈도도 크게 줄었다.
다만, 어째 이안의 반사신경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약 1년이라는 단기간에 녀석의 반사신경을 고인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이안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녀석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이작, 내 거는?”
“챙겼어, 자.”
“아싸!”
관중석에 있던 에이미 할로웨이에게도 음료수를 건넸다. 그녀는 기뻐했다.
나는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할 만해?”
“그럭저럭. 실력 차가 너무 심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다음에 다른 녀석들도 상대하게 해 줄게. 그리고 너무 검에만 의존하지 마. 그럼 더 나아질 거야.”
“알긴 아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네.”
이안은 한숨을 푹 토해내며 한탄했고, 음료수를 전부 마신 후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작. 새삼스럽지만, 이런 기회 줘서 고맙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주인공이라 그런지 친해지니까 금방 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피식 웃고 등을 돌렸다.
“난 간다. 파이팅해라.”
고인물 컨트롤은 여기서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안은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최소한의 전투 능력만 갖추면 된다. 나머진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이안이나 나나 평화로운 엔딩을 맞이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안과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 뒤, 단련하러 야외 대련장을 떠나갔다.
……
마법 단련을 마치고 마무리로 뜀박질을 했다. 동시에 공부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복습했다. 낡은 책에서 보았던 내용이 이따금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앨리스가 “어서 오렴.”하고 나를 반겼다.
나는 몸을 씻고 책을 읽었다. 앨리스는 내게 간식을 챙겨주거나 다른 데서 책을 읽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최대한 내 일과를 방해하지 않고 사소한 부분을 챙겨주려는 느낌이었다.
깊은 밤, 방안은 어두웠다. 램프가 불빛을 약하게 퍼뜨리고 있었다.
오늘은 앨리스가 아카데미 생활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 동거 날이었다.
나는 침대에, 앨리스는 침대 옆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리를 만들어 누워 있었다. 그녀가 여기 오고 첫날이 지난 뒤로 우리는 그렇게 수면을 취해 왔다.
허허로운 정적. 슬슬 잠을 청하려는 때였다.
“애기야.”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침대 위로 앨리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잘래? 마지막 날인데 애기가 곁에 없으니까 조금 외롭구나.”
장난스러운 미소와는 영 안 어울리는 대사였다.
“우리 애기…, 약속 잊은 거 아니지?”
일부러 서운한 척 묻는 앨리스.
끝까지 내 곁에 두겠다고 한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와 앨리스가 한 약속이 그거 말곤 더 없으니까.
나는 옆으로 몸을 빼서 자리를 널널하게 만들었다.
“그래, 올라와.”
앨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침대에 올라오더니 내 옆에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얼마간 고요가 흘렀다. 눈을 감고 잠들려 하자 상냥한 목소리가 공기를 간질였다.
“애기야.”
“왜?”
“나 덮칠래?”
움찔. 잠이 확 달아났다.
금방 말 뜻을 이해한 나는 도끼눈을 뜨고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평소에 자상하던 미소가 오늘따라 음흉하게 비쳤다.
“나 지금 굉장히 무방비하단다.”
“너 진짜…. 진심이야?”
“히, 반응 귀여워라. 당연히 농담이지.”
연이어 “반은….”이라는 말이 아주 작게 이어진 것 같은데,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어둠이 깔린 천장을 쳐다보았다. 곧 앨리스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자고 일어나면 애기 방 떠나야 되는구나. 우리 애기 한동안 좋았겠네? 예쁜 내가 매일 챙겨줘서.”
“자아도취 뭐냐. 그래도 계속 내 방에 머무르게 할 수 없으니까 뭐….”
“꽤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구나?”
“진짜로 좋았거든. 고마웠어.”
“…그렇니?”
마치 간지러운 부분을 귀신처럼 알아내 긁어주듯, 앨리스는 선뜻 내가 필요했던 걸 척척 챙겨주었다. 내가 우려했던 일도 알아서 주의해주었다.
자기 전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적적한 분위기를 풀어주었고, 가끔 재밌는 농담을 던지며 내게 웃음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좋았다. 만족스러웠고, 행복감도 느꼈다.
“아이작.”
앨리스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담백하게, 그러나 느릿느릿하게 웃음 지었다. 누그러지고 녹아내린 눈빛은 달빛처럼 아스라이 빛나며 날 요구하고 있었다.
편안한 숨결이, 두 눈의 느슨한 깜박거림이, 은은히 달아오른 뺨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했다.
“나도 고맙단다, 행복하게 해 줘서.”
앨리스는 마지막 날 부탁이라며 손을 잡아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그리 잠들었다.
* * *